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의 고장 강화, 청동기인들의 뚜렷한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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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의 고장 강화, 청동기인들의 뚜렷한 발자취
  • 김시언
  • 승인 2022.11.23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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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이야기]
(8) 강화 고인돌을 찾아서
부근리 지석묘
부근리 지석묘

2000년 12월 2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화순, 고창, 강화 지역의 고인돌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고인돌의 보존 가치를 세계가 인정한 것이다. 강화도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 장소다.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는 말이 어디에 가나 실감난다.

특히 고인돌을 볼 때는 더 그렇다. 청동기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았는지 보여주는 고인돌 유적은 강화 내가면 하점면 송해면 일대에 퍼져 있다. 강화도 고인돌을 탐방하려면 적어도 하루 이상을 잡아야 한다. 띄엄띄엄 떨어져 있기도 하지만, 그 수가 엄청나게 많기 때문이다.

 

사람의 삶에 스며든 고인돌

먼저 살던 동네는 아주 한가하고 고즈넉한 마을이었다. 다른 마을에 비해 사람이 그다지 많이 살지 않았다. 마을에 있는 집은 모두 정남향이었고, 마을 아래로는 너른 평야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늘 조용한 마을 뒤편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이 있었는데, 그 집 대문 바로 옆에는 ‘성경 고인돌’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 말에 따르면, 그 고인돌은 그저 평범한 돌로 생각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논밭에서 일을 하다가 그곳을 탁자 삼아 막걸리를 한 잔씩 걸치기도 하고, 그 위에다 나물이나 고추를 말리기도 했다. 물론 오래전의 일이다. 그 고인돌을 지나칠 때마다 고인돌이 마을 사람들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고 여겼다.

고인돌을 보면 ‘무게’라는 말이 떠오른다. 무거운 돌을 왜 올렸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힘을 모아야 올릴 수 있었을까, 누구 무덤일까, 언제 만들어졌을까, 몇 명이 동원됐을까 등등. 또 그 마을에는 사람이 얼마나 살았을까.

부근리고인돌군 중 하나
부근리고인돌군 중 하나

 

청동기시대의 대표 고인돌, 부근리 지석묘

어느덧 11월 하순으로 접어들었다. 온통 초록이던 활엽수가 이파리를 떨구고 초록을 하나하나 지우고 있다. 보이는 풍경이 온통 스산하다. 하늘은 잔뜩 흐리고 기온은 내려가 날은 더없이 새코롬하다. 이런 날엔 어디론가 훌쩍 다녀오고 싶다. 이때 생각나는 곳이 몇 군데 있는데, 그중 0순위가 고인돌이다. 특히 하점면 부근리 지석묘. ‘고인돌’은 커다란 바윗돌 밑을 판돌이나 자연석이 고이고 있기 때문에 붙여졌고, 한자로는 ‘지석묘(支石墓)’다. ‘묘’에서 풍기는 말 때문인지 흐린 날 가면 날씨에 걸맞게 차분해진다. 게다가 청동기시대의 유적을 찾아 시적시적 걸을라치면, 마치 세월을 거슬러 순식간에 판타지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든다.

부근리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이다.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 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규모가 엄청난 까닭에 굉장한 세력을 가진 부족장의 무덤이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덤이 아니라 제사의식을 지낸 제단일 것이라는 추측한다. 선사시대에 권력을 상징하거나 신앙의 대상, 또는 선사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 가늠할 수 있다.

우리나라 고인돌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탁자식 고인돌, 바닥판식 고인돌, 개석식 고인돌. 탁자식 고인돌은 몇 개의 고임돌 위에 넙적한 덮개돌을 올려놓았고, 바닥판식 고인돌은 땅속에 무덤 방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작은 받침돌을 놓은 다음 거대한 덮개돌을 올려놓았다. 개석식 고인돌은 땅속 무덤 방에 받침돌을 고이지 않고 덮개돌만 올렸다.

우리나라 선사시대 무덤은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틀을 갖췄고, 집단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농사를 지으면서 사람들이 떠돌이 생활을 접고 정착됐고, 일정한 지역에 정착하면서 매장 풍습이 일반화됐다. 더불어 고인돌이 조성됐을 것이다.

 

‘고인돌 12기가 더 있는 탐방로’도 함께

주차장에서 부근리 지석묘 가는 길
주차장에서 부근리 지석묘 가는 길

잔뜩 흐린 날 평일 오전 열한 시, 평일이라 고인돌을 찾는 이는 적었다. 주차장에서 부근리 지석묘까지 가는 길이 아주 고즈넉하다. 오래전에 필자는 부근리 지석묘를 처음 봤을 때 적잖이 놀랐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고인돌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도 설렜고, 무엇보다 규모가 커서였다. 부근리 지석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탁자식 고인돌로, 덮개돌의 무게가 약 53톤이다. 이 고인돌은 동북아시아 고인돌의 흐름과 변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다. 부근리 지석묘는 1964년 7월에 사적 제137호로 지정됐고, 지금까지 발견된 북방식 고인돌 가운데 대형에 속한다. 화강암으로 높이는 2.6미터, 덮개돌 크기는 길이 7.1미터 너미 5.5미터다.

또 주차장 옆으로 난 ‘고인돌 12기가 더 있는 탐방로’를 따라 걸으면 좋다. 그 길에서는 형태와 크기가 다른 고인돌을 다양하게 만날 수 있다.

부근리 고인돌군으로 가는 탐방로 안내판
부근리 고인돌군으로 가는 탐방로 안내판

 

언제 가도 고즈넉한 오상리 고인돌군

오상리고인돌군 전체 모습
오상리고인돌군 전체 모습

부근리 지석묘에서 10분 정도 달리면 오상리 고인돌에 다다른다. 고려산 서쪽 낮은 산기슭에 있어 사시사철 언제 가도 좋다. 고즈넉하고 한가로워 고인돌군을 탐방하기에 적합하다.

내가면 오상리 고인돌군은 1999년 4월에 인천광역시의 기념물 제47호로 지정됐다. 1972년 1기가 알려져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됐고, 1990년대 초에 《강화도 고인돌무덤(지석묘) 조사연구》를 통해 이 고인돌이 있는 오상리 산 125번지 일대를 자세하게 조사해 나무와 풀이 우거진 사이에서 10기에 가까운 고인돌을 찾아냈다.

오상리 고인돌은 덮개돌은 부분적으로 손질한 흔적이 있고 평면 형태는 모두 판돌형이다. 덮개돌의 크기는 기념물로 지정된 내가 고인돌이 길이 335센티미터로 가장 크고 나머지는 130~260센티미터로 다양하다. 돌방[石室]은 돌널 형태의 모습이고, 고임돌이나 막음돌을 세울 때 튼튼하게 하기 위해 주변에 쐐기돌을 사용했다. 돌방 바닥은 거의 대부분이 맨바닥을 그대로 사용했고, 1호 4호 9호 고인돌은 판돌이나 깬돌이 깔려 있다.

오상리 고인돌군 가운데 내가 고인돌에서는 돌칼, 돌화살촉, 민무늬토기 등이 출토돼 당시의 생활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오상리고인돌군 뒤 고려산 산자락
오상리고인돌군 뒤 고려산 산자락

 

청동기시대 어느 마을을 어슬렁거리는 듯

강화도에 있는 고인돌의 고려산 별립산 봉천산 등에 집중적으로 분포돼 있다. 특히 고려산을 중심으로 90기 이상 분포돼 있다. 게다가 여러 기의 고인돌이 한곳에서 떼를 이룬다. 10여 곳이 넘는 지역에 150여 기가 분포돼 있다. 유적 하나에 평균 14기에 가까운 고인돌이 분포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화도 고인돌은 산 경사면에 집중적으로 분포돼 있다. 이는 지금의 지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금 논밭으로 된 평지가 청동기시대에는 바닷가와 갯벌로 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가, 그 뒤로 섬과 섬을 연결하는 간척사업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부근리 지석묘처럼, 탁자식 고인돌 비중이 가장 높다. 이는 탁자식 고인돌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북한지역보다 비중이 높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강화도 고인돌은 굼[구멍·星穴]이 만들어져 있는 고인돌의 수가 적다. 150여 기의 고인돌 중 굼이 만들어진 고인돌이 세 기밖에 없다. 굼은 대개 뚜껑식에서 발견되는데, 강화 고인돌은 대다수가 탁자식이기 때문에 그 수가 적은 것으로 추정된다.

강화에 있는 고인돌을 탐방하려면 하루를 꼬박 잡아도 부족하다. 부근리 고인돌, 교산리, 삼거리, 고천리, 오상리, 대산리 등등에 널리 분포돼 있기 때문이다. 고려산과 별립산, 봉천산 등지를 돌다 보면 어느새 청동기시대의 어느 마을을 어슬렁거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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