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싹했던 여름밤 - 한밤의 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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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싹했던 여름밤 - 한밤의 데이트
  • 양진채
  • 승인 2011.06.2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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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양진채 / 소설가


며칠 전 둘째아이와 남편이 늦은 밤에 손을 맞잡고 집에 들어왔다. 독서실에서 공부하다 배가 고파진 딸이 그 시간쯤이면 그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 아빠를 수소문한 것이다. 부평 토박이이면서 자전거포를 운영하는 남편은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면 찾아오는 친구들과 술 한 잔을 하고 집에 들어오는 날이 많았다. 중학교 3학년인 딸은 아빠 술자리를 찾아갔고 안주인 족발을 먹고 왔다. 
 
문제는 그 술자리가 다름 아닌 부평미군기지, 즉 캠프마켓 앞 천막 농성장이었던 것이다. 얼마 전부터 시민단체와 환경단체, 정당 등 많은 단체들이 미군기지 내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은 독성폐기물을 찾아내고 환경조사를 하기 위해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남편은 일찍 가게 문을 닫고 그날 농성장에서 밤 당직을 서는 후배를 격려하기 위해 갔다가 딸의 전화를 받았고, 딸은 학교 정문 건너편에 마련된 농성장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아무렇지 않게 찾아가 아빠 술자리에 끼었다.
 
아빠가 후배와 술 한 잔 할 동안 누군가 먹으로라고 사주고 간 족발을 잠자코 뜯었을 딸. 그 딸의 눈에 무엇이 비쳤을까. 시민들에게 나눠주었던, 전단지, 피켓에 쓰인 글귀, 펄럭이는 플랜카드의 구호, 그리고 아빠와 후배가 나누던 이야기들이 아이의 눈과 귀를 자극했을 것이다.
 
미국은 제 나라 어디에서도 처리할 수 없을 만큼 독한 폐기물을 많은 운반비를 들여 형제의 나라라고 칭하는 대한민국. 그것도 코앞에 이제 막 자라나는 아이들의 학교가 두 곳이나 있고, 아파트가 밀집한 우리 동네 한가운데 있는 부평미군기지에 독성폐기물 448드럼을 파묻었다. 실로 경악을 금치 못할만큼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오염된 토양이나 물이 우리 인체에 해로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오싹해졌다. 

올해 봄 베트남 남부를 여행하다가 호치민 시내의 전쟁박물관을 관람한 적이 있었다. 베트남 전쟁 때 고엽제 피해를 입은 많은 베트남 사람들은 몸이 붙은 쌍둥이, 손가락 발가락이 없고 얼굴과 몸이 이상한 기형아가 태어났으며, 밀림은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을 만큼 초토화되었다. 고엽제를 비행기에서 투하할 때 미군들에게는 사전에 공지가 되었지만 참전했던 우리 국군에게는 통보가 되지 않아 쏟아지는 고엽제로 세수를 했다는 가이드 말을 들었을 때는 가슴이 먹먹했다. 그만큼 독한 폐기물이 바로 우리 아파트 앞, 아이의 학교 앞에 묻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전쟁박물관에서 보았던 초토화된 땅, 기형이 된 사람들의 끔찍한 고통이 내 고통인양 몸서리쳐졌다. 

남편은 딸아이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했을까, 아이는 또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자본주의 힘의 논리로 설명할 것인가, 약소국의 설움으로 얘기할 것인가.  딸에게 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힘 있는 나라를 만들라고 했을까. 아직 가치관이 명확하게 서지 않은 아이에게 이런 나라를 보여주어야 하는 부끄러움을 어찌할 것인가. 

초여름 밤, 모처럼 아빠와 단 둘이 알콩달콩한 데이트를 꿈꿨을 딸은 그 밤 체해 맛있게 먹은 족발을 모두 게워내고 손발을 딴 다음에야 잠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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