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곶돈대 - 외적의 침략을 최일선에서 맞닥뜨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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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곶돈대 - 외적의 침략을 최일선에서 맞닥뜨리다
  • 김시언
  • 승인 2022.10.04 08: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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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언 시인의 강화이야기]
(1) 갑곶돈대
[인천in]이 10월부터 매주 ‘지붕없는 박물관’ 강화를 탐구하는 김시언 시인의 '강화이야기’를 매주 연재합니다. 강화가 품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 살아 숨쉬는 그 역사와 생태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냅니다. 필자는 30여 년 전부터 인천에서 강화를 드나들며 익혀오다, 9년 전부터 강화에 살며 작은책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갑곶돈대가 아닌 현재의 갑곶돈대 모습

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이다. 인천,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사는 사람들은 강화도에 많이 찾는다.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니 가족이나 친구 연인끼리 하루 재미있게 지낼 수 있다. 하지만 강화도에 갈 때면 시간대를 잘 맞춰야 흡사 주차장 같은 길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2002년 8월에 초지대교가 개통돼 그나마 교통혼잡을 많이 덜었으나, 아직도 강화도를 드나들 때는 여지없이 막히는 편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휴일에 강화도에 가서 즐겁게 보내려면, 오전 열시 전후로 강화도에 도착하게끔 시간을 짜면 좋다.

흔히들 강화도를 일컬어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한다. 이는 강화도에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실감할 수 있는데, 이는 어딜 가나 유적지 간판이나 이정표를 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솔직히 강화를 잘 소개하자면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강화가 품고 있는 이야기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필자가 과연 그럴 만한 깜냥이 될지 모르겠다. 강화에 터를 옮겨 산 지 9년이고, 30여 년 전부터 ‘그냥 좋아서’ 시간 날 때마다 드나들던 곳이지만 강화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강화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이참에 강화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하는 기회를 삼아야겠다. 오늘은 첫 번째로 갑곶돈대에 대해 알아본다.

 

지금 갑곶돈대는 원래 돈대 위치가 아니다

돈대는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이다. ‘돈(墩)’은 ‘돈대, 평지보다 좀 높직하게 된 곳’이라는 뜻이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강화에는 돈대가 많다. 100㎞에 다다르는 해안선을 따라 돈대가 54개가 있다. 5리마다 돈대가, 그러니까 해안초소가 있다. 사라진 돈대도 있고, 미공개된 지역에 있는 돈대도 있어 다 볼 수는 없으나 해안도로를 가다 보면 돈대 이정표를 쉽게 볼 수 있다. 대개 돈대는 경치가 좋은 곳에 있다. 바다와 섬이 한눈에 보이는 풍광을 담고 있다. 어떤 이는 우스갯소리로 “카페 들어서면 대박날 장소”라고도 할 만큼 돈대는 해안가의 아름다운 경치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꺾어져 들어가면 강화전쟁박물관이 나온다. 전쟁박물관 정문을 통과해 들어가야 갑곶돈대에 다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 갑곶돈대는 돈대가 아니다. 이곳을 돈대라고 부를 수 없는 까닭은, 이 돈대가 강화도 바깥 쪽으로 쌓은 성의 방어시설인 치성(雉城)이기 때문이다. 원래 갑곶돈대는 옛 강화대교 강화 방면 입구에 위치한 곶(串)으로, 바다 쪽으로 좁고 길게 뻗어 있는 뭍의 끝부분에 있었다.

여기서 잠깐, 옛 강화교 앞을 꼭 가보면 좋겠다. 원래의 갑곶돈대 위치를 가늠해 보고 내친김에 옛 강화교를 걸어서 김포 쪽까지 다녀오면 어떨까. 타박타박 옛 강화 다리를 천천히 건너면서 차들이 쉴 새 없이 달리는 강화대교를 바라보고 그 아래로 물이 흐르는 방향도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강화대교와 옛 강화교가 나란히 있다.
강화대교와 옛 강화교가 나란히 있다.

 

‘갑곶’이라는 말은 삼국시대 ‘갑비고차’에서 유래

갑곶은 외적의 침략을 고스란히 겪은 곳이다. 갑곶은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몽골의 침입을 피해 도읍을 강화로 옮겨서 강화해협을 지키려던 요새다. ‘갑곶’이라는 말은 삼국시대에 강화를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 부른 데서 시작됐다. 고려 때 몽골군은 이곳을 건너려다가 건너지 못하게 되자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널 수 있었을 텐데”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갑옷을 벗어 깔면 얼마든지 건널 수 있을 만큼 좁고 얕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려 고종 19년(1232)부터 원종 11년(1270)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겼다.

1679년 조선 숙종 5년에 강화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달은 조정에서는 강화 해안선을 따라 48개 돈대를 축조했다. 이 가운데 김포 통진에서 강화로 들어가는 갑곶나루에 돈대를 만들었는데, 이를 ‘갑구지돈대’라고도 불렀다. 1644년 강화의 요충지마다 군대 주둔지를 설치할 때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로서 1679년에 완성된 것이다.

 

외적의 침입 제일선에서

1866년 프랑스인 성직자 9명을 처형한 책임을 물어 프랑스 함대가 갑곶돈대에 상륙했다. 프랑스군은 10월에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정족산성 전투에서 패한 뒤, 그동안 약탈한 수많은 문화재를 갖고 돌아갔다. 이로 인해 강화 지방에서는 혹독한 박해가 시작됐고 갑곶성지가 보이는 백사장에서 많은 신자가 순교했다.

1871년에는 미국 군함에 다녀왔다는 죄로 우윤집, 최순복, 박상손 등이 갑곶 진두에서 순교했다. 뒤에 천주교 인천교구는 갑곶 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서 지금의 갑곶 순교성지를 만들었고, 2004년 2월에 갑곶 순교성지에서 첫 미사를 들렸다. 이로써 강화도 성지는 일만 위 순교자 현양 동산, 진무영 순교성지, 관청리 형방이 있다.

1876년에는 일본의 전권대신 구로다 기요타가 여섯 척의 함선을 이끌고 갑곶에 상륙한 뒤 운요호 사건의 책임을 물어 강압적으로 강화도 연무당에서 조선의 접견대관 신헌과 강화도조약을 맺었다.

 

갑곶돈대에 담긴 역사를 되새기다

1977년에 허물어져 일부만 남았던 걸 복원했고, 대포 소포 2문 등 새로 만들어 전시했다. 옛터에 새로이 옛 모습을 살려 보수 복원한 것이다. 지금 돈대 안에 전시된 대포는 조선시대 것으로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을 포격한 것이라고 한다.

강화에 가시거든, 돈대를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가끔 돈대 지도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돈대 답사를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참다운 역사 공부를 하는구나 싶다. 지금도 변함없이 유유히 흐르는 강화해협 바닷물을 보면서 갑곶돈대에 담긴 역사를 되새겨 보는 건 어떨까.

 

옛 강화교로 들어가는 길.
옛 강화교로 들어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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