가려진 자연호텔, 검암동 정희량 유허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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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진 자연호텔, 검암동 정희량 유허지에서
  • 유광식
  • 승인 2021.08.30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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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유람일기]
(62) 서구 검암동 정희량 유허지 일대 - 유광식 / 시각예술 작가

 

허암 정희량 유허지, 2021ⓒ유광식
허암 정희량 유허지, 2021ⓒ유광식

 

처서(處暑)가 지나니 기온이 한풀 꺾였다. 그래도 뜨거웠던 여름날의 경험과 기억이 쉽게 떨궈지지 않는 날씨다. 접종의 원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세계가 면역 생성의 절박한 투쟁을 본래 일상처럼 진행하고 있다. 멀리 아프간 소식은 가까운 슬픔으로 다가온다. 앞으로의 삶은 어디로 흐를지 더더욱 긴박하게 궁금해진다. 

 

험봉산 날씨, 2021ⓒ유광식
험봉산 날씨, 2021ⓒ유광식

 

서구의 허리를 가르는 아라뱃길은 깊은 협곡으로 남북의 생활권을 나눈다. 아라뱃길 위로는 한남정맥의 길목으로 여러 산이 있고, 아래로는 기존의 생활 주거지와 공단이 자리하고 있다. 수많은 아파트와 매끈한 아스팔트 길이 도시 구석구석을 잇는 가운데, 한적함을 따라 거주했던 어느 문인의 자취를 검암동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바로 허암 정희량 선생의 유허지다. 

 

주택가에 자리한 유허지 입구, 2021ⓒ김주혜
주택가에 자리한 유허지 입구, 2021ⓒ김주혜

 

‘허암’이라는 호가 허암산에서 유래한 것인지 호를 따서 허암산이라고 명명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 지금은 험봉산이라는 이름으로 유허지가 위치해 있다. 산 옆으로 이어진 공촌사거리에서 검암역까지의 구간은 많은 차량들이 좁은 차도를 따라 언덕을 타는 과정으로 거세다. 잠시 시천교를 앞에 두고 우측으로 꺾어지자 숨 돌릴 분위기의 동네가 나온다. 기슭을 따라 주택들이 계단처럼 자리했다. 그 가운데에는 이름이 예쁜 은지초등학교가 있고 검암도서관이 있었다. 

 

유허지에 지어진 곤충호텔, 2021ⓒ유광식
유허지에 지어진 곤충호텔, 2021ⓒ유광식

 

정희량 선생은 왕에게 직언하고 유배지를 떠돌다 은신처로 허암산에 다다랐다. 동생들이 찾아오면 함께 차를 마시며 나라를 걱정했다. 부귀영화에는 관심 없이 조용히 생활하였으나 나라가 시끄러워진 통에 유유히 거처를 버리고 사라진 터였다. 단출한 초가집 하나 있었을 자리엔 정자도 있고 허암차샘도 있고 시비도 세워져 있어 인근 아이들과 주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는 것 같았다. 아주 오래전 난세의 어느 문인이 묵었던 비밀스러운 호텔 같은 장소였다.

 

허암 정희량의 시(야좌전차), 2021ⓒ유광식
허암 정희량의 시(야좌전차), 2021ⓒ유광식

 

험봉산 북쪽 기슭의 입구를 찾기가 쉬운 건 아니었다. 그 순간 ‘나를 따라 오세요’라며 앞질러 오르는 두 사람이 보였다. 소풍 가는 것처럼 어깨에 돗자리를 메고 빠르게 올랐다. 좁은 산길을 조금 오르면 유허지가 나타나는데, 지금이야 거닐기 편하게 잘 정비해 두었지만 예전 정희량 선생이 계셨을 분위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가만히 둘러보니 차를 마시거나 술을 빚고 산을 오르며 살다 홀연히 사라진 그의 자취가 너무 짙은 나머지 고즈넉한 장소감이 시원함을 건네주었다.  

 

유허지에서 내려다본 검암동 방향, 2021ⓒ유광식
유허지에서 내려다본 검암동 방향, 2021ⓒ유광식

 

곤충과 새 소리에 맑게 샤워를 하고 내려와 잠시 검암도서관에 들렀다. 마을의 샘인 검암도서관을 둘러보다 홀의 이름을 보고 반가움을 맞이했다. 1층은 서예가인 검여 유희강홀이고 2층은 허암 정희량홀이다. 밝은 화이트 톤의 분위기 속에서 학생과 주민들이 책을 열람하고 있었다. 서가를 훑어보고 책 두 권을 대출했다. 은신을 위한 장소였지만 지금은 노출되어 버린 아리송한 현실의 그림자가 왠지 모르게 편안해졌다.  

 

검암도서관 1층 어린이 도서관(유희강 홀), 2021ⓒ김주혜
검암도서관 1층 어린이 도서관(유희강 홀), 2021ⓒ김주혜
검암도서관 2층 열람실(정희량 홀), 2021ⓒ유광식
검암도서관 2층 열람실(정희량 홀), 2021ⓒ유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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