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탈북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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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탈북자들
  • 안태엽
  • 승인 2022.02.1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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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엽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소통의 글쓰기 반 회원
탈북민 모자가 숨진채 발견됐던 서울 봉천동 임대아파트(사진 = YTN 캡처)

 

아파트에 요란한 소리가 들려 밖으로 나가 봤더니 사람들이 나무 전지작업을 하고 있었다. 작업자의 말투가 조금 다르게 느껴져 “고향이 어디세요” 물었더니 북한이라고 했다. 그는 살짝 눈치를 보는 듯하다 하던 일을 계속했다. 잠시 쉬는 시간에 음료수 한 잔을 갖다주며 가벼운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 사이 조금 가까워진 느낌이 들어 시간 있을 때 우리 집에서 밥이나 같이 먹자고 말했다.

후에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는 배고픔과 삶의 고달픔을 이겨내고자 자유를 찾아온 탈북자였다. 자유가 무엇이기에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걸고 넘어왔을까. 나는 이들이 남한에 넘어온 이상 한국에 적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돈과 함께 움직이는 세상이다. 그들은 이제 생명의 가치만큼이나 돈의 가치를 중요시 하는 사회, 투기, 투자, 돈벌이, 펀드, 같은 자본의 논리가가 판을 치는 사회 한가운데 들어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생존하기 위해서는 교육이나 시장질서, 사회구성원 조직에 맞도록 자신을 육화해 나가야 한다. 그들이 어떤 인격이나 품격을 지녔든 치열한 생존 경쟁 사회에 맞도록 자신을 새롭게 구조화 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다. 나는 부모 형제를 버리고 목숨을 걸고 넘어온 이들이 자유와 희망에 대한 성급하고도 무조건적인 기대 때문에 치열한 지본주의 사회에서 무수히 넘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지난 2019년 우리 국민들은 한 탈북민 모자가 임대 아파트에서 연고자 없이 숨져있는 것을 수도 검침원이 발견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40대인 어머니는 탈북 후 운전면허를 따는 등 한국 생활에 적응하려 노력한 흔적들이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사망한 지 두 달이 지나서야 주검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미국 CNN 방송이 이를 두고 ‘북한에서 탈출해 서울에서 굶어 죽었다' 라고 보도를 해 충격을 받았다.

북에서 의사였던 사람이 남한에서 노동일을 하기도 한다. 그들의 전문적 지식과 기술은 남한에서 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종종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탈북민을 그저 값이 싼 노동자 정도로만 생각한다. 이탈 주민에 대한 미흡한 정책과 부정적 언론 보도는 이들에 대한 이질감을 느끼게 한 요인이 된 것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들에게 배고픔 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같은 동족으로부터 받는 차별과 편견이 아니었을까. 북한에서는 배신자, 한국에서는 북한 체제의 증언자인 동시에 2등, 3등 국민대접을 받는 탈북자라는 이름표를 가진 것이 그들인 것이다.

한국에 살고 있는 새터민이 약 3만 명 정도이다. 이들은 다시 탈남(脫南) 하거나 목숨 걸고 들어온 한국을 등지고 유럽이나 미국으로 재입국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남북한 어느 곳에서도 인정받지 못해 국제 미아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아직도 그들을 공존의 관계로 바라보지 못할까. “당신이 넘어왔으면 남한에 적응해야 돼” 이렇게만 생각하고 말하는 것일까.

요즘 젊은 세대들은 “이대로 불편함 없이 사는데 왜 통일을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묻는다. “지금도 북한의 도발과 공격이 계속되는데 그런 나라와 어떻게 통일을 할 수 있느냐”고 말한다. 그리고 “통일 비용이 발생하면 내가 왜 그 비용을 져야 하냐”며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잘 알다시피 독일 통일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수십 년의 문화 교류를 통해 소통하면서 한 몸이 되었다.

 베이징 동계 올림픽의 각국 선수들

세계의 어느 곳에서는 지금 또 전쟁의 기운이 감돈다. 그 한편으론 베이징 동계 올림픽이 뜨겁다. 세계 여러나라에서 온 선수들이 메달을 따고 시상대에서 귀여운 팬더 굿즈를 들고 마치 한 자매 한 형제처럼 나란히 웃고 있다. 그 얼굴에서는 “내가 미국인” “내가 중국인”이라는 흑백을 가르는 표정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최선을 다해 경기를 했고 그 기쁨과 그 아쉬움을 함께 나누는 천진한 얼굴들이 예전 우리나라 ‘남남북녀’처럼 아름다울 뿐이다

더불어 사는 사회로 만들어 갈 때만이 분단 체제에서 맞닥뜨릴 한국 사회의 위기와 모순도 극복할 수 있으리라.

예로부터 ‘남남북녀’라는 말이 있다. 남한이 북한과 연애한다고 생각해 보자. 남자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관심을 가지고 알아본다. 하나가 되기 위해는 먼저 서로를 알아야 사귐이 있고 신뢰를 바탕으로 결혼을 한다. 따뜻한 마음으로 소통하고 그들의 상처를 보듬으며 공감할 때 비로소 진정한 통일을 할 수 있 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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