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잃은 슬픔을 조금이라도 잊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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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잃은 슬픔을 조금이라도 잊을 수 있다면
  • 구지현
  • 승인 2022.09.1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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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에서 만나는 소남 윤동규]
(7) 슬픔을 학문으로 승화시키다
1751년 9월 23일 소남이 스승에게 보낸 편지. 스승의 건강에 대한 걱정과 《도동록》 편집에 관한 내용이다.

 

아들을 잃은 학자는 어떻게 슬픔을 극복하였을까? 1751년 9월 소남은 성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동규가 두 번 절합니다. 시골집에서 체류하다가 한 달을 채우고 돌아왔습니다. 병세가 어떠신지 듣지 못하여 염려가 마음에 맺혀, 자나 깨나 근심스러웠습니다. 집에 도착하여 《도동록》 일로 와 있는 편지를 받고, 비록 손으로 직접 쓰신 것은 아니지만 하문하시는 글이라서 ‘정력이 진실로 여기에 미치시는구나’ 하고 삼가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친구 한 두명이 역시 와서 ‘근래 병세가 갑자기 좋아져 거의 안정되실 것 같다’고 전해주었습니다. 듣고서 기뻐한 것을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삼가 서릿바람 부는 계절을 살피지 못하였으니, 환절기에 건강은 어떠신지요? 침식과 언동 등 기거하시는 것 역시 어떠신지요? 병환이 오래 되셨으니 ‘지금 조금 안정되었다고’는 하나 진원이 크게 손상되어, 향후 조섭하는 데 더욱 마땅히 주의하여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구구한 제 마음 역시 우러러 염려되는 마음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순수[이맹휴]의 장례 기일이 이번 28일이라 들었으니 과연 그러한지요? 장례 치르는 일은 반드시 힘들 것이니 조섭하는 데 해를 끼칠까 걱정스럽습니다. 한 번 동요되면 쉽게 저촉되어 슬퍼한 끝에 아픔을 더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더욱 걱정스럽습니다. 제 생각에 나아가 문후를 여쭙고 얼굴을 뵙고자 하였으나, 제 마음이 미칠 것만 같고 타고 갈 것을 마련하지 못하여 엄두를 내지 못하여, 장례일에 또 장지에서 영결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애오라지 몇 마디 적어 제사에 부치고 자목[이삼환]에게 대신 술을 올려달라 청하였습니다. 가난이 끝까지 사람의 정리를 막는 것이 이와 같으니 개탄스러움이 어떠하겠습니까?

《도동록》의 차제와 제목은 제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난번 몸을 조섭할 즈음 번거롭게 아뢰는 것을 면치 못하였습니다만, 소세(梳洗)의 가르침에 이르렀으니 어찌 감히 쉽게 받들겠습니까? 다만 가르침에 따라 고쳐서 다시 정리하여 말씀을 받드는 것으로 삼겠습니다만, 괴롭게도 서사가 없고 못난 솜씨는 편치 않아 우선 종이 묶음을 남겨두고 다시 명하실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책상 아래에서 절하며 제 마음을 펼 수 있을까요? 다만 이 마음이 우러러 흘러넘쳐 날마다 보내고 있습니다. 삼가 수시로 조섭에 신중하시고 빨리 평소로 회복하시기를 빌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윤동규, 신미년 9월 23일 간찰)

 

편지는 직접 만나지 못할 때 보내는 것이다. 이 편지도 직접 만날 수 없는 상황에서 소남이 성호에게 보냈을 것이다. 집안 소유의 장원도 돌보고 서울의 집도 찾아보아야 하는 소남은 한동안 스승을 찾아뵙지 못하였던 것 같다. 당시 성호가 병중에 있었으므로 더욱 염려가 되었는지 편지에는 성호의 건강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하다.

이러한 걱정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1751년 5월 성호는 아들 이맹휴를 잃었다. 병환에 슬픔까지 더하였으므로 소남의 걱정이 더욱 심하였던 것이다. 소남은 장지에 따라가 영결하는 예식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제문을 지어 보내고 성호의 친척인 이삼환에게 대신 술잔 올려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성호가 아들을 8세조 이계손의 묘소 좌측에 안장하였다고 하였으니, 아마도 본래 장지는 화성 송라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남은 가난 때문에 그곳까지 찾아갈 교통편을 찾지 못하여 참석 못한다고 하였으나, 마음이 미칠 것 같다는 표현을 통해 한가족처럼 지내온 소남의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이제 넉 달이 지나 약간은 진정되었던 비탄이 장사를 지내면서 다시 새로워지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거듭 몸조리를 잘 할 것을 당부하고 있으나 이 말은 소남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슬픔을 상기시키지 않으려는 것인지, 이맹휴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대신 편지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도동록》에 관한 것이다. 《도동록》은 퇴계의 말을 뽑아 만든 《이자수어》의 저본이다. 스승과 제자는 아들의 상중에도 《도동록》 편찬에 관하여 의견을 주고받았다. 와병 중에도 성호의 “소세의 가르침”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소세”는 머리빗고 세수하는 단장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성호는 책을 잘 정리하고 편집하는 일을 가리키는 말로 자주 사용하였다. 즉 소남에게 이 책이 잘 이루어지도록 편집을 부탁하였던 것이다.

편지 첫머리를 보면 소남은 병중의 스승이 직접 쓴 글은 아니지만 이 일에 관해 묻는 글월이 온 것에 조금은 안심하는 듯하다. 아마도 단순히 병을 앓는 와중이었다면 학문에 매진하는 스승을 말렸을 것이다. 그러나 퇴계의 글을 읽는 데 집중하면서 아들을 잃은 슬픔을 조금이라도 잊을 수 있다면 그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었을까? 편지 말미에 소남은 직접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지냈던 날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희망을 드러낸다. 소남 역시 《도동록》 교정하는 일에 집중하면서 제자 같기도 하고 아우 같기도 하였던 이맹휴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을 조금은 덜어내고자 한 것 같다. 이것이 학자가 슬픔을 잊는 방법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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