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센 항구도시에서 만난 고향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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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센 항구도시에서 만난 고향 친구
  • 이세기
  • 승인 2022.11.25 05: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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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기의 손바닥소설 - 북창서굴]
(20) 굴물회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친구를 만났다.

후미진 역 앞 술집에 들어간 것은 흔치 않은 별미 때문이었다. 거리는 기온이 떨어져 쌀쌀하고 지친 몸은 뜨거운 탕에 술 한잔이 간절했다.

가게를 기웃거리다가 입구에 붙어 있는 메뉴가 눈에 띄었다.

‘덕적도 굴’이라는 메뉴를 보고는 한동안 멋쩍게 서 있다가 술집에 들어가 청주와 함께 생굴을 시켰다.

가겟집 주인은 넌지시 안주와 술을 탁자에 놓고는 말을 붙였다.

혹시 고향이 덕적도예요?

덕적도 굴
덕적도 굴

덕적도산 굴을 시켜서, 묻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덕적도라는 지명을 부르는 주인을 꺄우뚱하게 쳐다보았다.

주인도 나를 유심히 보았다.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자 다짜고짜 초면인 나에게 주인은 혹시 아무개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아무개 섬 출신이라고 말했다.

같은 동향이었다.

우물 윗집에 살았던 아무개라며 자주 놀았던 친구라 했다. 이름과 얼굴은 잊었지만, 우물만은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오래전 고향을 떠난 나는 바람 세찬 항구도시에서 살면서 뜻밖에 초등학교 동창을 만난 것이었다.

듣자니 그도 초등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항구도시로 전학을 왔다. 나 역시 일찍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 전학을 해 온 터라, 서로 친했다는 옛친구 얼굴이 가뭇했다.

친구는 어렸을 적 몇몇 친구들 이름을 거론했지만, 흰 백지장처럼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기억이 전혀 없나 보네. 친구는 씁쓰레했다.

다만 우리 집이 가운뎃마을 첫 집이라는 것과 안강망 배를 탔던 아버지를 언급하자, 그제야 비로소 가물거렸던 기억이 머릿속에서 기어 나왔다.

아.

나의 입에서는 외마디 짧은 신음이 불식간에 터져 나왔다.

아버지는 대처 항구로 떠돌면서 한 해에 한 번 정도 집에 들렀는데, 동지가 지나면 일 년 양식인 쌀가마니를 팔아 윗목에 쌓아놓고 정월을 지내고 동지나해로 떠났다.

이름조차 새까맣게 잊어버린 친구의 등장에 나는 떠나온 섬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이십칠 년 만이었나?

나는 고향 섬에 딱 한 번 우연히 가본 적이 있었다. 머리를 식힐 겸 덕적도에 갔을 때 때마침 부두에 정박해있던 고향행 간선에 옮겨 탔었다.

마중해 줄 사람도 없는 고향 섬 부두에 발을 내딛자 진눈깨비만이 나를 반겨주었다. 장수하늘소와 만월을 보던 해변의 상수리나무 숲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발전소가 들어 서 있었다. 집터는 묵정밭으로 변해 황량했다. 얼굴을 알만한 동네 사람들이 없었다. 학교는 쓸쓸하게 터만 남아 있었다. 겨우 어렸을 적 동무 두 명이 아직 고향에 남아 발전소 직원으로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해후를 했다. 뭍에서 온 친구에게 줄 것이 마땅히 없다며 고향 맛이라도 맛보라고 갯벌에 나가 갯말미잘을 잡아 와 대접을 했다.

이러저러한 이야기 끝에 이제는 성묘 발길조차 끊겼다며 북망산에 있는 증조 할아버지를 비롯한 집안 묘를 동네분들이 돌아가며 벌초한다고 알려줬다. 고향을 떠나 대처로 떠도는 사람들이 벌초도 하지 못하는 처지이고 보니 동네에서 묘지를 돌보는 모양이었다.

집안에서 벌초 비용을 보내는지 나는 잘 몰라 조금 난망했다. 그새 동무들은 말이 없고 나 역시 할 말이 많지 않았다.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텅 빈 해변을 걸어 여객선 배편 시간에 맞춰 부두로 향하는 발걸음은 고향 땅과 쓰디쓰게 멀어지고 있었다.

술 몇 순배를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친구는 잠시 기다리라 했다. 주방에서 시키지도 않은 굴물회를 말아 나왔다. 햇굴이라며 간장에 쪽파를 썰고 고춧가루와 식초를 넣은 고향식으로 물회를 말아주었다. 굴물회는 잠시 이 도심의 귀퉁이에서 살아가는 싸늘하게 식은 내 가슴을 데워 주었다.

술값을 내자 친구는 슬며시 내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약지와 새끼손가락 마디가 없었다. 다시 들르겠다, 하고는 나는 손사래를 치며 술값을 건네고 나왔다. 길가까지 나와 배웅하는 친구와 잡은 손이 펄 낙지 구멍 속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가듯 했다. 해변에 떠내려온 해파리를 만진 것처럼 서로의 거친 손이 물컹거렸다.

헤어져 술집을 막 나오니 날은 더 어두워지고 기온은 더 떨어져 있었다. 거리는 불야성으로 물들고 네온사인은 뱀 혓바닥처럼 검은 바닥으로 날름거렸다.

고향의 그림자가 시나브로 따라왔다.

당산이었다.

춥고 쓸쓸한 내 마음속엔 언제나 고향 땅에 어둠 속에서 우뚝 솟아있는 영산인 당산만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 볼수록 신비롭고 갸륵하고 숭고한 당산을 나는 항상 두렵고 경외의 마음으로 품어 왔었다.

나는 흐느적거리는 불빛을 뒤로 하고 걷기 시작했다. 도무지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산산이 해체된 내가 서 있을 뿐이었다.

밤하늘 먼 곳에선 서쪽으로 나는 기러기 떼 울음이 들렸다.

나는 살을 에는 초겨울의 세찬 바람을 이마로 받으며 골목을 빠져나왔다.

당산
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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