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닫힌 목공소를 밝히는 오월 오동꽃
상태바
문 닫힌 목공소를 밝히는 오월 오동꽃
  • 이세기
  • 승인 2022.05.13 08: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세기의 손바닥소설 - 북창서굴]
(6) 목공소
목공소

목공소

지금 내가 사는 집 근처에 목공소가 하나 있다. 창호만 전문적으로 만드는 목공소다. 주택가라서 맞춤 문짝 주문이 그나마 있었던 모양이었다. 무늬목 문을 주로 했으나 값나가는 원목 문도 제작했다. 집들이 낡고 허름해지자 맞춤 문짝 주문이 없어 근근이 자잘한 목공 일을 하면서 겨우 문을 열어 놓았었다. 근래에는 아파트 일색에다 신축 집들이 기성 문을 사용하게 되자 더는 버틸 재간이 없었는지 목공소를 닫아 버렸다. 담장에 오월 오동꽃만이 씁쓸하게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한때 나 역시 목수로 밥을 먹고 산 적이 있었다. 집을 짓고 상량보를 올리는 대목도, 재주 있는 정치한 소목도 아니었지만, 굳이 따지자면 소목 언저리쯤 되어 가구를 만들어 팔았다. 가구 목수 솜씨는 서랍장을 만들어 보면 안다. 서랍 만드는 걸 보면 기술이 어느 정도 되는지 대략 알 수 있다. 여기에다 대패를 다루거나 대팻날 가는 것을 보면 한눈에 판가름이 난다. 대팻날이 서는 것을 보면 직방으로 기술 정도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목수는 연장을 목숨처럼 여긴다. 제 연장을 빌려주는 법은 애당초 없다. 목수에게 톱과 대패는 분신이나 다름없다. 톱의 종류도 다양하여 나뭇결 방향으로 베는 켜는 톱과 나무를 수직 방향으로 베는 자르는 톱과 연귀나 사개의 틈을 맞추는 도메 넣는 톱 등을 갖춰야 한다. 톱에 따라 다양한 쓰임도 파악할 줄 알아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줄칼로 톱날을 세울 줄 알아야 한다. 목공용 톱은 ‘도스끼’라고 부르는 등대기톱을 주로 쓴다. 자르거나 켜고 장부따기와 연귀나 사개맞춤을 할 때 많이 사용한다. 손에 맞는 톱은 톱날이 닳아 새롭게 날을 세우다 보면 등이 줄어든다. 손에 맞게 스스로 연장을 다룰 줄 알아야 하고 손때가 묻어 익숙해야지 제 연장이 된다.

대패만 하더라도 나중에는 몸통이 얇아질 때까지 쓰게 되는데, 솜씨 좋은 목수는 대패만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대패를 고를 때도 몸통만큼은 곧은 결인 마사 무늬를 쓴다. 마사는 무늬가 곧은 나무의 중심부인 심재 부분을 최고로 친다. 비틀림이나 휨이 없어서 좋은 재목으로 친다.

젊은 시절 풋내기 목수로 일을 막 배울 때 목공을 가르쳐 주던 목수가 두 명 있었다. 그중 재길이라는 형은 꼭 연장을 가져오라 할 때는 일본식 명칭을 썼다.

나가다이 가져와.

요꼬, 다대가 얼마야?

사시가네 가져와.

눈치껏 가져가거나 잠시라도 망설이면 여지없이 불호령이 떨어졌다.

뭐해, 간다 가져와!

그럴 때마다 나는 나가다이는 긴대패, 간다는 대패, 요꼬는 가로, 다대는 세로, ㄱ직각자는 사시가네로 하면 되지, 하고 혼잣말로 응수했었다. 속으로 애간장을 끓이며 대꾸를 해보는 것이 유일한 정신승리 복수였던 것이다. 정신없이 일이 돌아갈 때에는 맨정신으로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육체가 힘든 것이 아니라 정신이 힘들었다. 배우고자 했으나 요령부득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을 배우기 시작하는 초짜나 겪을 법한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기술이라는 것이 제 것처럼 배우기 위해서는 재길이 형 말마따나 망치로 맞거나 쌍욕을 먹는 것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 신출내기 딱지를 떼고 몇 년이 지나고서야 겨우 길들인 짐승이 되어 귀가 열리고 손이 순해졌다.

재길이 형은 일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중식 시간이나, 일 중간 휴식 시간쯤 되면 대패를 가져오라 하여 숫돌에 날을 가는 법과 어미 날과 뒷날의 평을 잡는 법, 대패 몸통 손질법, 일본식 숫자 세는 법 등을 알려주거나 끌을 잡는 법과 끌의 용도에 따라 다루는 방법을 세세하게 알려주곤 했다. 목공 전수는 핑계고 그게 다 자신의 절절한 늦은 연애 뒷담화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목공 일이라는 것이 반은 눈썰미로 배우게 된다. 대패질을 직접 해보고 대팻날을 시퍼렇게 세워 봐야 대패를 알 수 있다. 서걱거리는 숫돌과 날이 부딪치며 갈리는 소리는 필시 힘의 강약이 중요하다. 잡은 대팻날에 힘을 빼고 밀 때와 당길 때의 힘 조절에 능해야 한다. 호흡을 멈추고 뱉는 것이 일정해야지만 좌우 치우침 없이 비로소 어미 날과 뒷날의 평이 서고 잡혔다. 이렇게 세운 대팻날은 서릿발 칼날진 절정의 순간처럼 서늘하고 시퍼렇게 날이 선다. 재길이 형에게 온갖 핀잔을 들으며 나는 제법 대패 날 가는 법과, 끌 다루는 법을 익힐 수 있었다. 톱날이 무뎌지면 죄칼로 날을 세우는 일까지 정성을 들여서 연장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 이렇게 애지중지 길들인 연장은 소중한 몸의 일부가 되었다. 연장을 잘 다루어야지만 비로소 흑단이나 장미목 같은 값나가는 나무를 만질 수 있었다.

오동꽃

다른 한 명은 춘양목으로 유명한 첩첩산중 봉화 출신의 애기목수였다. 봉화 형은 열두어 살부터 절간의 대목수를 따라다니며 잔심부름을 하다 인천으로 상경했다. 먼 육촌이 운영하는 목공소에서 창호를 배우면서 그 바닥에서 잔뼈가 굵었다. 마흔에 겨우 시다바리 노릇이나 하던 보조 역할에서 벗어나 목공소 일을 거의 도맡아 했다. 태어난 지방명을 따서 봉화 형으로 불린 창호 목수로 칼맞춤이 별명이었다. 창살문이나 원목 맞춤 문의 요꼬와 다대를 그야말로 빈틈없이 칼춤 맞추듯 했다. 삼 년에서 칠 년 묵은 건송으로 만든 연귀와 사개가 칼같이 아귀가 맞은 원목 문은 닫는 묘미가 특별났다. 살짝 문을 밀면 스스로 움직여 ‘딸깍’하고 결코 가볍지 않은 묵직한 소리내며 문이 닫혔다. 봉화 형은 문을 설치하고 걸핏하면 한 마디 추임새처럼 내뱉는 말이 있었다.

눈이 자여!

맞춤 무늬목 문도 만들곤 했는데 겉과 다르게 내부는 촘촘하게 설계된 정교한 도면 같았다. 문의 규격은 190×98로 밑에서 90센티 위에 손잡이 위치가 잡히면 문짝의 위아래가 결정된다. 문짝은 아래쪽이 무거워야 잘 닫힌다. 덧목을 더해 무게 균형을 잡아 준다. 다대와 요꼬는 반드시 엇 톱질을 해야 휨이 방지된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구조물이 하나의 문짝에도 촘촘하게 설계도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다대나 요꼬를 성성하게 대면 문은 그만큼 헐거워진다. 거기에 어떤 재질의 나무를 쓰느냐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일반 사람들은 왜 문짝 값이 다 다르냐고 하지만, 품이 다르고 나무가 다르기 때문이다. 문 안이 눈에 보이는 곳도 아닌데다 좋은 문은 나무의 재질과 건조 상태가 달라서 일반인이 판별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나무는 시간이 흐르면 자신을 드러낸다. 숙성되지 않는 나무는 뒤틀리고 휜다. 당장은 눈속임을 할 수 있을지언정 시간이 지나면 야바위가 드러나게 된다. 여기에 오크, 월넛, 티크, 메이플, 흑단 등 원목 무늬목을 눈썰미로 익히는 것도 나무 가짓수만큼 많다. 맞춤 문짝을 만들기 위해 원목 무늬목을 합판에 붙이다 보면 주문하는 것이 있다.

이다메 맞춰!

무늬목의 무늬를 맞춰서 붙이는 것을 ‘이다메’라고 하는데 일이 바쁠 때는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다.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무늬목은 접착제로 붙였다가 무늬가 맞지 않아 다시 떼었다가 붙이게 되면 엄한 무늬목만 결딴나게 된다. 거기에 무늬목을 붙이기 위해 다리미질은 얼마나 고역이었던가. 무늬목이 탈 정도로 다리미질을 하노라면 이마에 땀이 맺히고 온몸에는 무늬목 타는 연기 냄새가 뱄다. 손과 공력이 많이 가는 무늬목 작업은 이만저만 감사나운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완성된 문짝을 보노라면 기분이 괜히 우쭐해졌다.

봉화 형은 육촌으로부터 창호 목공소 일을 물려받았을 때 나무 광을 함께 물려받았다. 삼 년 이상 묵힌 건송을 비롯하여 각종 재목을 보관하는 자재 창고였다. 운 좋으면 시샘하여 흉보가 난다고 했던가. 그만 사달이 났다. 자재 광이 불이 나는 바람에 끝내 독립도 못 하고 코뚜레 낀 신세가 되어 매인 몸이 되었다.

지금이야 기계로 찍은 기성 문이 잘 나오는 터라 맞춤 문은 설 자리조차 없다. 대팻날을 세우는 법과 톱을 손질하고, 무늬목 붙이는 법을 가르쳐 주는 목수도,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어서 시집갈 때 농을 만들어 보내겠다는 목수의 옛 맹세도 이젠 모두 다 군짓이 되었다.

자고로 목수는 자투리를 귀하게 여긴다. 나무는 쪼가리조차 버릴 것이 없다. 쓸모 없음이 쓸모 있음이다. 도원동과 숭의동에 걸쳐있는 참외전로 길가 언덕배기에 줄줄이 있었던 목공소마다 무늬목을 붙이기 위해 다리미질로 뿌연 연기를 내뿜던 풍경도 이젠 사라졌다. 장부를 따고 사개를 맞추고 난로 위에 끊는 보리차로 허기를 때우고, 손마디에 인이 박히도록 다리미질을 하며 밑도 끝도 없이 하루에 이백여 짝의 문을 만들던 일도 엊그제 같다.

내 머릿속도 이젠 희미해져 세치각목인 산승각, 대략 손가락 마디로 1인치를 삼는 2인치 곱하기 4인치 각목인 투바이, 합판의 두께를 부르는 니부합판, 크기를 부르는 삼육, 사팔이니 온갖 숫자와 톱줄을 세우고 대패와 끌날을 세우는 법도 잊혀지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나 자신을 포함해 확신할 수 있는 모든 것도 사라지리라. 문짝 하나 값도 안 되는 품을 받고 소금 땀을 씻으며 하늘을 바라보던 것만큼은 지금껏 시퍼렇게 대팻날을 세웠던 저녁과 함께 남아 고독하게 내 머릿속에 망치로 못을 두들겨 박듯 어두컴컴하게 박혀있다.

문을 보면 세 손가락이 잘린 손으로 대패질을 하던 재길이 형과 걸핏하면 오고 갈 데도 없는 놈을 먹여주었더니 불만만 커졌다고 핀잔을 듣던 애기목수 봉화 형, 목재공장에서 해고되어 갈 데 없었던 내 절망의 그림자도 그네들과 함께 홀연 어둑하고 환하게 열렸다 사라지다 다시 가뭇하게 살아온다.

그게 다 문이 닫힌 목공소 곁을 밝히고 있는 오월 오동꽃 때문이 아니었을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