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켜켜이 쌓인 동네를 걷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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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켜켜이 쌓인 동네를 걷는 일
  • 권근영
  • 승인 2022.12.14 18: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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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설계하는 인천 문화]
삶의 기억과 흔적이 있는 길(3) 대한서림 – 홍예문 – 인성여고 – 신포과자점 – 애관극장 - 답동성당
글 = 권근영 15분연극제X인천 대표
‘15분연극제’에서는 인천에서 나고 자란 혹은 인천에 터를 잡은 연극인의 삶의 기억과 흔적이 묻은 장소를 함께 걷는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인천의 작은 동네, 자주 가던 곳, 이야기와 사건, 아주 소소한, 개인의 기억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그 일부를 기록해 공유합니다.

 

기획 : 권근영 / 공연예술가, 15분연극제X인천 대표

안내자 : 이은진 / 연출, 극단 바바서커스 대표

사진 : 이도준, 권근영

함께 걸은 날 : 2021년 4월 25일(일) 오전 10시

함께 걷는 길 : 대한서림 – 홍예문 – 인성여고 – 신포과자점 – 애관극장 - 답동성당

 

안녕하세요. 동인천 일대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극단 바바서커스 이은진입니다. 저는 오늘 여정의 시작을 대한서림으로 정했습니다. 제가 청소년일 때만해도 이곳이 만남의 장소였거든요. ‘어디서 보지?’ 하면 ‘대한서림 앞’ 이랬습니다. 지금은 1층에 KT 매장이 들어와 있는데, 그때만 해도 건물 전체가 서점이었어요.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서점 내부가 훤히 보였고, 서점 안팎에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항상 북적였습니다.

제가 어릴 때 막내삼촌이 여기서 책을 사준 기억이 있어요. 당시 삼촌은 인하대학교 학생이었는데, 걸핏하면 데모를 해서 저의 부모님 걱정이 크셨습니다. 80년대였고 아버지가 공무원이셨으니 그럴만 했죠. 저에게 민주화운동은 막내삼촌을 기다리던 초조한 마음과 거리의 매케한 최류탄 냄새로 남아있습니다. 여하튼 삼촌이 어느 날 대한서림에 절 데려와서 『어린왕자』책을 선물해줬어요. 제가 초등학생때인데, 유치원생도 아닌데 왜 그림책을 사주지, 그랬습니다.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들어갔던 극단에서『어린왕자』공연을 하게 된 거에요. 이렇게 깊은 뜻이 있는 그림책이었다니, 그때서야 깨달았습니다.

대한서림 얘기로 다시 돌아와서. 이 일대에 3개의 고등학교가 있어요. 인성여자고등학교, 인일여자고등학교, 제물포고등학교. 이 모든 학교 학생들이 학교에 가려면, 동인천역이나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내려서 이 대한서림을 끼고 자유공원 언덕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아침에 등교 할 때 여기서 친구를 만나 학교까지 같이 걸어가고 그랬어요. 오늘 여러분과 함께 그 기분을 공유하고 싶어서 대한서림 앞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같이 걸어가 보실까요?

오른쪽에 있는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은 인현동 화재사건이 일어난 후에 새로 만들어진 거라고 하던데, 저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난 이후여서 나중에 알았어요. 그런데 제 동생이 고등학교 다닐 때여서 동생의 기억 속에는 큰 충격으로 있더라고요. 아마 그 시기에 이 일대에서 학교를 다닌 학생들은 충격이 컸을 거예요. 너무 끔찍한 일이었죠. 전윤환 연출님이 당시 제물포고등학교를 다녀서 아마 더 잘 기억하고 계실 거에요.

대한서림 앞에서부터 자유공원 언덕 올라가는 이 길을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걷잖아요. 같은 학교 친구들끼리 걸어가니까, 교복 색깔 별로 층이 나눠졌어요. 인성여고는 인성여고끼리, 제물포고는 제물포고끼리 걸어가는데, 남녀가 같이 걸어가는 길이잖아요. 그 자체로 설레이고, 이름도 모르는데 짝사랑하는 애들도 있고 그랬어요. 좋아하는 제물포고 학생이 나타나길 기다렸다가 등‧하교하는 애들도 있었고요. 학교가 왜 이렇게 언덕에 있냐고 투덜거리기도 했지만, 마음 속에 설렘도 품고 걷는 언덕길이었답니다.

언덕 끝에서 오른쪽은 제물포고등학교로 가는 길이고, 왼쪽 홍예문을 넘어가면 인성여자고등학교가 나와요. 잠깐 여기서 멈춰서 우리가 올라온 길을 뒤돌아 볼까요? 저쪽에 지금은 아파트가 많이 생겼네요. 동인천 북부 쪽인데, 제가 학교 다닐 때랑 뷰가 많이 달라졌어요. 스카이라인이 가려진 것 같아서 조금 씁쓸합니다. 홍예문 쪽으로 이동하시죠.

홍예문을 통과하면 제가 다녔던 인성여고가 바로 밑에 있어요. 그때는 이렇게 작은 느낌이 아니었는데, 다시 와서 보니 아담한 느낌이네요. 운동장 뛰어다니면서 헐떡였던 기억 때문인지 엄청 큰 곳으로 각인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모든 게 아기자기해 보이네요.

제가 오늘 오랜만에 고등학교 졸업 앨범을 꺼내 왔거든요. 그때 그 선생님들이 지금도 계실지 궁금해지네요. 여기 이 여자 분이 체육 선생님이셨는데요, 굉장히 무서웠어요. 배구를 주로 가르치셨는데, 열 명 정도가 원으로 서서, 양손을 모으고 팔뚝 안쪽으로 공을 쳐서 서로에게 토스하는 걸 매 학기 시험으로 내셨어요. 정해진 횟수를 채워야 했죠. 선생님이 무서우니까 애들이 쉬는 시간, 점심시간 할 것 없이 시간만 나면 운동장에 가서 배구 공 패스하는 걸 연습했어요. 어느날 우연히 교실 창문 밖으로 운동장을 바라보는데, 하얀 배구공 수십 개가 올라왔다 내려갔다 하는 거예요. 운동장 한 가득, 하얀 공이 여기로 튕겼다가 저기로 튕겼다가.. 애들 팔은 다 멍들어가고 있는데 그 이미지는 참 예쁘더라구요. 넋 놓고 바라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재밌는 건, 전 우리 학교가 배구로 이름난 학교라고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일반 학생들한테도 배구를 가르쳤구나, 했는데 아니더라구요. 배구가 아니라 농구 명문 학교라고 하네요.

저희는 이제 신포시장을 지나서 애관극장 쪽으로 갈 건데요, 신호등 건너기 전에 신포과자점에 들러보려 해요. 엄청 작은 과자가게인데, 제가 꼬맹이일 때부터 있던 과자점입니다. 여기 지나갈 때마다 이 작은 과자점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 좋았어요. 과자가 정말 예쁘지 않나요? 하얀 앙꼬가 들어있고, 고급스러운 느낌에, 맛도 달달하고. 잠깐 몇 봉지 사서 나눠 먹고 가요. 진짜 맛있어요.

애관극장 앞에서 잠깐 멈춰볼게요. 인쇄를 몇 장 해왔는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입니다. 이 사진은 제가 고등학생일 때 디카프리오, 그리고 이 사진은 지금의 디카프리오.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죠. 디카프리오는 저의 첫 사랑 중 하나였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이 애관극장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개봉했었는데, 7번을 봤어요. 첫날 4번, 다음날 3번. 당시에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연속으로 볼 수 있었거든요. 디카프리오가 로미오로 나오는 첫 장면에서 저는 울었습니다. 너무 멋있어서요. 애관극장은 리모델링으로 더 젊어진 느낌인데 디카프리오나 저는 중년이 되었네요.

마지막으로 함께 갈 곳은 답동 성당입니다. 답동성당도 유서가 깊은 곳이죠. 개항기였던 19세기 말에 지어진 성당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여기로 미사를 다녔는데요, 제가 살던 동네에도 성당이 있었는데 일부러 여기까지 왔었어요. 여기 친구가 있었거든요. 그리고 답동성당이 더 분위기가 좋았어요. 뭐랄까, 스테인드글라스도 멋지고, 앉아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세상과 멀어지는 그런 느낌이 좋았습니다.

여기 성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랜만에 딛으니까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드네요. 미사 마치면 친구랑 뛰어나오면서 이 계단에 서서 밥 먹으러 어디로 갈까, 궁리하고 그랬거든요. 계단 앞에서 성당 건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고요. 이렇게 여전히 잘 있어줘서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저는 무신론자가 되었지만, 성당은 계속 이렇게 남아있어주길 바랍니다.

오늘 저의 추억이 가득한 동인천, 신포동 일대를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치며. <세월이 켜켜이 쌓인 동네를 걷는 일>

저는 인천 주안에서 태어나서 대학 시절까지 쭉 주안에 살았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독립해서 서울에 자리 잡았고, 이제는 고향인 인천보다 서울이 더 익숙한 느낌입니다.

15분연극제를 준비하면서 인천 여러 곳을 다시 둘러보았어요. 제가 살던 동네 주안과 학창시절을 보냈던 동인천-신포동 일대, 소풍 가거나 놀러 다녔던 월미도, 문학산, 송도 여기저기를 다시 찾아가 봤습니다. 신기하게도 제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 동네는 여전히 그대로였습니다. 제가 살던 집 대문도 그대로였고 만화책만 읽었던 서예학원 건물도, 비염 때문에 지겹게 다니던 소아과도, 당시에도 재개발될 거라던 아파트 단지도 그대로였습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세월이 켜켜이 쌓인 동네를 걷습니다. 오래된 것들, 여전히 남아있어준 것들에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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