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화도 고개 따라 생겨난 마을 - 배성수 / 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조선시대 인천 바다를 지키던 군사 기지가 건설되었던 곳. 개항 후 일자리를 찾아 모여든 가난한 조선 사람들이 정착했던 곳. 광복 후 전쟁을 피해 내려온 피난민들의 터전이자 산업화 시대 힘겨웠던 하루 일과를 마친 노동자들이 몸을 뉠 수 있었던 그 곳, 화수동. 2009년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된 이곳에는 3천 세대가 넘는 아파트 단지가 조성될 예정이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게 될 화도 고개와 화수동을 다시 바라본다.
꽃 섬, 화도에 들어선 군사기지
조선시대 화수동은 화평동, 만석동과 함께 인천도호부 다소면 고잔리에 속했다. 한자로는 ‘고잔(古棧)’이라 표기하지만 실은 바다로 돌출된 육지 끝자락 곶의 안쪽이란 의미에서 고잔이라 불렀다. 여기서 말하는 곶은 응봉산(지금 자유공원) 줄기의 서북쪽 끝인 묘도(지금 원괭이마을)를 가리키고 묘도의 안쪽 동네, 즉 화평동과 화수동 일대가 고잔에 해당한다. 산줄기가 묘도를 향해 뻗어 가다 살짝 솟은 해발 36m의 야트막한 구릉이 ‘꽃섬’, 즉 화도(花島)다. 섬이 아님에도 화도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바다에서 이곳을 볼 때 꽃처럼 생긴 섬 같아서가 아닐까? 그러고 보니 강화도 선원면 염하 강변 낮은 언덕에도 화도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조선은 1876년 일본과 사이에 체결된 강화도조약에 따라 서해안의 항구 하나를 개항장으로 결정해야 했다. 인천 제물포를 개항장으로 요구하는 일본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조선 정부는 인천과 부평 해안에 포대를 설치했다. 혹시 모를 일본 군함의 상륙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이 서해안 해로 측량을 통해 인천에서 육로를 이용하면 뱃길로 서울까지 이동하는 것보다 훨씬 편리하다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상륙을 위해 갯골을 따라 육지로 접근하는 일본 군함을 막아내기 위해 갯골 수로 곳곳에 포대를 설치했고, 1879년 여름 화도의 북사면에 각 포대를 관할하는 군사기지 화도진(花島鎭)을 두었다. 화도진에서는 응봉산 정상 등 해안가 고지대에 요망막(瞭望幕)을 설치하고 해안을 감시하기도 했다.
화도 고개, 화도진과 응봉산을 연결했던 길
포대나 요망막은 해안가와 산 정상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접근이 쉽지 않았다. 유사시 포대까지 병력을 신속하게 보내기 위해서는 길을 내야 했고, 포대와 요망막으로 연결되는 모든 길은 화도진에서 출발했다. 화도진에서 시작되는 길은 크게 세 갈래 방향으로 갈라졌다. 정문 앞에서 시작되어 동쪽 송림리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화도를 넘어서면서 다시 북송곶(지금 송월동 변전소)과 응봉산 요망막 및 제물포(지금 인천역) 가는 길로 갈라졌다. 당시 고잔리 일대로는 민가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화도진을 출발한 세 갈레 길은 대부분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화도진 병사들은 이 길을 따라 지금 제물포고등학교와 괭이부리마을에 두었던 파수직소(把守直所: 유사시 포대에 배치되는 병사들이 대기하는 장소)를 오갔다. 그 중 화도진에서 화도를 넘어 응봉산으로 이어지는 남쪽 길이 화도 고갯길이다. 화도 고개는 화평철교에서 냉면골목을 가로지른 뒤 화도교회를 지나 화수동 쌍우물로 이어지는 지금의 ‘화도로’를 말한다. 해발 39m의 야트막한 화도 언덕을 넘는 고개지만, 바닷가에서 시작되는 고개여서 그런지 가파른 느낌이 없지 않다.
한동안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되던 화도 고개는 개항을 맞으며 크게 변화한다. 조선은 각 나라와의 조약을 통해 제물포와 응봉산 일대를 외국인 전용 공간인 조계지로 설정하였고, 조계 바깥으로는 조선의 상인과 노동자들이 모여들어 터를 잡았다. 조계지로 연결되는 길을 따라 조선 사람들의 상가와 주거지가 형성되었는데 주로 서울로 향했던 길인 싸리재, 쇠뿔고개와 화도진으로 이어지는 화도 고개 인근부터 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상인을 비롯한 부유층은 내동과 경동, 율목동 등 조계지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고, 비교적 거리가 있던 화도 고개 주변은 부두 노동자 등 가난한 이들의 공간으로 형성되어 갔다.
세 개의 마을이 이룬 동네, 화수동
개항 직후인 1883년 일본공사관 소속 이소바야시 신조[磯林眞三] 소위는 인천에서 서울까지 도로망을 조사한 뒤, 지도로 만들어 공사관과 일본 정부에 보고했다. 이 지도에 따르면 당시 화도에는 열 가구 정도가 살고 있었다. 이처럼 조선시대 다소면 고잔리에 속해 있던 화수동은 주민이 많은 동네가 아니어서 화도진이 있던 화도와 무너미(水踰; 지금 화수 사거리) 일대로 20여 가구 정도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개항 후 화도고개 주변으로 가난한 노동자들이 터를 잡으면서 마을의 규모도 커지기 시작했다. 먼저 화도진이 있던 화도 북쪽이 조선인 노동자의 집들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이렇게 형성된 마을은 무너미까지 이어졌다. 1906년 일본인 이나타 가스히코[稲田勝彦]에 의해 만석동 해안이 매립되면서 지금 화도진 도서관이 있는 화도 남쪽도 주거지로 변해갔다. 화도 주변의 인구가 늘어나자 개항 이전 고잔리로 불리던 이곳은 자연스레 동리(洞里)가 분할되었다. 화도 고개를 따라 화도진 일대가 화도동으로, 무너미에 있던 마을이 수유동이 되었다. 화도 고개 남쪽은 새로 생긴 동네라 하여 새말, 즉 신촌이라 불렀다.
한일 병합 후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이곳에 있던 세 개의 지명도 하나로 합쳐졌다. 신촌, 화도동, 수유동의 앞 글자를 따서 신화수리(新花水里)라 하고, 인천부에 속하게 했다. 1936년 인천부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조선인 마을의 행정지명을 일본식으로 개정하는데, 이때 신화수리는 화수정(花水町)으로 개편되었고 광복 후 다시 화수동이 되었다. 한편 만석동 매립지 일대로 제염, 정미, 간장공장 등이 들어서면서 이곳의 인구도 꾸준히 늘어났다. 1932년 신화수리에는 5,230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어 당시 인천부에서 송현리, 송림리, 도산리에 이어 네 번째로 많았고, 1939년에는 8,421명으로 불과 7년 만에 62%의 증가율을 보였다. 당시의 급격한 인구증가는 1934년 만석동에 들어선 동양방적 인천공장을 필두로 화수동, 만석동 해안가 매립지에 각종 군수공장이 건설되면서 공장 노동자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피난민과 공장 노동자의 터전
광복 후에도 화수동의 인구는 계속 늘어난다. 6.25전쟁 당시 전쟁을 피해 남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이 동구 일대에 정착하는데 화수동도 그 중 한 곳이었다. 화도 고개와 신촌 일대로는 이미 민가가 밀집해 있었기에 피난민들은 야산이었던 지금 화도진공원 자리에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고단한 삶을 이어갔다. 가까운 바닷가 매립지로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공장이 모여 있었고, 부두에서 멀지않았던 탓에 일거리 구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곳에 터를 잡은 피난민들로 인해 1954년 화수동의 인구는 13,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전쟁 피해가 어느 정도 복구되고 산업화시대로 접어든 1960년대 그동안 광복과 전쟁으로 멈춰서 있던 해안가 공장들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가까운 화수동 일대로 모여들었다. 마을의 빈 터와 야산은 집들로 빼곡히 채워졌으며, 1950년대 15,000여명이던 화수동의 인구는 1970년대 들어 24,000명을 넘어섰다. 사람들로 넘쳐나던 화수동의 전성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인천의 도시 확장에 따라 새로운 주거지가 조성되면서 화수동을 비롯한 동구의 인구는 감소하기 시작했고, 사람이 떠난 마을은 활기를 잃어갔다. 이제 화평동을 포함해서 15,000명도 안 되는 사람들만이 쓸쓸해진 이곳을 지키고 있다.
15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군인, 노동자, 상인, 학생 등 수많은 사람들이 화도 고개를 넘나들었다. 그리고 고갯길 따라 늘어선 상점과 골목 안 주택들은 길을 오가던 이들의 삶과 함께 해 왔다. 조만간 그들의 삶은 기억으로만 남을 것이며, 꽃섬 화도를 가로지르던 고갯길은 수명을 다할 것이다. 이미 많이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이곳에 서린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끄집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