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렵지만 친근했던 존재,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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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렵지만 친근했던 존재, 호랑이
  • 배성수
  • 승인 2022.01.11 0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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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수가 바라보는 인천 문화유산]
(10) 임인년 새해를 맞이하며 - 배성수 / 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2022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육십갑자 중 ‘임인년(壬寅年)’으로 12지 가운데 호랑이를 뜻하는 ‘인(寅)’자가 들어 있어 호랑이해에 해당한다. 전통적으로 호랑이는 사납고 용맹한 짐승으로 인식되어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나쁜 기운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신성한 동물이기도 했다.

 

누구나 두려워했던 호환(虎患)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비디오를 빌려보던 시절, 영화가 시작되기 전이면 언제나 등장하던 만화 속 나레이션이다. 불법 비디오를 근절하자는 캠페인 영상물이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호환(虎患)은 ‘호랑이에게 당하는 재앙’이라는 의미로 호랑이에게 여러 사람이 물려죽거나 상해를 입는 경우를 가리켜 쓰던 말이다. 조선시대 호환은 전국적으로 자주 발생했는데 영조 때인 1754년 윤 4월에는 경기도에서만 한 달에 120명의 백성이 호랑이에 물려죽은 일이 있었다. 호환이 발생할 때마다 조정에서는 해당 지역에 휼전(恤典)을 베풀어 백성들을 위로하곤 했다.

불법 비디오 근절 캠페인 에니메이션 영상
1990년대 불법 비디오 근절 캠페인 애니메이션 영상

조선시대 인천 지역에서 호환이 발생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호랑이가 출몰했다는 내용은 역사 속에 종종 등장한다. 특히 강화도를 비롯한 인천 연안의 섬에는 말을 기르는 국영 목장이 설치되어 있어 호랑이 출몰이 잦았다. 태종 때인 1405년 큰 호랑이가 석모도 목장에 들어가 말을 잡아먹는 일이 발생했는데 당시 강화부사 이정간(李貞幹)이 인명피해 없이 이 호랑이를 포획하여 임금에게 상을 받았다. 영조 때이던 1765년에는 강화도 길상목장에 호환이 발생하여 망아지가 호랑이에 희생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중앙군을 동원하여 사냥하자는 건의도 있었다. 인천에서 호랑이를 잡아 바친 백성에게 상을 내린 일이 있었고, 세조 때 부평과 김포 일대에 호랑이가 창궐하자 이를 잡기 위해 지방군을 동원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친근하게 다가왔던 호랑이

전통시대 호랑이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짐승이었지만, 그와 반대로 악귀나 나쁜 기운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믿음의 대상이기도 했다. 호랑이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은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삼국시대부터 12지에 속하는 다른 동물과 함께 왕이나 귀족의 무덤을 지키는 호석에 사용되었고, 조선시대에는 궁궐의 월대 난간을 장식했다. 민간에서는 호랑이 부적을 만들어 몸에 지니는가 하면 기와의 끝 부분에 호랑이를 새겨서 악귀로부터 집안을 보호하는 의미를 부여했다. 대부분의 민간신앙에서 호랑이는 산신으로 치환되어 마을이나 사람들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기도 했다.

호랑이무늬 수막새기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호랑이무늬 수막새기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호랑이는 용맹함과 위엄을 두루 갖춘 백수(百獸)의 제왕이었지만, 때론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은 존재로 표현되면서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주었다. 단군 신화에서 호랑이는 급한 성미 탓에 100일 동안 동굴에서 쑥과 마늘로 버틴 곰에게 주인공 자리를 내주었고, 우는 아이에게는 곶감보다 못한 존재가 되기도 했다. 두렵기만 한 존재였던 호랑이에게 바보스러움을 입혀서 친근한 존재로 탈바꿈시켰던 것이다. 친근한 이미지의 호랑이는 18세기부터 유행한 ‘민화(民畵)’ 속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한다. 소나무 가지에 앉아있는 까치 한 마리가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호랑이를 바라보는 ‘까치 호랑이’ 그림이 대표적이다. 이 그림은 장수를 의미하는 ‘소나무’와 길상(吉祥)을 뜻하는 ‘까치’, 그리고 벽사(闢邪)를 나타내는 ‘호랑이’를 함께 그려 넣어 출세와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밖에도 호랑이는 사찰의 탱화에 산신이나 나한을 보좌하는 역할로 표현되곤 했는데 이 역시도 매우 해학적인 모습으로 그려졌다.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호랑이가 조선후기 구전과 민화 속에서 다소 바보스럽게 표현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섰던 것이다.

1747년 박동보가 그린 나한도(인천시립박물관 소장)
1747년 박동보가 그린 나한도(인천시립박물관 소장)

 

호랑이가 들어간 인천의 지명

오래 전부터 호랑이는 두려움에 떨게 하거나 숭배의 대상이었고, 때로는 해학적인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어 왔다. 그런 이유때문인지 전국적으로 호랑이가 들어간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인천에도 호랑이와 관련된 지명이 세 군데 정도 있다. 그 중 하나가 강화도 서북쪽의 양사면 인화리(寅火里)로 이곳에는 교동도와 연백으로 향하던 배가 출발하던 인화석진(寅火石津)이 있었다. 정조 때인 1783년 강화유수 김노진이 간행한 『강화부지』에 따르면 “남쪽을 향한 바위가 호랑이 모양이어서 인화석진이라 부른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인화리라는 지명이 호랑이 모습을 한 지형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1679년 숙종 임금이 강화도 해안가에 48개의 돈대를 설치할 때 쌓았던 인화돈대가 있었다. 강화도의 서북단 한강과 예성강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바다로 합류하는 초입에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였기에 돈대를 쌓아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19세기말 조선 정부는 도성을 침범하는 근대열강의 철갑선을 방어하기 위해 이곳에 포대를 설치하기도 했다.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 인화돈대 부근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 인화돈대 부근

서구에도 범섬, 즉 호도(虎島)라 불렸던 섬이 있다. 섬의 남쪽을 서구 경서동과 영종도를 잇는 영종대교가 가로지르고 있다. 호도와 물치도(구 작약도) 사이의 바다는 수심이 깊고 조류가 완만하게 흘러 19세기말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미국과 일본의 해군이 전함이 정박하면서 베이스캠프로 삼았던 곳이다. 이 섬 역시 호랑이 모양을 닮아서 ‘범섬’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영종대교 중간에 위치한 범섬(인천광역시 지도포털)
영종대교 중간에 위치한 범섬(인천광역시 지도포털)

남동구 논현동에 호구포(虎口浦), 일명 ‘범아가리’라 불리는 곳도 있다. 오봉산 줄기의 서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언덕으로 관교동까지 흘러들던 도장포 갯골의 초입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언덕은 검고 큰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다 마치 큰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웅크린 모습을 하고 있다하여 범아가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왔다고도 한다. 1879년 조선 정부는 도성으로 잠입하는 외적의 선박을 막기 위해 화도진을 설치하면서 바위 언덕 남쪽 아래에 포대를 쌓았다. 호구포대 또는 논현포대라 불렀던 이 포대는 도장포 갯골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것이다. 당시 화도진에 소속된 여덟 개의 포대 중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포대로 1982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남동구 논현동의 호구포대
남동구 논현동의 호구포대

공교롭게도 호랑이가 들어간 인천의 지명은 모두 전쟁과 관련된 것들이다. 호랑이가 상징하는 용맹함이 지명에 투영된 것일까? 우리 민족에게 호랑이는 두려움의 대상일 때도 있었고, 이웃 아저씨처럼 친근한 존재일 적도 있었다. 근대기 일본인의 무분별한 포획으로 멸종되어 이제는 동물원에나 가야 만나 볼 수 있지만, 우리에게 호랑이는 여전히 용맹의 상징으로,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수호신으로 인식되고 있다. 임인년 새해의 호랑이는 ‘코로나’라는 악귀를 물리쳐주는 용맹한 호랑이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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