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밝히는' 전등사 - 무수한 사연을 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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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밝히는' 전등사 - 무수한 사연을 품고
  • 김시언
  • 승인 2022.10.11 09: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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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언 시인의 강화이야기]
(2) 전등사
종해루를 지나면 경내에 들어선다.
종해루(宗海樓). 종해루를 지나면 전등사 경내에 들어선다.

“전등사는 몇 번 가 봤죠.” 강화에 다녀간 사람들은 대개 전등사는 꼭 가봤다고 한다. 그만큼 전등사는 볼 게 많고 꼭 가볼 곳이라는 얘기가 될 것이다.

전등사는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삼랑성 안에 있다. 마니산의 한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나가다가 온수리에서 다시 만나 세 봉우리를 이루는데, 이것이 정족산이고 이 안에 있는 산성이 정족산성이다. 정족산(鼎足山)은 세 봉우리의 생김새가 다리가 셋 달린 솥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졌다. 전등(傳燈)은 ‘등을 전한다’는 뜻으로, 밤의 어둠을 밝히는 옥등과 세속의 무명을 밝히는 대장경인 법등(法燈)을 말한다.

 

‘차라리 은행이 달리지 않게 해달라’

가을비가 오락가락하는 오후에 전등사를 찾았다. 소나무가 빼곡한 언덕길을 걸으니 그 끝에 종해루(宗海樓)가 나온다. 종해루는 ‘사방의 모든 강물이 바다를 종주(우두머리)로 삼아 흘러든다’는 뜻으로, 가장 으뜸이 되는 바다를 바라보는 누각이라는 뜻이다. 종해루 양 옆으로는 성곽이 이어졌다. 가던 길을 꺾어 산성을 오르고 싶었으나 다음으로 미룬다.

남문인 종해루를 들어서면 본격적으로 절 안이다. 단풍 들기 전의 막바지 초록, 내년에나 만날 수 있는 초록길 왼쪽으로 부도 3기와 탑비가 나오고, 좀 더 걸으면 은행나무가 나온다. 전등사 은행나무에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철종 때 조정에서는 전등사에 은행을 스무 가마를 바치라고 했다. 하지만 전등사에서는 열 가마밖에 나오지 않아 스님들은 난감했다. 노승은 고민하다가 도술이 뛰어난 백련사 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고, 백련사 스님은 기도해서 스무 가마를 만들자고 했다. ‘은행나무에 은행이 열리지 않게 해달라고 한’ 기도였다. 차라리 은행이 열리지 않게 해달라고 함으로써 은행을 바쳐야 하는 괴로움에서 해방됐다.

대조루로 오르는 절집 경치가 자연스럽다.
대조루로 오르는 절집 경치가 자연스럽다.

 

절집 마당을 지키는 품 넓은 느티나무

여기저기 사람들이 쌓은 돌탑이 많다. 큰돌 작은돌 생김새가 다른 돌들이 쌓여 있다. 다들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천천히 걷다 보니 대조루에 오르는 돌계단 앞이다. 대조루는 누각으로, 절 경내와 주변 사역과의 경계이자 법당 앞으로 올라서는 본격적인 출입문이다. 대조루 돌계단을 하나씩 오르다 보면 대웅보전이 점점 가까워진다.

대웅보전은 조선시대 중기에 지어진 건물로 보물 178호다. 대웅보전에서 많이 알려진 이야기는, 추녀 아래 네 귀퉁이에 있는 ‘나부상’이다.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든 모습이다. 이 대웅보전을 지은 도편수와 주모와의 사랑 이야기, 도편수를 배신한 주모 이야기가 전해진다. 도편수가 품삯을 받는 대로 주모에게 갖다 주었고, 대웅전이 다 지어지면 혼례를 치르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공사를 끝내고 주모를 찾았을 때 주모는 다른 남자와 사라진 뒤였다. 도편수는 억울하고 분했다. 그래서 대웅전 기둥 귀퉁이마다 벌거벗은 주모 모습을 새겨서 영원히 참회하라는 뜻으로 무거운 지붕을 떠받들게 했다. 나부상 중 두 군데는 두 손으로 힘겹게, 두 군데는 한 손으로만 추녀를 지붕을 받치고 있다. 잔꾀를 부리는 것으로도 보이는데, 우리 선조의 해학을 엿볼 수 있다.

전등사 마당에는 400살 된 느티나무가 서 있다. 전등사는 조선 광해군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15년 재건했는데, 그때 심은 나무로 추정되는 이 느티나무는 대웅전 뜰 앞에서 전등사를 찾는 이들의 쉼터 역할을 톡톡히 한다. 나무는 품이 아주 넓어 한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한겨울에는 따사로운 햇볕을 쬐게 해준다.

전등사라는 이름은 어떻게 지어졌을까.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년)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진종사라고 불렀다. 충렬왕의 첫 번째 부인인 정화궁주(~1319)는 왕비로서 일생을 마치지 못했다. 당시 원나라 침입을 막지 못하고 항복한 고려는 항복한 뒤 심각한 내정간섭을 받게 됐고, 원나라 공주를 왕비로 맞아야 했다. 정화궁주는 왕비 자리를 원나라 공주인 제국대장 공주에게 넘겨야 했고, 별궁으로 쫓겨났다. 정화궁주는 강화도를 방문했을 때 옥으로 만든 등잔을 진종사에 시주했다. 이때부터 전등사라 불렀다.

절집 마당에 있는 느티나무.
절집 마당에 있는 느티나무.
전등사4_대웅보전.
대웅보전.

 

전란 속에서 평탄하지 못해

강화 삼랑성은 정족산성이라고도 한다.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 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다. 성 안에는 삼국시대에 창건된 전등사가 있다. 고려시대에는 임시로 지은 궁궐인 가궐(假闕)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정족산 사고와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이 있었다. 삼랑성은 강화산성과 더불어 고려, 조선시대에 수도 개경과 한양의 외곽을 방어하는 중요한 장소다. 강화 삼랑성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곳으로, 예로부터 신성한 곳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전란 속에서 강화도는 평탄하지 못했는데, 전등사도 마찬가지였다. 1627년(인조5년) 청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 정묘호란이다. 조선은 놀라서 조정을 강화로 옮겼고, 다행히 청군은 일시적으로 돌아갔다. 이때 조정은 강화도를 개발하고 전등사를 중수했다. 1636년에 청나라가 다시 쳐들어왔고, 조선 조정은 강화도로 피할 새도 없이 남한산성에서 항복했다.

 

조선시대에는 사고를 관리하는 사찰로

조선시대에 전란을 겪으면서 강화도의 중요성은 더 부각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국난을 거치면서 전등사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를 관리하는 사찰이 돼 위상이 높아졌다. 1707년 유수 황흠이 사각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이라 이름하고 보사권봉소로 정했다. 1719년에는 이 절의 최고승려에게 총섭이라는 직위를 부여했는데, 이는 20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삼랑성에 사고가 세워지자 전등사가 사고를 관리하는 사찰로 지정되어 나라로부터 일정한 지원을 받게 되었다.

고종 때 일어난 병인양요, 신미양요는 결과적으로 조선이 더욱 견고한 쇄국정책을 펴게 했다. 또 한양으로 가는 길목인 강화도의 중요성을 절감해 더욱 충실한 방비를 위해 전등사에 포명 부대의 군량미를 쌓아두는 포량고(砲糧庫)를 세우기도 했다.

또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 쳐들어 온 프랑스군과 혈투를 벌였던 강화수비대의 전공을 기념해 비석을 세웠다. 당시 강화 수비를 맡은 양헌수 장군은 화력의 열세를 무릅쓰고 처절한 전투 끝에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이 공을 기리기 위해 공적비를 세웠다.

발길 닿는 대로 전등사 안을 돌아다녔다. 조만간 산성을 걸으러 또 가볼 참이다. 나무가 많고 전각이 많은 절집, 전등사는 곧 가을 한복판에 설 것이다. 나무들이 각자의 색으로 어우러질 때, 따뜻하게 챙겨 입고 천천히 시적시적 걸어 보면 어떨까.

 

사람들의 마음을 담은 돌들.
사람들의 마음을 담은 돌들.
종해루 양쪽으로 성곽이 이어져 있다.
종해루 양쪽으로 성곽이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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