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인으로서 고민이 많았던 이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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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인으로서 고민이 많았던 이규보
  • 김시언
  • 승인 2022.11.15 18: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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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이야기] (7) 이규보의 묘를 찾아서
이규보 선생의 묘
이규보 선생의 묘

빨리 원고를 써야 하는데도 통 써지지 않을 때, 원고 마감이 훌쩍 지났는데도 생각이 정리되지 않을 때는 참으로 난감하다.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전개해야 할지 모를 때는 그저 갑갑하다. 평소에 글을 열심히 쓴다면야 그 갑갑함이 덜할 텐데, 필자처럼 먹고사는 핑계를 대다가 원고를 넘겨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평소에 잘 할 걸’은 이미 하나마나한 이야기. 머리통을 쥐어박아도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어도 고리탑탑함만 더하고 갑갑할 따름이다. 이럴 때는 문득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문인, 즉흥적으로 빛나는 문장을 써내려간 이규보 선생이 떠오른다.

이규보 선생은 평생을 ‘시마(詩魔)’와 함께 살았다. 그래서인가, 이규보 선생의 묘를 찾아가는 길은 늘 설렌다. 800년 세월을 훌쩍 넘어 집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선생의 묘를 가면 늘 마음을 다잡게 되고 살짝 긴장한다. 선생의 묘는 지나는 길에 무심하게 들를 때도 있고, 마음을 다잡기 위해 선생을 찾아갈 때도 있다. 선생의 ‘시마’가 내게도 찾아올 날을 언감생심 기대하면서 말이다. 특히 요즘 같은 늦가을이면 선생의 묘를 찾는 일이 늘어난다.

 

이규모 선생 묘역에서 본 마을
이규모 선생 묘역에서 본 마을

 

‘백운거사(白雲居士)’,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이규보 선생의 묘는 길상면 까치골길 72-17에 있다. 여러 사람이 불은면에 있다고 생각할 만큼 불은면과 맞닿아 있다. 11월 중순, 선생의 묘를 찾아가는 길은 더 없이 스산하고 적막했다. 주유소를 끼고 좁은 길로 들어서면 두시 방향쯤에 선생의 묘가 보이고, 여기서 700미터가량 가면 묘에 도착한다. 이 길은 좁지만 교행이 충분하다.

선생은 살아서 ‘걸음도 재고, 말도 빠르고, 시도 빨리 짓는다’고 하여 3첩(捷)이라고 불렸다.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는데, 두 살 때부터 책을 가지고 하는 일을 즐기고 손가락으로 글자를 짚어가면서 읽는 시늉을 했다고 한다. 아홉 살 때는 글 짓는 데 능하여 ‘신기한 아이[奇童]’라는 평을 들었고, 열한 살 때는 숙부 손에 이끌려 문하성의 여러 사람 앞에서 가 즉석에서 글을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큼 재능이 있었다.

선생의 호만 봐도 선생의 성격과 품성, 풍류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백운거사(白雲居士)’,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선생은 산촌에 한가롭게 숨어 살면서 지내길 바랐고, 25세에는 스스로 ‘삼혹호선생’이라고 호를 짓고 거문고, 술, 시를 무척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선생의 대표적인 작품은 《동국이상국집》은 선생이 죽은 지 석 달 만인 1241년(고종 28)에 선생의 아들 이함이 41권에 누락된 800여 편을 다시 발굴해 정리한 책이다. ‘후집’ 12권을 추가해 모두 53권이다.

 

사가재는 이규모 선생이 개경에 있을 때 별장 이름이다.
사가재는 이규모 선생이 개경에 있을 때 별장 이름이다.

 

생활인으로서 고민이 많았던 선생

이규보 선생은 어려서부터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시험에 합격했지만 정작 벼슬길에 금방 오르지 못했다. 10년이 지나서야 관직을 받았는데 그것도 지방 말단직이었다. 게다가 1년이 지나면서 잘렸으니 벼슬 운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우여곡절로 관직을 다시 잡았지만 50대에는 면직돼 지방으로 좌천됐다. 예순이 넘어서는 외딴섬으로 유배됐다. 한마디로 선생은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다 보니, 선생은 언제나 생활인으로서 고민이 많았다. 오랫동안 실직 상태로 지내서 가족은 끼니를 잇는 일도 무척 힘들었다. 쌀이 떨어지면 옷을 전당 잡혀서 식량을 구했고, 한겨울이면 식구들이 차디찬 방에서 추위와 굶주림을 밥 먹듯 겪었다. 이러한 생활상은 《생활인 이규보》(김용선 지음)에 고스란히 나와 있다. 60대 후반기에 운이 좋게 고위직을 얻었지만 이도 오래가지 못했다. 고려가 몽골과의 항쟁으로 강화도로 급작스럽게 수도를 옮기는 바람에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잠깐 이야기가 샌다. 《생활인 이규보》를 지은 김용선 선생님은 우리 책방에서 ‘고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고려’에 대해 전문가인 선생님이 지난봄에는 ‘생활인 이규보’를, 이달 초에는 최근에 출간한 《먼 고려사 가까운 이야기》 이야기를 들려주러 강원도 화천에서 달려왔다. 강화도에 사는 사람들한테 ‘고려 이야기’는 늘 뜻있고 값지다.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하고 39년 세월을 지내는 동안 강화에는 고려의 이야기가 곳곳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규보의 영정을 보관하고 있는 유영각
이규보의 영정을 보관하고 있는 유영각

 

이규보 선생의 작품을 읽으면

이규보 선생 주변에는 사람이 넘쳐났다. 당시 최고 권력자의 자녀들, 반체제 지식인, 과거시험 동기생, 승려를 비롯해 나이를 초월해 친하게 지낸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선생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도움을 주었다. 또한 술을 몹시 좋아한 선생은 아무리 어렵게 살아도 친구가 오면 반가워했다. 옷가지를 전당포에 잡혀서 술을 대접했다. 이는 그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인데, 음주문화가 깊이 자리 잡고 있었고 풍류를 중요하게 생각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규보 선생도 문학, 거문고 연주, 바둑 등 당시에 지식인이 누린 풍류를 맘껏 누렸다.

선생은 천재적인 문인 이전에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애쓴 사람, 파직과 탄핵과 유배를 골고루 겪은 관리, 오랜 실직 생활로 힘겨운 생활을 한 가장, 게다가 술과 풍류를 즐기고 갖가지 병고에 시달렸다. 선생의 일대기와 작품을 살펴보면 고려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의 묘를 둘러보면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솔직하고 담백한 선생의 작품을 읽으면 마음이 따뜻하고 뭉클하다. 이는 생활인으로서 가장으로서 늘 고민하고 살다 간 선생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백운거사라는 호에 걸맞은 선생의 삶은 시시각각 바쁘게 돌아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닮고 싶은 삶이기도 하다.

이규보의 묘5_이규보 선생을 만나러 가는 시골길.
규보의 묘5_이규보 선생을 만나러 가는 시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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