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피는 하얀 박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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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피는 하얀 박꽃
  • 전갑남 객원기자
  • 승인 2022.09.07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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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 개울가 뚝방에 핀 박꽃, 오랜만에 만나 반가웠다

해름참 서쪽 하늘이 핏빛이다. 오늘따라 떨어지는 저녁노을이 멋질 것 같다. 특히, 비 갠 날 해넘이는 장관이다.

내가 사는 집 가까이 강화도 해변에 해넘이 명소가 있다. 화도면 소루지마을이 그곳이다.
아내와 나는 서둘렀다. 걷는 것보단 자전거가 빠를 것 같아 자전거에 몸을 실었다. 아내가 앞장서고 난 뒤를 따랐다.
아내가 쏜살같이 한참을 달리다 갑자기 자전거에서 내렸다. 뭔 일이지?
 
"여보, 이거 좀 봐?"
"뭔데 해찰을 해! 곧 해 떨어질 건데..."
"여기 박꽃이 피어있어! 이거 박꽃 맞지?"
"박꽃? 그러네."
 
하얀 박꽃이 피었다. 오랜만에 만나 반가웠다.
하얀 박꽃이 피었다. 오랜만에 만나 반가웠다.
아내가 가리키는 것은 분명 박꽃이다. 군데군데 핀 하얀 박꽃이 예쁘다. 주위에 어른 머리통만 한 박도 보인다.
 
개울 뚝방에 박꽃이 하얗게 피어있다니! 정말 오랜만에 보는 박꽃이다. 누가 심었을까? 관리하지 않은 풀숲에서 박덩굴이 자라고 꽃이 피어났다
 
풀숲에서 풀과 함께 박덩굴이 자라고 박꽃이 피었다.
풀숲에서 박덩이가 크게 자랐다.
수확을 앞둔 박. 예전엔 바가지로 많이 쓰였다.

대부분 꽃은 아침에 피고 해가 질 무렵 진다. 그런데, 박꽃은 저물녘에 피기 시작하여 다음날 해가 중천에 뜨면 시든다.

 
하얗고 얇은 박꽃이 소박하다. 꽃술이 바람결에 하느작거리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사랑하는 임을 떠나보낸 소복 입은 여인처럼 애잔한 느낌이다. 그런데 아내의 느낌은 다르다. 하얀 꽃은 모든 걸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의미라 한다.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
 
많은 꽃은 밝은 대낮에 활짝 피어 벌과 나비를 유인하는데, 박꽃은 어이하여 밤에 피는 걸까? 한낮에는 강렬한 햇볕과 고온으로 화분이 활력을 잃어 해가 누그러질 무렵 수꽃에서 꽃가루를 하나라도 더 만들어 수정을 돕기 위한 생존 전략이란다. 그들 나름의 오묘한 이치가 숨어 있는 것이다.
 
박은 청색 줄기 전체에 짧은 털이 나고, 덩굴손으로 다른 물건을 감는 재주가 있다. 잎은 콩팥 모양으로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잎겨드랑이에서 피는 꽃은 한 송이씩 핀다. 호박꽃처럼 자웅동주로 암꽃과 수꽃이 따로따로 피는데, 수꽃에는 긴 꽃자루가 있으나 암꽃의 것은 짧다.
 
암꽃이 수정되면 열매의 과육은 희고 두꺼우며, 열매가 익으면 껍질이 단단해진다. 그래서 예전에는 바가지를 만들 요량으로 박을 심었고, 박을 켤 때 나온 박속은 나물로 무쳐먹었다. 플라스틱 바가지가 나오고부터 박 바가지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요즈음 심는 박은 박속낙지탕을 끓일 때 식재료로 쓰고 공예품으로 만들기도 한다.
 
지구가 아프다. 플라스틱 바가지 대신 박 바가지를 써야 하는 일도 환경을 살리는 작은 실천이 되지 않을까 싶다.
 
박꽃은 초가지붕 위에 많이 피었다. 지금은 초가를 민속촌에서나 볼 수 있으니 옛 정취의 박꽃은 좀처럼 구경하기 어렵게 되었다.
 
흥부 놀부 이야기 속에도 등장하는 추억 속의 박. 잊힌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아내가 "벌써 해 넘어가네!"라는 소리에 사진 찍는 걸 멈췄다. 어느새 해는 꼴깍 넘어가고 있다. 해 떨어지는 것은 순간이다.
 
강화군 화도면 소루지마을 해넘이 공원. 이곳은 해넘이 명소로 알려져 많은 사람이 찾는다.

해넘이가 남긴 저녁노을이 여운을 남긴다.

 
청아한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저녁, 박꽃은 오늘 저녁에도 소박하고 환하게 피어날 것이다.
 
 
<박꽃> / 이세기
 
박꽃이 피면 환하다
환한 바닷길
환한 밤
환한 지붕
 
환한 것에는 내력이 있다
한 끼의 밥을 위해
굴껍데기 밀려온 바닷길을 따라
걷던
 
박꽃이 피는 밤
 
그믐밤 소라를 잡으러 가는 길 위에 서서
바라보던, 흰 박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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