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 관통도로, 저항의 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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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 관통도로, 저항의 15년
  • 곽현숙
  • 승인 2022.01.06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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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곽현숙 / 배다리 아벨서점 대표
배다리 (지하)관통도로의 지상부지 ⓒ강영희
중구 유동과 연결되는 배다리 (지하)관통도로의 지상부지 ⓒ강영희

 

배다리 관통도로를 20년만에 재착공한다고 법석이다. 관통도로를 반대해온 배다리 주민으로 그 20년을 되돌아 보니 무거운 회한이 밀려온다. 배다리라는, 인천 근현대 역사가 농축된 마을공동체를 인천시가 무지막지하게 절단내려 했던 사실을 반성하거나 하는 흔적은 찾을 수 없다.

2006년, 필자는 배다리에 가게를 사서 새로 꾸며 보려고 500만원어치 나무를 사서 말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인천시에서 사람이 와서 전하는 말이 이 동네가 아주 좋아 진다고 한다. 낙후된 이곳을 고층 빌딩으로 세우고 도로가 나고......

이 곳이 좋아진다고 했는데, 내 가게 터가 30평 이층집이지만 재개발이 되어도 이층까지는 안주겠지?... 전시관을 꾸미려고 했는데 못하겠네! 그렇더라도 나라에서 하는 일이니 감수해야지... 그래도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시에 전화를 했다. ‘우리를 어디에서 장사하게 해주고 다 지으면 들어오게 하는가?’ 물었다. 그때까지 그랬다. 그랬더니 ‘아니요, 지가에 의해 보상을 하고 3개월 장사 보상을 합니다.’ 보상이라니! 몇십년 만에 얻은 내 가게에 들어가 보기도 전에 나라에서 달래네! 머리가 하얘지고 하루하루 마음이 잦아드는데, ‘사그러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몸으로 겪어야 했다.

그래도 그때까지 책방을 그만두라니 책이나 보면서 살아야지, 마음을 달랬다. 그런데 책방에 들어서는 손님들의 눈은 왜 그렇게 그리움에 찬 눈길로 들어서는 지. 정신 차리고 주변 책방들을 다 둘러보니 어느 한 집 책방을 이곳에서 꾸릴 분들은 없다. 책방 거리가 없어지네! 인천에 책방거리가 없어지네!

그러면서 그 도로가 무슨 의미인지 보이기 시작했다. 쭈욱 금을 그어 도로를 만들고 사람이 사는 생존의 존엄성을 간단히 밀어내고 콘크리트로 회벽을 치는 행정의 생각이었음을 보게 되었다.

인천시는 배다리 관통도로를 기획하기 전에 인천의 역사를 바로 알고 나서 그림을 그려야 했었다. 필자가 까막눈이더라도 책방 노동을 감내 할수 있는 힘은 좀 더 나은 사회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인천시민의 삶을 운영하는 시 행정은 더 말할 것 없는 것 아닐까?

2007년, 도로의 잘못됨을 이야기하며 인천시민의 마음을 끌어 모아 많은 구민들과 힘을 모았다. 힘겨운 저항의 시작이었다. 한, 두 사람이 모이기 시작하여 주민대책회의에 어어 시민모임이 만들어졌다. 인천의 중요한 곳은 다 찾아다니며 알려갔다. 시 당국은 송현아파트를 지으면서 산밑을 뚫어 돈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이를 도로로 이을 송현고가교를 건설했다. 배다리와 이 일대 주민들은 송현고가교 설치를 막기 위해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어른들은 새벽부터 저녁 6시까지 봄날의 스산한 추위를 마다 않고 나섰다. 당시 싸움을 조장하여 붙잡아가고... 경찰들은 어른들을 겁주며 벌금을 물려 대표 8명에게 조서를 받게하던 현대건설 현장...

2008년 5월, 바람에 천막은 날아가고 많은 사람은 일인시위와 그룹시위를 벌이고, 지식인들은 언론에 호소하며 1년 5개월 동안 싸웠다. 많이들 지쳤는데, 시 종합건설본부에 들어가니, 그 때서야 이 도로가 산업용 고속화도로라는 말을 들었다.

그때 우리가 말한 것은 이렇게 중요한 고속화도로라면 배다리가 문제가 아니라, 동국제강에서부터 삼익아파트까지 반듯한 도로로 만들어 져야 도로다운 고속화 산업도로가 되지 않는가 하고 따져 물었다. 맞는 이치였다. 그런에 이 말에 종합건설본부는 돈이 없다고 했다. 이에대해 우리 주민들은 동구의 아직 건드려지지 않은 지상에 인천을 말할 수 있는 문화거리로 만들어 나간다면 최고의 관광지로 몇배를 회복할 수 있잖냐고 했다. 하지만 현대건설은 고가교 건설을 강행해서 송현아파트 주변은 험한 모양이 되었다.

2008년 7월, 우리는 다시 시청 앞에서 1인 피켓시위를 벌였다. 피켓에는 ‘배다리 우리가 지켜야할 인천에 역사입니다!’, ‘산업도로는 반듯한 지하도로로!’라는 문구를 넣었다.

2010년 3월, 안상수 시장이 배다리 삼거리에 와서 배다리는 역사문화거리로 가겠다고 말했다. 시민의 소리에 답한 것으로 듣고, 그렇다면 도로는 계획을 바꾸어야 한다고 했으나 돌아오는 말은 또 ‘돈이 없어서 못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조택상 동구청장이 몇 년을 수문장 역할을 해주었다. 2015년, 박상은 국회의원이 느닷없이 지상도로를 위한 주민회의를 한다고 하여 주민들이 밀어내 무산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10년이 넘도록 배다리의 정체성을 이야기 하는데 인천시는 건설업의 식민지인가라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다시 천막이 도로부지 위에 세워졌다.

이 후 배다리 관통도로와 관련해 여러 제안들이 나왔다. 2018년 ‘소통’을 화두로 인천시가 나섰다. 우리 주민측에서는 시 도로과와의 소통이지만 인천시민 전체의 구도를 끌어내자는 마음으로 그 ‘소통’에 대응했다. 주민들은 도로개설에 따르는 안전, 단절, 소음 피해 등 여러 사안에 대해 인천시가 전체적으로 고민해야할 것들을 주장하니 시에서 잠정적으로 진행을 보류했다. 이해 12월 말 인천발전연구소가 “배다리 산업도로 건은 완전 지하도로로 해야 상반부를 제대로 된 문화의 거리로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주민들은 완전한 지하도로, 전 구간 지하도로를 기대하고 있는 중에, 인천시 행정은 주민들에게 온갖 것을 흔들어 도로 지지서명을 받아냈다. 뒤에서 우리를 음해하며 갈라놓으며 서명을 받아냈다. 

우리는 이 도로는 나쁜 도로라고 주장했다. 일부 구간만 지하도로(송림로~유동삼거리 간 725m)인데, 기본적으로 그 지하도로가 고속화 산업도로로서 구배의 높낮이가 있어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시공하려는 지하구간은 양쪽 입구가 높아 아무리 애써도 위 아래로 타원형의 배 같은 모형으로 될 수밖에 없는 도로다. 기후변화로 국지성 호우가 심한 시대다. 지난 2020년 7월 급작스런 호우로 부산의 한 지하차도가 침수되어 운전자들이 사망한 사례가 있다. 배다리 지하도로도 그 위험을 안고 있는 도로라고 본다.

한편으로, 지난 15년간의 배다리 관통도로 반대 운동은 동구와 배다리가 어떠한 곳인지 많은 시민들이 배울 수 있게 했다. 동구는 인천 근현대사에서도 볼 수 있듯, 우리 선조들이 역사를 만들어내며 성실하게 살아온 삶의 터전이었다. 척박한, 환경을 견디어 힘을 모아 나라가 딛을 언덕이 되어주었다. 인천 3.1운동의 시발점도 배다리 창영학교다.

전국으로, 세계로 퍼져나간 배다리 사람들은 몇 년, 몇 십년 만에라도 배다리 책방 문을 들어서며 긴 평화의 숨을 쉰다. 어디 책방에서 뿐이겠는가! 사람이 가고 싶은 곳, 사람들의 회상 속에 마음이 쉴 곳. 세월을 들여 만들어가면 안되는 것일까?

처음부터 잘못된 배다리 도로계획을 놓고 이제와서 인천시는 ‘해결’이라는 말로 흐믓해해서는 안된다. 도로는 도로답게 제대로 건설하고, 마을은 마을답게 전통을 살리며 이어가야 한다. 당연히 인천시는 이를 선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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