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퇴하는 여성의 자기결정권
상태바
후퇴하는 여성의 자기결정권
  • 박교연
  • 승인 2022.07.13 0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성칼럼]
박교연 / '페이지터너' 활동가

지난 6월 24일, 미 연방 대법원은 임신 15주 이후 임신중단을 전면금지한 미시시피주법에 대해 6대 3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대법원은 헌법은 임신중단을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임신중단권은 헌법 조항에 의해 암묵적으로 보호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러므로 임신중단을 합법화한 1973년의 ‘로 대 웨이드’ 판례와 더불어 1992년에 나온 일명 ‘미국가족계획협회 대 케이시’ 판례를 뒤집어야 한다고 밝혔다.

임신중단 금지 판결 이후 미전역이 이 문제로 들끓는 가운데, 7월 3일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성폭행으로 인한 임신한 10세 피해자가 급히 인디애나주로 이동해 수술을 받는 일이 발생했다. 오하이오주는 다른 13개 주와 함께 법적 효력이 발생하면 임신중단을 자동으로 불법화하는 트리거 법(trigger law)이 있는 주라, 피해자는 자신의 집에서 안전하게 수술을 받지 못 했다. 인디애나주의 한 의사는 “대법원의 판결 이후 다른 주에서 넘어오는 환자가 하루에 5~8명이 있다”면서 “대부분 법으로 임신중단이 금지된 인근 오하이오주와 켄터키주의 여성들”이라고 밝혔다.

안타깝게도 이런 긴급조치조차 조만간 금지될 예정이다. 왜냐하면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이달 말쯤 인디애나주도 임신중단을 금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심지어 보수 공화당이 우세한 일부 주에서는 원정 수술에 도움을 준 사람을 상대로 민사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이 법안은 원정 수술에 도움을 준 주민을 겨냥해 누구라도 소송을 제기해 이기면 금전을 받아낼 수 있다고 한다. 즉, 이 법안은 어려운 결정을 해야만 했던 여성의 삶을 합법적으로 2번 3번 단죄할 수 있는 권리를 제3자에게 부여한다.

1969년 당시 미국 연방대법원은 임신중단을 금지하는 건 헌법이 보장하는 사생활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원치 않았던 아이가 당사자에게 괴로운 삶과 미래를 강요할 수 있고, 육체적·정신적 건강에 부담을 주며 이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고통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임신중단에 관한 기본적, 의학적 판단은 49년이 지난 지금도 동일하다. 지금의 미 연방대법원조차 1969년의 판단에 대해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못했다. 단지 헌법에 임신중단권이 지칭되지 않고, 암묵적으로 보호되지 않는다며 여성의 기본권을 한정 지었을 뿐이다.

이에 관해 미국의학협회는 6월 24일 성명문을 내며 “합법적 임신중지를 중단하는 주들은 그저 안전한 임신중지를 못하게 함으로써 환자의 생명을 포함한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또한, 여성의 재생산과 건강권의 관점에서 ‘임신중지는 환자와 의사간의 의학적 문제’라는 점도 분명히 밝혔다. 세계산부인과연맹(FIGO)도 같은 날 성명을 내고 “안전한 임신중지는 헌법이 보장하는 인권에 속한다”며 “재생산의 자유에 대한 공격은 민주주의와 국제 인권 기준,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에 대한 권리를 침해하며 성평등을 향한 진전을 저해한다”고 우려를 표했다.

또한, 연맹은 “안전한 임신중지에 대한 접근성 부족은 산모의 사망과 장애의 주요 원인 중 하나”라며 “매년 전 세계적으로 4만7,000명의 여성이 안전하지 않은 방법으로 사망한다”고 덧붙였다. 1996년 미국 HBO 방송국이 제작한 텔레비전 영화 ‘더 월(If These Walls Could Talk)’은 이를 잘 보여준다. 1952년 임신중단이 금지됐던 시절의 베키는 어렵게 수소문하여 의사에게 조언을 구하지만, 병원 의사는 처방전을 써주지 않겠다고 거절한다. 당장 직장을 잃을까 걱정하는 베키에게 좀 더 신중하지 그랬느냐는 남자 의사의 충고는 당연히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국, 절박해진 베키는 뜨개질하는 데 쓰는 커다란 대바늘을 꺼내든다.

베키는 대바늘을 골랐지만 옷걸이, 막대기, 머리핀 등 온갖 가재도구가 절박한 여성들의 자가시술에 사용된다.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임신중단을 처벌한다는 건 안전하고 전문적인 의료 시술을 받을 권리를 박탈한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다. 가재도구뿐 아니라 일부러 임신부 복용 금지 약물이나 독극물을 삼키는 일도 흔하다. 그리고 이런 절박한 시도는 산모의 건강을 치명적으로 위협한다.

영화 속 베키 역시 대바늘로 효과를 보지 못했고, 이를 돌팔이 의사가 마취도 소독도 없이 부엌식탁에서 불법 시술로 오랜 시간 수습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베키에게 의사가 떠나면서 병원에 가보라고 조언하지만, 결국 베키는 피범벅된 채로 차갑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이건 임신중단이 금지된 여러 나라에서 지금도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는 풍경이며, 조만간 미국 전역에 들이닥칠 예견된 불행이다.

그리고 이에 관해서는 우리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2019년 4월11일, 헌법재판소는 ‘여성의 신체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며 형법의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2020년 12월31일까지 관련법을 제정하라고 권고했다. 낙태죄는 2021년 1월1일부터 효력을 상실했지만 대체입법은 답보 상태다. 헌법재판소는 결정문에서 “낙태 전후로 적절한 의료서비스와 돌봄이 제공돼야 한다”고 판결했지만, 입법 공백 속에 ‘안전한 임신중단’은 아직도 요원하다.

현재 우리나라 공공기관의 대부분은 임신중단에 관해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지 않는다.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임신중단에 대해서 어려워하는 사람에게 공감하고 지지하는 상담을 진행하고, 깊은 상담이 필요하면 가족센터와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시술을 어디서 받을 수 있는지, 의약품 어디서 구하는지 알려주는 서비스는 여가부에 없다”고 말했다. 결국, 절박한 여성들은 인터넷에서 공신력이 떨어지는 정보를 쫓아다니며 돈과 시간을 낭비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리고 유일하게 공신력 있는 정보, 상담 약물을 제공했던 ‘위민온웹(Women on Web)’ 사이트는 지난해 12월31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에 의해 차단됐다.

정보를 찾는 데 시간이 걸리다보니 필연적인 임신중단 시기도 늦춰진다. 지난해 3월 실시된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설문조사에서 ‘임신 사실 인지부터 임신중단까지 1주 이상 걸린 이유’ 중 하나가 ‘임신중단 수술이 가능한 의료기관에 관한 정보가 부족하거나 없어서’(34.7%)였다. 박슬기 산부인과 전문의는 “실질적 지원 없는 의료 상담 정도로는 임신중단 접근권 문제를 메울 수 없다”며 그는 “건강보험 적용, 유산유도제 도입,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에 대한 포괄적 성교육 등이 필수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모든 여성의 자기결정권 및 행복추구권을 위해, 또 한 명의 베키가 나오기 전에 입법부는 하루라도 빨리 이 문제에 관해 심도 깊게 고민해야할 것이다.

다시금 말하지만 우리는 결코 후퇴할 수 없다. 아니, 후퇴하지 않을 것이다. “We will not go back.”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