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
상태바
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
  • 공주형
  • 승인 2011.07.19 16:0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성칼럼] 공주형 (미술평론가, 인천대 기초교육원 초빙교수)

도쿄에 있는 일본민예관을 수업 시간에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의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를 설명하던 중이었지요. 한국 미술의 탁월함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는 그는 석굴암 본존불의 아름다움에 대해 "지금 생각만 해도 숨이 가빠진다"고 감탄했고, 광화문은 "저 아름답고, 저 장엄한 문"이라 표현했지요. 그런가 하면 차를 마실 때 쓰는 다완을 보고는 "훌륭하다. 그렇지만 어쩌면 이다지도 평범한 것일까"라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일본 도쿄의 일본 민예관(사진출처 http://www.mingeikan.or.jp)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나고 자란 그와 한국 미술과 남다른 인연은 한 점의 도자기에서 비롯됩니다. 1914년 그가 우연히 보게 된 한국의 도자기는 소박한 생김에 투박한 질감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하얀 바탕에 문양이 푸르다 하여 '청화백자'라 불리는 도자기를 본 후 그는 한국에 갈 결심을 했고, 2년 뒤 1916년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 그리고 해인사를 돌아보는 것으로 실천되었습니다. 그가 한국에서 본 것은 찬란한 한국의 미술품만이 아니었습니다. 강점기 한국의 암울한 현실이기도 했지요.


청화모깎기초화문표주박형병-13.5×10.9cm-18세기(사진출처 http://www.mingeikan.or.jp)

일제 식민 정책의 야만성을 비판하는 그의 글은 자국어인 일본어와 한국어로 일본과 한국의 신문에 나란히 실리기도 했습니다. 일제가 총독부 건물을 세우려고 광화문을 부수려고 하자 그는 "만약 한국이 흥하고 일본이 쇠퇴해서 한국인들이 일본의 오래된 궁궐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서양식 건물을 세우려고 한다면 일본인 입장에서 그 기분이 어떻겠는지"를 글로 묻습니다. 그의 글은 결국 광화문을 부수지 않고 옆으로 이전하도록 일제가 계획을 수정하게 만들었습니다. 한편 그는 한국의 미술품을 전시하기 위한 미술관을 만들기 위해 성악가였던 부인 야나기 가네코(柳兼子, 1892~1984)와 기금 마련 독창회를 한국에서 열기도 합니다. 이렇듯 한국과 한국의 미술에 대해 각별한 정을 품었던 그였지만, 그는 한국의 미를 '슬픔의 미'라고 평가해서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일본민예관은 바로 그가 1936년 설립한 미술관입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 인쇄본이 입구에 걸려 있던 그가 살던 집 인근에 자리한 전시장은 일본식 2층 건물입니다. 1만7,000점에 달하는 일본 민예관의 소장품은 일본의 공예품이 대부분이지만, 한국 것도 3,000점이나 됩니다. 일본민예관에는 처음 문을 연 날부터 지금까지 한국 미술품만을 따로 선보이는 전시장을 운영 중입니다. 그가 한국에서 눈 여겨 보고, 우수함을 인정해서 모아왔던 미술품들이 그곳에 있습니다.


일본민예관에 소장되어 있는 한국 미술품(사진출처 http://www.mingeikan.or.jp)

일본민예관의 한국 미술품은 대부분 조선 시대 것들입니다. 소장품들 중에는 그와 한국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던 청화백자를 비롯한 다양한 도자기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좌우 대칭도 맞지 않고, 도자기 표면도 색이 고르게 입혀지지 않아 얼룩덜룩 하지만 그로 인해 만들어진 생동감과 리듬감이 보는 이를 사로잡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삶 자체가 예술이라 극찬했던 그의 말은 사실입니다. 단지 먹을 갈아 쓰기 위해서 만든 벼루이고, 기름을 따라 쓰는 용도로 제작된 기름 주전자일 뿐인데, 200년 전에 만들어진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모양과 색상이 현대적입니다. 항아리, 병풍, 소반, 벼루, 그림, 불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성격의 미술품들은 한국 미술에 대한 방대한 그의 관심과 함께 탁월한 안목을 확인케 합니다. 만약 이렇게 수준이 일품인 미술품들이 한국에 있다면 분명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겠지요. 미술품 형상과 빛깔들을 수업 시간에 낱낱이 살피며 우리 곁에 두고 볼 수 없는 우리 것에 대한 아쉬움이 깊어졌습니다.

그 날 수업이 끝나고 한 학생이 이메일을 보내왔습니다. '도쿄에 대지진이 발생하는 게 정해진 사실이라고 일본의 기상학자들이 예측하는데, 만약 그것이 현실이 된다면 오늘 수업 시간에 본 일본민예관에 있는 소중한 우리 미술품이 훼손되거나 유실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가득한 메일이었습니다. 남의 나라에 있는 우리 미술품을 가져오는 일은 남의 집에 있는 내 물건을 돌려받는 일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학생이 보낸 이메일을 수업시간에 우리 문제로 공유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나도 학생들도 어두운 낯빛으로 걱정한 것은 일본민예관에 있는 한국의 미술품이었는데, 그 무렵 나쁜 소식은 다른 쪽에서 들려왔습니다.


도쿄 오쿠라호텔의〈이천향교 오층석탑〉

동일본 대지진 여파로 일본 도쿄에 있는 한국의〈이천향교 오층 석탑>이 훼손되었답니다. 정확히 어느 부분이 뒤틀리고, 어느 부분이 떨어져 나갔는지 가림막을 친 채 수리에 들어가 확인조차 불가능합니다. 문제의 석탑이 경기도 이천에서 일본 도쿄로 자리를 옮긴 것도 일제강점기 때입니다. 그림이나 도자기처럼 손에 들고 갈 수 있는 규모가 아닌 돌로 만들어진 오층탑은 일본인 군수업자 오쿠라 가하치로가 1930년대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가져간 것입니다. 일본으로 옮겨진 후〈이천향교 오층 석탑>은 그의 이름을 딴 호텔 뒷마당에 지금까지 놓여 있었습니다.

한국의 석탑이 일본 도쿄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한국의 시민단체가 돌려달라고 요청을 한 게 벌써 두 해 전입니다. 호텔 측은 석탑을 돌려주고 말고는 개인 차원에서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입장을 취해왔습니다. 그리고 되돌려주기에 앞서 한국과 일본 사이 합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지요. 일본에 있는 한국의 석탑을 두고 이런 말들이 오가던 중에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인지라 한층 마음이 무겁습니다.

축 처진 마음을 그림자처럼 끌고 다니며 그 즈음 나는 '내게도 힘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을 해하고 굴복시키는 위협적인 수단이 아니라,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으로서 힘 말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나는곰이다 2014-11-28 22:10:50
야나기무네요시와 아사카와 형제가 우리의 것을 지켜주려고 그때 조선민족미술관을 만들어 많은 민예품을 보관해 두었으나 그때 그 민예품 3000여점 대부분이 아직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잠들고 있다는 사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나마 일본민예관에 있는 것은 보기라도 하지만 우리 박물관 수장고에 잠든 작품은 도록하나도 없어서 무엇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