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이병기 기자
'숲 사이로 보이는 달이 유난히 밝은 동네'란 뜻의 중구 송월동(松月洞). 그러나 이런 낭만적인 지명과는 달리 인천에서도 아주 낙후된 곳으로 꼽히던 송월동이 중구의 신 주거 중심지로의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동인천동주민센터에서 인일여고 방면으로 걸어가다 보면 경인선 철길이 나온다. 이 철길을 따라 인천역 전까지 이어지는 지역이 송월동이다. 전동 송월초등학교를 경계로 자유공원, 북성동과 맞닿아 있는 송월동은 0.22㎢의 작은 면적에 2633세대 6600여명이 거주하는 주거 밀집지역이다. 법정동으로는 송월동 1~3가로 이루어져 있다.
고일 선생이 1955년 발행한 '인천석금(仁川昔今)'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갑진년 왜병이 전환국 자리 근처에 주둔하였는데, 이 때 이곳 주민들을 강제로 철거시켜서 송현동 산 언덕에 새로 주거를 정해 주었다고 한다"고 송월동의 유래가 나온다.
개항 당시 송월동 1가가 한국인 거주지였던 반면, 미·영·청·독·일 5개국의 공동 조계였던 송월동 2, 3가는 외국인 거주지였다. 아직도 이 주변에는 일본인들이 살던 기와집이 남아 예전 모습을 전해준다.
철길을 따라 송월동 1가 2번지 사잇길로 들어서면 양쪽으로 길게 다세대 주택이 늘어서 있다. 3층에서부터 5층이 넘는 주택 사이로 길가에 주차된 차량들은 전형적인 주택가 풍경을 보여준다. 건물 상태도 비교적 양호하다.
송월아파트, 주민 갈등 딛고 주택재개발 추진
송월아파트
약 300m 안쪽으로 들어가면 왼편에 송월아파트가 보인다. 곳곳에 벗겨진 페인트칠과 구식으로 지어진 5층 건물은 한 눈에도 무척 낡아 보인다. 현재 340세대의 주민이 살고 있는 송월아파트는 건축된 지 30년이 지나 하루 빨리 정비를 요하고 있다.
이곳은 지난 2006년 인천시의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기본계획 수립으로 주택재개발 사업 추진이 가능한 지역이다. 그러나 시작 당시 추진위원회 구성 과정에서 발생한 주민 갈등으로 법적 소송까지 이어지는 등 3년 이상의 세월을 헛되이 소비했다.
다행히 이웃간 불화를 극복하고 작년 8월 추진위원회 승인 이후 시의 구역지정 확정을 기다리고 있다. 더불어 주변 송월시장과 단독주택 지역까지 사업지구에 포함돼 개발이 함께 진행될 예정이다. 하지만 구역지정 확정 후에도 조합 설립, 사업시행인가, 이주·철거 등 많은 절차가 남아 있어 최소 4~5년 이후에나 변화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송월아파트와 처음과 끝을 함께한 송광원 할아버지와 김대남 할머니
송월아파트 앞에서 부동산을 운영하는 송광원(77) 할아버지와 김대남(76) 할머니의 경우 고향인 충청도를 떠나 송월동으로 온 지 48년이 지났다. 30여년 전 송월아파트가 처음 분양할 때 입주한 송씨 부부는 이곳과 적지 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송월아파트를 지은 사람과 인연이 있어 분양을 내가 했지. 지금은 재개발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어. 내가 아파트를 처음 분양했는데 철거를 시도하고 있네. 예전에는 동네 인심도 참 좋았어. 아파트 이웃들이랑 함께 어울리기도 하고. 대문을 열어 놔도 도둑이 안 들어왔으니까."
"처음엔 이 아파트가 최고였지. 맨션이었어 맨션. 기름보일러도 나오고."
송 할아버지에 이어 김 할머니가 예전 그 시절을 회상했다.
송 할아버지는 "이곳에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서면 월미도와 하인천까지 두루 보여 전망도 좋고, 인근에 공원도 있어 살기 좋은 동네로 바뀔 것"이라고 기대했다.
겉보기에는 무척 낡아 보였지만 단지 안으로 들어서니 세워놓은 차들과 입구에 있는 어린이용 자전거에서 사람들의 흔적이 보인다. 비록 겨울철을 맞아 앙상해 보이는 나무들도 봄과 여름이 되면 짙은 녹음을 기대하게 하니,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정겨움도 느껴진다.
송월동의 역사, 우물-애경사-송월시장
예전 송월시장 입구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나간 지금의 송월시장
아파트에서 수협 쪽으로 나오면 맞은편에 송월시장이 보인다. 이곳은 일제시대부터 가축시장이 세워져 일명 '돼지장터'라고도 불렸다. 중구의 대표적 재래시장 중 하나로 이어오던 송월시장이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상인들이 떠나고 소수만이 남아 있다. 골목마다 사람들의 흥정 소리로 북적거렸을 시장 모습은 황량하다못해 을씨년스러움까지 느껴진다.
이순자(65, 가명)씨는 이곳에서 40년 째 생선 장사를 했다. 앞집 방앗간을 제외하고는 주변 모든 상인들이 자리를 떠났지만, 아직도 묵묵히 생선을 손질하고 있다. "왜 아직 떠나지 않았나"라는 물음에는 "다른 것 하기도 그렇고…."라고 대답한다. 표정 없는 얼굴로 생선을 손질하는 모습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려온다.
송월시장이 송월아파트와 함께 재개발 사업에 포함됐지만, 시장 상인들의 마음은 편치 않다. 기존 송월시장은 인천시가 소유한 토지 위에 무허가건물로 운영돼 왔다. 이에 시는 재개발을 위해 시장 상인들에게 토지를 불하해줬지만, 시장 부지 전체가 한 필지로 되어 있어 법적으로 진행될 경우 분양권을 한 사람에게만 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인천시나 중구에서 시장 상인들을 위한 별도의 조례 제정이 없을 경우 시장 상인들은 분양권을 받지 못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일부 주민들의 형평성에 대한 문제도 제기된다. 27평에 거주하는 송월아파트 주민과 2~3평의 시장 상인들이 똑같이 분양권을 받는 것은 옳지 않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추진위원회는 가급적 상인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방침이지만, 쉽지 않을 전망이다.
기상대길에서 바라본 송월동 전경. 저 멀리 송월아파트가 보인다.
개항의 역사가 깊은 중구에서 특이하게도 송월시장을 재외하면 오래된 건물이나 특징을 찾아볼 수 없는 지역이 송월동이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몇 가지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인천의 향토 역사학자인 조우성 선생은 "송월동은 어른들 말씀을 들어보면 개항기에 커다란 우물이 있어 선원들에게 식수를 팔았다고 한다"며 "또 일제시대에 애경사라는 비누회사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근무하던 분이 애경유지 장 회장의 남편이었다"고 말했다.
조우성 선생은 "그 양반이 광복 이후 회사를 인수해 애경비누를 만들기 시작했고, 빨래·세수비누를 만들어 히트를 쳤다"며 "인천에서 비누를 만들어 서울까지 트럭에 싣고 가다 보니 효율성이 낮아 아예 공장을 서울로 이전해 현재 애경그룹의 모태가 됐다"고 설명했다.
부두 노동자들의 쉼터
이강석 기상대슈퍼 대표
송월아파트 건너편의 송월동 1가 10번지 일대 역시 재개발 사업이 추진중이다. 이곳은 송월아파트보다 1년 정도 재개발 사업 진행이 앞서 있지만, 아직까지 시공사를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언덕배기에 위치한 이곳은 다른 데에 비해 사업 수익성이 낮은 것으로 비친다.
송월동 1가 10번지 일대는 유난히도 골목길과 기와집이 많다. 간간히 신식 건물도 보이지만, 대부분이 골목 사이 다닥다닥 붙은 구식 주택이다. 그나마 큰 길이라고 할 수 있는 주택가 골목은 차 두대가 지나가기도 버거워 보이고, 11번가 일대 언덕길은 사람 두명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다. 미로처럼 나 있는 골목길은 마음까지 어지럽게 한다.
기상대길을 따라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면 기상대슈퍼가 나온다. 이강석(72) 기상대 슈퍼 대표는 이곳에서 54년을 살아온 토박이다. 통장 20년,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 10년 활동으로 동네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이 대표는 "송월동은 배가 인천역으로 들어왔던 시절 부두 노동자들이 밀집해 거주하던 동네로 어렵게 산 사람들이 많았다"며 "지금도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떠나고 노인들이 주로 있지만, 중구 내에서는 인구가 많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자유공원 산책로에서 솔밭1길로 내려가는 길에는 송월교회가 있다. 주변의 낮고 오래된 건물들과는 달리 웅장한 교회가 길 양 옆에 우뚝 세워져 있어 다소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 아래편에는 천주교 섭리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섭리 어린이집'이 길가 오른쪽에 보이고, 간간히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살았다던 가옥들이 눈에 띈다.
인천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낙후됐다고 말할 수 있는 송월동. 원주민들을 고려한 주택재개발로 인천에서 손꼽히는 살기 좋은 동네가 되기를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