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남의 소박한 포부 - 선조의 묘를 돌보며 주경야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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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남의 소박한 포부 - 선조의 묘를 돌보며 주경야독
  • 구지현
  • 승인 2022.07.1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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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에서 만나는 소남 윤동규]
(3) 소남이 중경산으로 간 이유
성호학파의 근간을 마련한 인천의 대표적인 실학자 소남 윤동규. 그의 종택에는 생전에 스승 성호 및 다른 제자들과 주고받은 서간 천여 통이 전해내려옵니다. 학문 토론에서부터 사적인 감정 교류까지 성호학파의 다양한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는 이 서간들을 토대로 2022년 소남 기획을 시작합니다. 선문대 국문과 구지현 교수가 집필합니다.

 

1742년 8월 15일 소남이 성호에게 보낸 편지
1742년 8월 15일 소남이 성호에게 보낸 편지

전염병은 오랜 세월 인류와 함께 해왔다. “여역(癘疫)”, “온역(溫疫)”, “염병(染病)” 등 전염병을 지칭하는 다양한 명칭이 역사서에 등장한다. 삼국유사의 설화에도 전염병이 등장한다. 처용의 아내를 범했다는 역신의 “역” 자가 바로 역병을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시대의 기록을 살펴보면 계절별로는 봄, 여름이 가장 많이 발생하고 가을이 가장 적게 발생하였다. 또 지역별로는 경기도가 월등히 많았고, 100년씩 시기별로 나누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포함된 시기인 1592년부터 1691년이 가장 많고 1692년부터 1791년이 그 다음이다.

소남이 살았던 시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1742년 전염병이 유행하였다가 가을이 되면서 조금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오랜 시간 스승을 뵙지 못하던 소남은 뜻하지 않게 성호의 편지를 받고 추석인 8월 15일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 제가 성대한 염려를 입어 스스로 보전하였습니다. 이웃의 전염병 역시 저절로 침식되어 조금은 여유 있게 노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만, 흉년이라 죽음으로 모는 상황을 면하지 못할까 걱정스러울 뿐입니다. 스스로 살 계책이 없어 매우 고민이 되니 어쩌겠습니까? 선영 근처에 터전을 잡았으니 작은 집을 지어서 이곳에서 노래도 하고 곡도 하면서 아침에 나무하고 저녁에 독서를 할까 합니다. 뒤에는 언덕과 송추의 그윽함이 있고 앞으로는 관악산과 수리산의 빼어남이 펼쳐져 발과 눈이 닿는 곳마다 아름다운 정취가 있을 것입니다. 흉년이라 일자리가 절박하니 공사가 쉽게 이루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산이름이 중경이라 거소의 이름을 “重慶”이라 하고 선영이 있는 곳이니 감히 방의 이름을 “敬止”라 할까 합니다. 훗날 집이 완성되면 마땅히 절하고 가르침을 청하겠습니다.… (종택 소장 서간 “壬戌八月十五日 侍生尹東奎 再拜上”)

 

이 해는 인천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역병이 돌아서 서울 근교까지 10만에 이르는 사람이 사망하였다. 전염병은 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해의 농사도 망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 앓거나 죽어갔기 때문이다. 가을 들어 병세가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농번기를 놓쳐버렸으니 먹고살 일이 문제가 된 것이었다. 소남은 스승의 걱정에 힘입어 잘 넘겼으나 생계가 어려운 사정을 스스럼없이 성호에게 털어놓는다.

소남은 생계 때문에 거처를 옮기기로 작정하였다. 소남이 인천 도리산 주변에 땅을 산 문서가 남았는데 이는 1737년의 일이다. 소남은 벌써부터 땅을 조금씩 넓혀 선산 일대에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예 거처를 옮겨 집을 짓고 정착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이때가 되어서였다.

위 편지를 보면 소남의 기대가 보인다. 선조의 무덤이 있는 중경산 아래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면서 독서를 하겠다는 주경야독의 소박한 포부이다. 더불어 조상의 묘를 돌보는 효를 실천하겠다는 의지도 보인다. 선산의 이름을 따와 집 이름을 짓겠다고 했으니 소남이 거처하는 집은 중경산의 이름을 딴 '중경재(重慶齋)' 정도가 될 것이다.

또 방의 이름을 '경지(敬止)'라 하고 싶다고 하였다. 이 명칭은 『시경』 소반 시의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반드시 공경해야 한다.[維桑與梓 必恭敬止]'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뽕나무는 양잠에 쓰이는 뽕잎을 생산하는 나무이고, 가래나무는 가공이 쉽기 때문에 여러 가지 도구를 만드는 데 쓰는 재목이다. 옛날 집 주변에 뽕나무와 가래나무를 심은 것은 훗날 자손들이 잘 입고 잘 쓰게 하려던 것이다. 그러니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자식으로서 집 주변에 울창하게 자란 뽕나무 가래나무를 보면서 부모님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상이 남겨준 땅에 거처를 정하고 부모의 은덕을 기리려는 소남의 방 이름은 '경지당'이 되었을 것이다.

과연 소남의 소원은 이루어졌을까? 같은 해 10월 소남은 성호에게 편지를 보냈다.

 

   동규가 두 번 절합니다. 중경산 새 거처는 수리산의 풍광이 가까이 있어 달빛을 띠고 창에 어리면 아득하고 희미합니다만 우러러 봄기운처럼 만물을 따습게 하고 산처럼 우뚝하게 선 기상을 바라보면 덕을 사모하는 마음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간절하여집니다. 일상사에 얽매어 찾아뵈올 길이 없으니 늘상 서글프기만 합니다.(尹東奎, 「上星湖先生書 壬戌十月」)  

 

불과 두 달도 안되어서 소남은 중경산에 새로운 거처를 정하였다. 본래 선영 곁에 지내려는 마음이 있었으나, 역병으로 인해 이 계획은 좀 더 일찍 실현되었던 것이다. 관악산과 수리산의 빼어난 경치로 아름다울 것이라 예상하였던 거처는 실제 수리산의 풍경이 그대로 들어오는 풍광 좋은 곳이었다. 그런데 원문에 보이는 '양휴산립(揚休山立)'이라는 말은 주자가 정자의 기상을 비유하였던 말이다.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한다는 말이 있듯이 소남은 우뚝한 산을 보면서 경치 감상에 끝난 것이 아니라 스승 성호의 덕을 연상하였던 것이다. 수리산은 성호가 살던 안산에 있는 산이다.

현대의 전염병으로 인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된 지금 한번쯤 중경산에 올라 수리산을 바라보며 소남의 마음을 한 번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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