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교의 항일운동을 쫓다 - 신흥동 정미소 철길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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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의 항일운동을 쫓다 - 신흥동 정미소 철길을 찾다
  • 배성수
  • 승인 2022.03.15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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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수가 바라보는 인천 문화유산](12)
전시장에서 못 다한 이야기① - 인천시립박물관 갤러리전시 《화교들의 항일운동》전 
- 배성수 / 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매체 특성 상 박물관 전시는 유물과 사진, 그리고 최소한의 텍스트로 구성된다. 텍스트는 짧을수록 좋은 법이다. 자세한 설명으로 최대한 많은 내용을 전달하려는 기획자의 의도와 달리 과다한 정보는 도리어 전시 집중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 시립박물관에서 개최되고 있는 <화교들의 항일운동> 전시도 텍스트가 많지 않다보니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하지 못했다. 이 기회에 지면을 통해 전시장에서 못 다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이야기 하나. 전시를 풀어내는 방식

전시 포스터
전시 포스터

전시 제목은 <화교들의 항일운동-1943년 인천, 일동회>다. 지난겨울 화교학교 부이사장 주희풍 선생에게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일동회 수사기록’을 받아보았을 때, 전시 주제로 ‘딱’이다 싶었다. 가뜩이나 독립운동이나 항일운동 관련 자료가 없는 인천에서, 더구나 그동안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던 화교들의 항일운동은 기획자에게 매력적인 소재였다. 문제는 일동회가 일본 경찰에 일망타진 당한 뒤 작성된 수사기록이어서 첨부된 현장검증 사진에 눈길이 갔다는 점이다.

근대기 인천을 촬영한 사진은 적잖이 남아있지만, 그것은 대부분 개항장이라는 공간 그리고 번듯한 도시 풍경, 월미도 등의 관광지에 국한된다. 반면, 자료에 첨부된 사진은 일동회 회원들의 동선을 따라 촬영된 것이라서 개항장은 물론 숭의동과 학익동 일대의 당시 모습이 날 것 그대로 담겨있었다. 일동회의 항일운동에 초점을 맞춰 전시를 풀어내자니 이 사진들을 상당수 버려야 했고, 사진을 중심으로 전시하자니 일동회에 대한 내용을 줄여야 했다.

현수막으로 분리시킨 전시장 공간
현수막으로 분리시킨 전시장 공간

고민 끝에 생각해 낸 방법이 전시장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앞에서는 1943년 당시의 인천의 모습을 보여주고, 뒤에서 일동회에 대한 내용을 전시하는 것이었다. 모의장소로 사용되었던 복성잔(復成棧) 건물을 인쇄한 현수막을 늘어뜨려 1부 ‘1943년 인천’과 2부 ‘일동회’로 전시공간을 구분했다.

1부는 일동회의 방화지점을 중심으로 인천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전시했고, 2부의 전시내용은 수사기록을 바탕으로 설립과 활동, 체포에 이르기까지 일동회에 집중시켰다. 하나의 공간에서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전시가 이루어진 까닭이다.

 

이야기 둘. 학익동 솜 공장, 오타후쿠와타[御多福綿]

1941년 2월 4일 새벽, 일동회는 학익동 미추홀경찰서 자리에 있던 오타후쿠와타[御多福綿] 제2공장에 불을 질렀다. 오타후쿠와타 주식회사는 방적공업의 재료가 되는 원면(原綿; 솜)과 이불솜 제조 공장으로 1929년 일본 후쿠오카에서 설립되었다. 설립 초기부터 조선과 만주로의 확장을 모색하여 인천 숭의동에 4천 평의 공장 부지를 마련하고 1935년 4월 17일 기공식을 거행했다. 공사가 시작된 지 4개월이 조금 지난 9월 1일 공장 가동에 들어갔는데 당시 노동자는 남녀 합쳐 2,300명, 원면 생산량은 연간 100만관(貫) 이상이었다.

여기서 생산된 원면은 주로 만석동 동양방적 인천공장과 서울의 경성방직, 종연방적 등에 납품했던 것으로 보인다. 개업 이듬해 공장건물이 전소될 정도로 큰 화재가 발생했지만, 중일전쟁이 시작되어 군용 위생 솜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1940년경 학익동 매립지에 약 4천 평의 공장 부지를 마련하고 제2공장을 건설했다. 이곳에서는 주로 탈지면이라 부르던 위생용 솜을 생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문헌에서만 간간이 확인할 수 있었던 학익동 오타후쿠 솜공장의 구석구석을 촬영한 사진을 발견한 것도 이번 전시의 성과 중 하나다.

1940년 오타후쿠와타[御多福綿] 학익동 공장 전경
1940년 오타후쿠와타[御多福綿] 학익동 공장 전경

광복 후 적산기업으로 불하되어 다복면업(多福綿業)이라는 이름으로 운영을 이어갔지만, 1960년대 초 폐업한 것으로 보인다. 폐업 후 학익동 공장은 한양화학의 인천창고로 사용되다가 2006년 부지 남쪽으로 미추홀경찰서가 신축되었다. 북쪽의 공장과 사무실 건물은 최근까지 가구 공장으로 활용되었지만, 2016년 철거되어 지금은 식자재마트가 들어서 있다. 철거되기 전 정문 우측의 사무실 건물과 벽돌 창고는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다. 우리의 무관심 속에 또 하나의 근대건축물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1943년 오타후쿠 솜 공장 사무실(X표)과 창고
1943년 오타후쿠 솜 공장 사무실(X표)과 창고
오타후쿠 솜공장 사무실과 창고(2011년 6월) - 다음지도 로드뷰
오타후쿠 솜공장 사무실과 창고(2011년 6월) - 다음지도 로드뷰

 

이야기 셋. 신흥동 스기노[杉野] 정미소와 그 앞을 지나던 철길

일동회는 1941년 11월 28일 밤 신흥동 카와무라[河村] 정미소에 불을 지른데 이어 이듬해 4월 13일 새벽에는 카쿠마루[角丸] 정미소에 사제 폭탄을 투척했다. 신흥동은 1919년 가토정미소(지금 동인천 이마트 자리)와 오쿠다 정미소가 들어선 이래 스기노, 카와무라, 리키타케[力武], 카쿠마루 정미소가 차례로 설립되어 1970년대까지 인천의 정미업을 주도했던 곳이었다. 재작년 봄 오쿠다 정미소라고 알려진 벽돌 창고가 철거되어 지역 사회에 논란이 되었던 곳도 여기였다.

그런데 전시를 준비하면서 철거된 벽돌창고가 오쿠다 정미소가 아니라 스기노 정미소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스기노 정미소는 오사카 출신의 미곡상 스기노 에이하치[杉野營八]가 1927년 8월 신흥동에 설립한 정미소로 1932년 당시 현미 300섬과 백미 250섬을 도정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도면에 따르면 정미소는 남북 방향의 장방형 부지 위에 정미공장과 착유(搾油)공장, 그리고 사무실과 창고로 이루어져 있었다. 착유공장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도정 외에 곡식에서 기름을 짜는 작업도 함께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좌) 1935년 스기노정미소 설계도. (우) 1947년 항공사진 속 스기노정미소.
1943년 일동회 수사기록에 첨부된 지도
1943년 일동회 수사기록에 첨부된 지도

2020년 철거된 벽돌창고가 스기노 정미소라는 사실은 수사기록에 첨부된 도면의 건물배치가 1947년 촬영된 항공사진의 그것과 일치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도면을 보면 리키타케 정미소(지금 경남 아너스빌 아파트)의 서쪽 블록에 카와무라 정미소와 스기노 정미소가 담을 맞대고 위치하고 있다. 아직 굴뚝을 비롯하여 일부 건물이 남아있는 카와무라 정미소의 서쪽 부지, 즉 재작년 철거된 벽돌창고가 스기노 정미소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신흥동 정미소 공장지대
신흥동 정미소 공장지대

일동회 수사기록을 통해 또 하나 새롭게 확인한 것은 신흥동 정미소 남쪽으로 지나는 철길이다. 알다시피 일제강점기 인천은 대표적인 미곡 수출항이었고, 특히 경기도에서 생산되는 쌀이 집산되었던 곳이다. 이를 도정하기 위해 설립된 정미소들이 신흥동에 들어선 이유, 경기 내륙지역의 미곡을 운반했던 수인선의 종착역을 정미소 인근에 두었던 것은 모두 인천항에서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동안 인천항에서 이곳으로 이어지는 철길이 표시된 지도를 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철길이 촬영된 사진이나 철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지도에 표시된 철길은 예정선일뿐 실제로 건설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뜻하지 않게 발견한 사진을 통해 왕복 6차선의 대로가 되어버린 이 길의 일부가 철길이었음을 확인했다.

당시 일동회 회원들이 카와무라 정미소 남쪽으로 침입해서 불을 질렀고, 그 동선을 따라 현장 검증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건물 앞을 지나던 철길이 사진에 담겼던 것이다. 사진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철길은 복선으로 놓여 있었고 동쪽으로 리키타케 정미소 앞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곳을 오가던 미곡 운반 열차는 철길을 따라 각 정미소 앞을 지나며 쌀을 내렸고, 다시 도정을 마친 백미를 싣고 인천항으로 운반했을 것이다.

1943년 신흥동 정미소 앞 철길
1943년 신흥동 정미소 앞 철길
지금 신흥동 정미소 앞 인중로

 

전시장에서 풀어내지 못한 이야기들을 한 번에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지면이 부족한 것을 보니 이번 전시에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특히 많았나 보다. 이번에 못 다한 이야기는 다음 달로 미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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