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삶에 다가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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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삶에 다가올 때
  • 안태엽
  • 승인 2022.08.1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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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안태엽 / 자유기고가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고 성경은 말한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고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 박사는 ‘나는 신이 준 능력을 100% 다 쓰고 가니 내가 죽더라도 장승곡을 틀지 말고 행진곡을 틀라'고 했다. 프랑스 퐁피두 대통령 묘비에도 ’나는 살아생전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라고 적혀있다.

돌아보면 내가 참 많이 바보처럼 살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남은 시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평소 철학과는 상관없이 살아왔지만 죽음과 환경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죽음에 본질을 생각하게 한다.

죽음은 과연 나쁜 것일까? 죽음이 나쁘다고 생각하면 뒤에 남겨진 지인들과 가족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을 앗아갈 뿐 모든 소통의 교류가 막혀버린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이라 생각하면 슬프겠지만 죽음으로 인해 다른 생명들이 확장되어 더 넓고 풍요로운 삶이 이어진다고 생각하면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1,000억 톤의 탄소를 필요로 한다. 그중 5억 톤만 생태계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되고 나머지 995억 톤의 탄소는 죽은 생명체의 시체들이 재활용돼서 만들어진다고 한다. 죽음이 없다면 필요한 탄소 200분에 1 정도만 만들어지고 죽음 없는 세상에는 새로운 삶 200배가 덜 가능해진다. 삶은 죽음으로 끝나지만 지구에는 그런 죽음이 있기에 200배나 더 많은 생명이 만들어진다.

노벨 생리학상을 받은 조지 월드는 죽음은 개별 차원이지만 생명 차원에서는 연장이며 궁극적으로 살아있는 생명체를 더 풍요롭게 한다‘고 말한다. 고대 성인들 또한 죽음은 우리 인류에게 주어지는 가장 커다란 은혜이며 삶을 완성시켜주는 신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피해 가지 못하는 질병과 노화는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숙명이다. 어차피 한 번 죽어야 할 운명이라면 나의 죽음도 다른 생명체들에 씨앗이 되는 죽음이었으면 좋겠다. 

부끄럽지 않고 후회 없는 죽음도 있으리라 하지만 죽는 순간이 오면 벌거벗은 맨몸으로 나와 만난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갖게 한다. 하지만 죽음은 자기 존재 가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기에 조문객들과 가족들은 나의 죽음 앞에서 내가 살아온 삶을 이야기할 것이다.

삶의 무게를 덜어주고 방패막이가 되어 준 아내와 자식, 그리고 손주들의 앞날을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나 자신은 없어져도 세상 자체는 여전히 존속하기에 내가 살면서 경험하고 느낀 것을 가족들 마음속에 전해졌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생애는 다른 이들의 말을 경청하고 배려하며 살고 싶다. 

종착역에 가까이 왔다는 생각을 하고 만물을 보면, 보이지 않았던 작은 것들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하찮게만 생각했던 작은 풀잎과 아름다운 꽃들, 감미로운 색깔들이 남다르게 보였다. 대낮에 별을 볼 수 없듯이 어두워져야 볼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은 죽음 앞에 서 봐야 진지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누구인지, 왜 살며, 왜 존재하는지 의미가 분명해지고 자신의 가치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 앞에서도 여전히 가면을 벗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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