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오면 마당에서 울던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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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오면 마당에서 울던 우물
  • 이세기
  • 승인 2022.08.05 08: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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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기의 손바닥 소설 - 북창서굴]
(12)우물 이야기
우물

 

우물이야기

우리 집에는 저녁이면 우는 우물이 살았다. 빛이 바닥에 다다르지 못하는 우물이었다. 집은 항상 텅 비어 있었고 나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던 날이 많았다. 안강망 배를 탔던 아버지는 동지나해로 떠났기에 일 년에 서너 번 정도밖에 집에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낮에 자주 없었다.

바람 센 항구에서 가까운 우리 집은 일본식 사택으로 지은 전셋집이었다. 양옥 주택가에 집과 집 사이에 낀 단독으로 된 일자집이었다. 세 계단쯤 올라 대문에 들어서면 좁고 어두운 복도를 연상하게 하는 마당과 마주했다. 비라도 오면 마당에 드문드문 깔린 돌바닥이 반짝 빛을 냈다. 그 끝쯤에 제법 크고 깊은 우물이 있었다.

집 모양을 닮은 일자식 툇마루 복도로 이어진 어둑한 마루에는 격자 유리문이 내어 있어 밖이 훤히 내다보였다. 마루는 온통 검은 빛이 감돌았다. 군데군데 닳아서 살색 나무빛깔이 어둠 속에서 속살을 드러내듯 삐죽 새어 나왔다. 내 방은 다락방이었다. 안방으로 들어와 좁은 계단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 천장이 낮은 방이었다. 윤기가 반질대는 다다미가 세 장 정도 깔려있었다.

다락방에는 자그마하게 뚫린 창문이 하나 있었다. 창문을 열면 제법 넓은 옆집 정원이 비스듬히 보이고 단풍나무와 장명등이 보였다. 항구에서 일하는 파견 나온 일본 주재원 집이었다. 그 집에 열두 살이었던 내 또래의 준이라는 남자 아이와 나보다 두 살 아래의 아이코라는 오누이가 살았다.

장명등
장명등

우리 집은 비좁았다. 부엌과 방 두 개가 이어져 있어 가운데 미닫이 중문을 열면 방이 하나로 합쳐졌다. 옆집이 벽처럼 버티고 있어서 처마 밑 마당은 항상 그늘져 어두웠다. 두어 사람이 겨우 지나갈 비좁은 골목 같은 마당이었다.

우물 옆에는 제법 오래된 향나무가 용트림하듯 서 있었다. 가끔 제를 지낼 때 나뭇가지를 잘라 향을 피웠다. 한 여름밤에는 모기를 쫓기 위해 향 나뭇가지를 태웠다. 마당과 방안은 온통 푸른빛이 감도는 연기로 자욱했다. 집 안 청소를 할 때도 향나무를 태웠다. 그럴 때면 집안에 온통 향냄새로 가득했다.

향나무는 초여름이 오면 작은 별사탕을 닮은 초록빛 열매가 열렸다. 열매를 으깨면 숲속의 젖은 풀 냄새가 났다. 입에다 넣고 깨물면 시큼한 맛이 나 혀에 침이 고였다. 나중에 우리 집을 찾아온 아이코에게 별사탕을 맛보게 해준 적이 있었다.

나는 다락방에서 종종 창문을 열고 아이코가 정원에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기다린 만큼 아이코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아이코와 준이 정원에서 뛰어놀고 있는 것을 엿보게 되었다. 종아리에 새하얀 스타킹을 신었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치마에 윗도리는 흰 블라우스를 입고 검은 리본을 두른 흰 모자를 쓴 모습이 아이코의 첫인상이었다. 아이코는 내게 온통 눈부신 빛이었다. 그 환한 빛은 다락방에서 아이코를 기다리게 했다.

한번은 마당에서 벽을 치는 공놀이를 하다가 그만 담 너머 아이코의 집으로 공이 넘어간 적이 있었다. 나는 다락방으로 뛰어 올라가 창문을 통해서 아이코의 집 정원을 훔쳐보듯 둘러보았다. 마침 아이코가 마당에 있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오빠를 불렀다. 나는 마당에 공이 떨어졌다며 말을 건넸다. 준은 마당 구석을 뒤져 공을 건네 주었다. 그게 인연이 되어서 서로 가까워졌다. 가끔 아이코의 집에 놀러 가서 마당에서 술래잡기를 하거나 공놀이를 했다.

아이코도 마당에 내리는 한 줌 햇빛과 향나무와 우물이 전부인 우리 집에 놀러 오곤 했었다. 나는 그때 숨겨 두었던 보물 하나를 아이코에게 슬며시 알려주었다. 신비한 세계를 열 듯 나무 뚜껑을 열어 우물 안을 보여주었다.

우물은 깊고 컴컴해서 숨을 쉬듯 검푸른 물이 넘실거렸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온몸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했다.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두 손을 입에 모아 우물 안에 소리를 지르곤 했다. 아이코가 아이우에오, 하면 아이우에오, 하고 공명이 길게 메아리로 들려 나왔다. 나도 아아, 하고 소리를 지르면 우물은 쩡쩡하게 메아리로 되돌아 왔다.

아이코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벚꽃이 눈송이처럼 열리던 사월이었다. 준과 우리는 항구가 보이는 자유공원에 딱 한 번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벚꽃이 만발한 공원에서 계단 놀이와 자전거를 타면서 한나절을 놀았다. 벚꽃을 닮은 솜사탕을 사 먹기도 했다. 아이코의 새하얀 얼굴을 닮은 벚꽃 송이가 눈처럼 내렸었다. 그것이 아이코와의 마지막이었다. 얼마 후 아이코 가족이 이사를 갔다.

다락방에서 내다보는 아이코가 없는 정원은 텅 비어 있었다. 벚나무 이파리마다 앉은 산산이 조각난 빛을 바라보면 아이코가 정원에서 공놀이하는 모습이 환영으로 부윰하게 어리었다. 하루가 지루하게 지났다. 빛은 어디에고 앉아 있었지만, 나의 그림자는 그저 다락방에서 갇혀 살았다. 나는 그만 풀이 죽었다. 이유 없이 다락방에서 수음을 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부터 더는 우물 문은 열리지 않았다.

스무 살 무렵 햇빛이 쏟아지던 여름날 평일에 우연히 내가 살던 옛집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발이 머문 자리엔 돌계단이 맞아 주었다. 빈집인 채로 대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집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자주 갔던 동네 가겟집 주인이 우물이 메워졌다는 소식을 전했다. 아쉬운 마음에 발길을 돌리다가 나는 불현 눈이 새하얗게 부셔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유년의 저녁이 떠올랐다. 저녁이면 어둑한 그림자와 함께 우물이 울었다.

노임을 받지 못해 도끼를 들고 선주집을 찾아갔던 아버지가 돌아왔던 날에도, 어머니가 소래에서 생새우를 떼다가 시장 귀퉁이에 앉아 팔고 돌아왔던 날에도 우물이 울었다. 항구에서 지쳐 들어온 아버지가, 삯벌이를 나갔다 늦게 들어온 어머니가 우물에서 물을 길어 마시던 그때도 우물이 울었다. 그때마다 우물이 말을 했다. 심장의 밑바닥에서 울리는 음울하고 낮은 음계가 우물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환한 어스름이 오는 초저녁 텅 빈 집에 나 혼자 있을 때면, 깊고 검은 우물 안에서 아이코가 내게 들려주었던 말이 지금도 아련하게 용솟음친다. 내 귀로 어렴풋하게 들리던 그 소리는 희한하게도 나무 뚜껑에 갇혀 우물 안에 맴돌며 아직도 내 귓전에 뚜렷하게 저녁이면 우물 우는 소리와 함께 쟁쟁하게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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