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족관 안의 나, 수족관 밖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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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족관 안의 나, 수족관 밖의 나
  • 최원영
  • 승인 2022.01.18 04: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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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영의 책갈피] 제35화

 

 

지난 글에서 한병철 교수님의 ‘피로 사회’에 대한 글을 전해드렸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다시 복기해보면 “규율사회는 광인과 범죄자를 낳고,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라는 것이었죠. 그리고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사색하는 힘을 키워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권력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힘’을 말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은 ‘리더’로 불립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 모두는 리더입니다. 가정에서는 부모이기도 하고, 직장에서는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학창시절을 떠올려 보세요. 어느 선생님이 가르치느냐에 따라 학생들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또한 어느 부모 밑에서 성장했느냐에 따라 아이들의 심성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는 권력자이고, 마찬가지로 부모나 경영자 모두 권력자입니다. 그러므로 최고 권력자들이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빨리 변화되는 길입니다.

사색하는 인간이란 시계추의 양쪽 모두를 헤아릴 줄 아는 인간을 뜻합니다. 한쪽에서는 도저히 보이지 않던 반대쪽 입장을 헤아리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이런 지혜를 갖춘 사람이 좋은 리더입니다.

《관계》(안도현)에서 저자는 지리산에서 시를 쓰는 시인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계곡에서 청년들이 야영하면서 그들이 버들치를 잡아먹는 것이 안타까워서 버들치를 기르기로 했다. 물론 식구들의 반대가 심했다. 수족관에 넣고 자유롭게 다니는 녀석들을 보면서 시인은 행복해했다.

하루는 시인이 수족관에 눈을 바짝 갖다 붙이고 바라보고 있을 때, 한 버들치가 입을 오물거리며 시인에게 말했다.

“이 수족관은 길이가 116cm, 높이가 45, 폭이 25군요.”

시인은 가슴이 아팠다. 버들치라는 이름의 자연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게 결과적으로 자연을 울타리 속에 가둔 꼴이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버들치의 뱃속 공기주머니는 수족관에 길들여질 것이다.

당장 녀석들을 원래 살던 곳에 다시 풀어준다 해도 이들은 물속에서 수족관 크기의 공간에서만 헤엄을 칠지도 모른다. 시인은 길러온 일이 후회됐다. 아니 그동안 길러온 게 아니라 가두어왔다는 죄책감이 든다.

‘내가 너희를 감옥 속에 가두었구나.’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녀석이 말한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갇혀 있는 건 우리뿐만이 아니잖아요.”

“뭐라고?”

“우리가 보기에는 수족관 바깥도 감옥처럼 보이는걸요.”

“그래도 나는 너희보다는 자유로운 몸이야.”

“그러면 가고 싶은 곳을 어디든 갈 수가 있나요?”

“글쎄. 그건 좀.”

“그래요, 사람들은 발길이 닿는 대로 갈 수가 있다고 착각해요. 사람들의 발걸음이 시작되는 곳에서 끝나는 곳까지가 감옥의 내부라는 걸 모르고 있다고요. 가고 싶은 곳을 지금 바로 갈 수가 없다면 그건 감옥 속에 있다는 뜻이지요.”

우리도 수족관보다 조금 넓은 감옥에 갇혀 있다는 버들치의 말에 동의한다면, 이제부터라도 잠시 멈추고 사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무엇에 갇혔는지를 깨닫게 되고, 이 깨달음이 우리를 그 감옥에서 벗어나게 해줄 테니까요.

‘나는 이제까지 무엇에 매달려 살아왔을까?’

‘그 무엇이 나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 스스로 찾았을 때 비로소 버들치인 내가 수족관에서 벗어나 드넓은 계곡에서 유유히 자유와 행복을 만끽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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