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중시하지 않던 인천, 함량은 괜찮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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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중시하지 않던 인천, 함량은 괜찮은 편"
  • 이원규
  • 승인 2022.11.08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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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문화 40년을 듣는다]
(1) 김양수 선생 - 인천예총이 걸어온 길(하) / 이원규 소설가 대담·집필

 

인천문화재단이 오는 2024년까지 인천문화예술 40년사(1981~2021)를 편찬한다. 이에 인천in은 인천문화재단과 함께 인천문화 40년을 이야기하고 증언해줄 인물 12인을 선정, 구술 작업을 진행하고 그 내용을 2023년 상반기까지 차례로 연재한다. 첫번째 순서는 김양수 선생으로 이원규 소설가가 만났다. 하편을 싣는다.

 

 

직할시 이후 인천예총 시대

이원규: 선생님, 1981년 7월 직할시 승격 직후 그때 기록을 보면 신영균 예총회장이 인천 와서 신포동 문화회관에 인천직할시지부 간판부터 달았고 1982년 3월에 조직을 완료했습니다. 인천 예술인들이 인천이 직할시 됐다, 우리도 도 단위로 가자, 했나요? 아니면 중앙에서 여러 조직 만들라 권했나요?

김양수: 그때 나는 『현대문학』지에 월평 서평 등 평론 쓰기 바쁘고 서울에 자주 다닌 터라 사정은 잘 몰라요. 아마 둘 다겠지요. 신영균 회장이 간판 달았으니까요.

이원규: 선생님, 저도 선명히 기억하는데 1981년 10월 인천직할시기념 종합예술제를 대대적으로 벌였지요. 두 해 뒤인 1983년에는 개항 100주년 예술제가 열렸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인천의 문화예술계 선후배들은 그때 행사를 인상적으로 기억합니다.

김양수: 그때 참 잘했어요. 지금하고 달라서 시민들이 향유할 문화가 많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시에서 넉넉히 예산을 줘서 질량 높은 음악회, 그림과 사진 전시회 연극공연, 시화전, 문학강연 등을 했어요. 그걸 이어오는 게 제물포 예술제인데 요새는 어째 시들해 보입디다. 제물포예술제는 옛날 것을 답습하지 말고 창조적 전통 잇기로 계속해야 합니다. 그 속에 인천정신이 담기니까요.

이원규: 선생님, 다시 예총 조직으로 이야기 돌립니다. 직할시급 예총 조직에 착수해서 1982년 봄에 김창황 씨가 한국예총 초대 인천지부장을 맡았습니다. 기구표를 보면 선생님은 이사 19명 중 맨 위에 이름이 있습니다. 김창황 선생이 인천 전체 예술인들의 중망을 받아 추대됐나요?

김양수: 좀 미안한 말이지만 김창황 씨가 예총은 물론 문협 근처에도 못 오고 그랬는데 내가 보니 우직하고 무던한 사람입디다. 그래서 저 김창황이 안으로 끌어들이자고, 내가 문인협회 지부장 할 때 저 사람 부지부장 하나 앉혀놓자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 후 그 사람이 커졌어요. 조경희 선생이 예총회장 할 때 성기조 씨가 사무총장 했는데 각 지부 간부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덤볐어요. 성기조 씨가 미니까 김창황 씨가 커진 거예요.

그 무렵에 내가 성기조 씨 보고 인천 와서 강연해 달라 했는데 강연장에 가보니까 청중은 김창황뿐이었지. 뭐 꼭 그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성기조 씨가 참하게 봤지요. 그 뒤 김창황 씨 인천예총회장 하는데 적극 밀었지요.

이원규: 선생님, 그러니까 김창황 선생은 선생님께서 발탁해 문협 지부 부지부장 시켰고, 예총 중앙의 성기조 사무총장이 우직하고 충성도 깊은 걸 알고 밀어주는 바람에 됐다, 각 장르 단체 6명씩 대의원 모이긴 했지만 중앙에서 미니까 김창황 씨로 가자, 그리 돼서 예총 인천직할시지부 초대 회장을 맡은 걸로 정리하면 되겠군요.

김양수: 그렇지요. 그런데 말이에요. 문학이나 예술이 배고픈 거잖아요? 하지만 조직의 감투를 쓰고 기업인들에게 돈을 뜯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이런 일이 있었어요. 나하고 인하대학 박광성 교수가 인천시 행정자문위원이었어요. 시의회가 없던 시절이니까. 시장이 만나자고 해서 가니까 인천 재벌 주원기 씨가 문화예술단체를 새로 만든다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 물읍디다. 주원기 씨는 이 선생도 알지요?

이원규: 네, 포목상과 정미업으로 일어선 인천의 토착자본가, 주씨 4형제의 넷째지요. 인천상업학교 나왔구요. 어떤 예술인이 주원기 씨를 감언이설로 흔들었군요.

김양수: 그래서 나는 시장한테 말했어요. 예총이라는 단체가 있으니까 또 다른 단체 불필요하다, 시가 지원금 안 주면 된다, 했지요. 그랬더니 시장이 잘 알았다 하면서 주원기 선생을 만나달라 합디다. 그래서 내가 조용히 만나자 연락했어요. 주원기 씨 이 양반을 만나서 설명했어요. 엄연히 예총 있는데 왜 또 만드느냐 했고 주 선생이 손을 뗐지요.

이원규: 그랬군요. 예나 제나 예술인들 중에 작품 활동보다는 감투 욕심 많은 분이 있군요. 선생님, 이제 1988년에 한국예총 사무총장으로 가신 이야기해주세요. 이때는 제가 동갑내기 김윤식 ‧ 정승렬 ‧ 조우성 형하고 선생님을 스승으로 여기고 숭의동 자택으로 자주 찾아뵙던 때였습니다.

김양수: 예총이 조경희 전임회장이 장관으로 가고 이어받은 분이 전봉초 씨였어요.

이원규: 평안도 출신 첼리스트, 음악인 출신이시지요?

김양수: 그래요. 서울음대 교수, 음악협회 회장 하시다가 왔죠. 이분이 문협 이사장 하던 김동리 선생한테 사무총장 누구 시킵니까? 물으니까 동리 선생이 김양수 앉히라고 천거했지요. 어느 날 전봉초 회장이 만나자고 불러서, 이 양반이 왜 나를 만나자고 하나 하고 들어가니까 동리 선생 추천이다, 사무총장 맡아달라 했어요. 그래서 간 거지요.

이원규: 선생님은 그때 예총 중앙에서 전국을 보셨으니까 여쭙니다. 전국 대비 인천예술의 수평이나 질량은 어땠습니까? 직할시가 된 부산 대구 광주 그밖에 여러 도(道)와 비교하면 어땠습니까?

김양수: 부산 대구 광주 강하고 대전도 강했어요. 인천과 비슷했어요. 예총 단순 비교는 아니고 문화원 관련하여 이런 일이 있었어요. 문화공보부 장관이 최병렬 씨였는데 어느 날 불러서 가니까 전국 문화원 실태조사를 해달라며 당장 100만 원밖에 돈이 없으니까 나중에 또 줄 테니까 우선 그걸로 하라 합디다. 근데 경기도 평택이 잘해요. 문화원장이 극장 주인인데 돈을 잘 쓰고 있던 거지요.

부산은 워낙 힘이 있더라구요 광주도 그렇고 특이한 건 목포도 무시할 수 없는 정도였어요. 목포 사람들은 선두에 서서 안내하고 그래요. 남쪽 지방은 의사들이 문화원장 합디다. 사무국장한테 맡겨놓고 저녁때 나와서 사무국장 저녁 사주는 거지요.

서울서 떠나서 천안 대전 들러서 광주 갔는데 큰 지방재벌인 사람이 문화원장 직 맡아서, 어떤 식이냐 하면, 가니까 글쎄 기생이 십여 명 있어요. 창을 하는데 원장 맡은 재벌이 월탄 박종화 선생을 모시고 윤병로 평론가도 불러서 대접했어요. 박종화 선생도 놀라서, 우리가 잔치하러 온 것 아니라고 했어요. 인천은 부자들이 문화원을 맡지 않았거든요. 함량을 비교하면 인천은 부산 광주 대구보다 뒤지진 않았지만 그렇게 예술을 중시하진 않았어요. 인천은 자본가나 정치인을 제일로 쳤지만 남 쪽 지방 사람들은 예술가를 대단하게 알아줬어요.

이원규: 선생님, 다음은 수봉문화회관 이사 이야기입니다. 『인천예술50년사』를 보면 어느 사업가가 요정으로 쓰려고 지은 건물인데 문제가 있어서 시에 귀속됐고, 여러 기관이 차지하려고 했는데 문화예술을 중시한 김찬회 시장 결심으로 문화회관이 됐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김창황 지부장의 추진력과 숨은 노력도 강조했습니다. 생각해보면 도(道)와 비슷한 급인 직할시 승격에 구색 맞추는 일이었겠지요. 지금은 그게 작게 느껴지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곧 예술인회관으로 바꾼다는데요. 선생님 그때, 수봉문화회관 들어갈 때 뒷이야기 말씀해주시지요.

김양수: 김창황 씨가 매달리긴 했겠지만 정부와 인천시정부에서 직할시급에 맞게 받아들인 거지요. 다른 직할시나 도에는 어엿한 문화회관이 있었으니까요. 거기 들어가니까 다른 시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지요. 신포동 건물보다는 훨씬 넓었어요.

이원규: 선생님, 이번에는 1997년에 발간한 『인천예술50년사』 관련해서 여쭙겠습니다. 2,000쪽 이상으로 방대한데, 그때 예총지부장은 다시 김창황 씨가 앉았고 편찬위원장과 부위원장은 예총 집행부, 위원은 각 장르 단체 19명으로 실려 있습니다. 선생님은 우문국 ‧ 김용수 ‧ 양윤식 선생과 함께 감사위원으로, 집필 위원은 김길봉 ‧ 김진엽 ‧ 김창황 ‧ 김창흡 ‧ 노재우 ‧ 박송 ‧ 이선주 ‧ 이영유 ‧ 장현기 ‧ 조건수 선생 등이 맡은 걸로 기록이 나옵니다. 뒷이야기 해 주십시오.

김양수: 예총 중앙에서『한국예술50년사』를 만들기 위해 기초작업으로 지방예술사를 파악하려 했어요. 예산도 문공부에서 따냈거든요. 『한국예술50년사』그 책 전에도 지방예술사 관련 콘텐츠를 예총중앙의 발간물에 넣는 작업은 했단 말이에요.인천은 교육대학의 김순제 교수와 조우성 시인이 글을 썼어요.

이원규: 알았습니다. 그런데 김 교수나 조우성 시인은 『인천예술50년사』 필진에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궁금한 건 양장본 무선철 46배판 2천 페이지 두툼한 책 내려면 오늘로 따지면 원고료까지 3천만 원 아니 5천만 원은 들었을 것 같은데 예총 중앙에서 영달했나요?

김양수: 나는 아니라고 봐요. 중앙예총이 직원들 봉급도 못주는 어려운 시절이었단 말이에요. 그 무렵 청와대에서 문화의 날인가 아마 그런 날이었을 거에요. 박정희 대통령이 문화단체 간부들 들어오라 해서 청와대 갔어요.

이원규: 박정희 대통령이 맞습니까? 박 대통령은 1979년에 별세했습니다.

김양수: 아니, 그분 살았을 때 이야기에요. 내가 예총 인천 부지부장 할 때에요. 내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문화단체 예산 너무 적어서 힘들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문공부장관에게 5억을 주라고 딱 명령했어요. 문공부에서 그 돈을 받아 3억으로 줄였어요. 심의위원회에서 또 1억으로 줄였어요. 정치와 문화예술계 관계에 그런 일이 많아요.

이원규: 그랬군요 선생님. 제가 여쭌 건 인천 문화예술계 후배들이 알아야 하니까, 『인천예술50년사』그 방대한 책을 무슨 돈으로 냈느냐 궁금하다는 거였습니다. 예총중앙에서 전체 예술사가 필요해 지방예술사 발간 필요성을 알렸고, 그래서 인천지부는 시정부 예산을 받아 책을 냈다고 정리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조급히 만든 인상, 예컨대 초등학생 백일장 사생대회 가작 작품명과 학생 이름까지 실었습니다.

김양수: 그렇게 해 주세요.

이원규: 선생님, 다음은 민감한 문제 여쭙겠습니다. 1994년에 민예총이 창립되고, 1998년에 인천작가회의 창립이 되고, 거슬러 올라가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1987년의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만들어졌습니다. 선생님이 인천예총을 거쳐서 예총중앙에 계실 때 벌어진 일입니다. 오늘날은 인천민예총이 인천예총과 엇비슷한 위상으로 올라와 있는 게 현실입니다. 처음에는 대립 질시도 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서로 왕래하고 행사 때 가서 축사도 하고 그럽니다. 선생님께서 예총중앙에 가 계실 때 중앙민예총 만들어지고 인천민예총이 조직되었습니다. 1987년 인천민족작가회의가 만들어질 때 인천의 원로와 우파 예술인들은 어떤 인식을 가졌습니까? 그때 진보적 신념 때문에 아웃사이더로서 예총에 가입하지 않는 분들이 많았습니까?

김양수: 그런 사람들이 일부였지 많지는 않았어요.

이원규: 많지 않았는데 문학 분야에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만들어지고 미술 만들어지고 연극 만들어지고 점점 커졌습니다. 그때 인천 원로들이나 예총중앙의 원로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김양수: 그거 가지고 논의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고 자기들끼리 떠드는 거니까 놀고 싶은 대로 놀아라 하는 생각들을 가졌지요. 우리만 열심히 우리 일 하자, 그랬어요. 작가회의나 민예총이 오늘처럼 커질 줄은 몰랐어요.

이원규: 저는 문협 발간 『월간문학』에 선생님 추천으로 등단한 몸이라 몸은 그대로 문협에 있고 작품은 작가회의 사람들처럼 진보적으로 소설 썼습니다. 그 문제는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다음 질문은 다시 인천 예총입니다. 직할시 승격 직후 김창황 선생이 지부장 맡아 연임까지 하고 몇 년 뒤 다시 선출되어 또 연임했는데 그 가운데 시기에 김순제 교수 지부장 시대가 있었습니다. 김순제 선생은 고향이 어디신가요?

김양수: 세 번 중임 못 하는 규정 때문에 김창황 씨가 못 나온 거예요. 김순제 씨는 개성 출신이에요. 사정은 이래요. 예총 중앙에서 전봉초 회장은 나 김양수를 시키려고 했는데 김순제 씨가 자기가 한다고 나섰어요. 인천예총 회원 중 교육대학 출신 제자 아홉 명을 앞장세웠어요. 그이는 나하고 가까웠던 박광성 교수와 사돈이에요. 여보, 김 교수. 당신은 예총하고 무관했던 사람인데 김양수 그냥 맡게 하지 왜 뛰어드느냐? 허고 말렸다는데 막무가내로 나섰지요.

이원규: 김순제 선생은 인천교대 전신인 인천사범학교 교감 하다가 교수 된 분입니다. 교대 이전 사범학교 출신 제자 예술인들도 많았을 겁니다. 그런데 기록을 보면 선생님은 이석인 문협 대표가 추천했는데 간접 투표하는 날 불참하셨고, 그래도 상당히 득표하셨으나 결국 김 교수가 당선한 걸로 나옵니다.

김양수: 먼 기억이지만 김순제 교수 제자들 영향 받은 표가 과반 넘을 듯해 내가 안 간 거지요.

이원규: 그랬군요, 선생님, 제가 지금 스마트폰 열어 인물정보 검색해 보니 김순제 교수가 일본에 유학해 음악 공부할 때 전봉초 선생도 음악 유학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전봉초 중앙회장도 속으로는 김순제 교수 당선을 바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로서는 죄송스러운 일입니다. 당시 저는 소설 쓰고 학교 선생 하느라 예총 쪽에 발길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김양수: 이 선생은 대신 그 무렵에 교사 노릇하면서 많은 작품을 썼지요.

이원규: 선생님께서는 그때 예총 인천지회장 놓치시고 몇 달 뒤 예총중앙 사무총장으로 가셨으니 잘된 일인 듯합니다. 그런데요, 선생님. 그렇게 뽑힌 김순제 교수께서 특히 공연예술 분야에 방점을 두며 잘하신 것 같은데 연임 못 하시고 3년 뒤 김창황 선생이 다시 당선해 또 연임합니다.

김양수: 뭐 김창황 씨가 열심히 일해 신뢰받았기 때문이겠지요. 우직해도 대의원 표 관리는 잘했구요.

이원규: 1998년 3월부터 이선주 선생에게 지회장 자리가 넘어갑니다. 첫 여성회장이시고 인천 토박이시지요. 이때 인천예총 방향성은 어땠는지요? 1990년대 전반 제가 선생님 뵈러 갈 때 이선주 선생 여러 번 뵈었어요. 여장부처럼 통이 크고 활달한 분인데 예총 지회장을 맡으셨습니다.

김양수: 이선주 씨가 나하고 한때는 가까웠지만, 끝까지 우의가 이어지진 않았어요. 그 사람은 무용가인데 인천의 전통춤이나 무속을 체계화하고 민속학을 확대 발전시킨 공로는 있어요. 1990년대에 내가 권유해서 갯가소리, 풍어제 복원 등 전공인 무용 이외에 책을 여러 권 썼지요.

이원규: 네, 제가 소설 쓸 때 그 책들 참고 많이 했습니다. 김창황 ‧ 김순제 ‧ 이선주 이렇게 세 분이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의 인천예총을 이끌었습니다. 『인천예술50년사』를 보면 제물포예술제, 미술초대작가전, 시향 연주, 백일장, 무용제, 연극제 등 전통적 행사의 창조적 계승을 이룩하고, 민예총에 절반 가까이 지분을 내주고 새로운 길을 열려고 분투한 자취가 보입니다. 그리고 1998년 인천 출신 이명복 선생이 한국예총 회장으로 당선되는 경사도 있었습니다.

김양수: 경사였지요. 이 회장은 인천상공회의소 소장도 지내진 기업인인데 인천예술 발전에 기여하고 중앙회장 맡으셨어요.

포용하는 도시의 문화예술

이원규: 선생님께서 1998년에 내신 『인천개화백경』에도 쓰셨고 저에게 ‘인천은 합중시(合衆市)다’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이 인천예술계에 몸담으신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인천 예총과 예술인들 중 토박이와 외래 이주 인사들 비중은 어땠고 주도권은 어땠습니까?

김양수: 외지 출신 인물들이 맘대로 활개 치는 데가 인천이에요. 역대 인천예총 지부장들도 외지 출신이 많아요. 인천은 그런 곳이에요. 뭉치지 않고 모래 알갱이처럼 흩어진다는 말은 쓸데없는 부정적인 말이고 개항 이후 늘 외지인을 포용한 곳이잖아요. 그뿐이 아니에요. 예총 조직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 작품에만 매달린 많은 예술인들, 그 가운데 외지 출신이 많아요. 내가 인천사랑회 모임에 여러 번 가서 강연하면서 한 말이 이거였어요. 어디서 살다 왔든 인천에 살면 인천 사람이다, 그러니 외지에서 온 사람을 포용해라, 인천은 합중시다, 그렇게 강조했어요.

이원규: 선생님 말씀처럼 인천은 단체 가입 안 한 예술인들이 더 많습니다. 예컨대 문학은, 제가 몇 해 전 인천문화재단의 예술연감 문학 부문 총론을 쓰면서 조사했습니다. 인천에 주소를 둔 문인 중 문협 인천지부나 인천작가회의에 가입한 사람보다 가입 안 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서울 가까운 탓에 생긴 주변성과 종속성을 변증법적으로 발전시키는 방안을 모색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김양수: 그래요. 서울이 가까워서 생긴 주변성과 종속성을 거꾸로 이점이 되게 이용해야지요.

이원규: 저도 선생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대담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원로 대선배로서 인천 예술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세요.

김양수: 내가 몸담고 겪었던 인천 예총과 예총중앙 모두 경제적인 어려움이 보통이 아니었어요. 지금도 그렇겠지요. 지금 인천시정부 예산에 문화예술 부분이 다른 지역보다 적다고 합디다.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인천예술이 다른 지역보다 빛난 건 시정부의 관심과 예산이 넉넉했던 때문이었어요. 부디 더도 말고 다른 시도처럼만이라도 문화예술 예산을 늘려주기를 바랍니다. 예술인들은 예총이건 민예총이건 때로 경쟁하고 때로 화합하면서 열심히 창작을 하고 큰 보람 거두시기 바랍니다.

이원규: 선생님, 긴 시간 많은 말씀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부디 건강하셔서 인천 문화예술에 도움이 되는 충고를 많이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걸로 인천 문화예술의 최고 어른 김양수 선생님과의 대담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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