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행궁, 외규장각을 품은 고려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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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행궁, 외규장각을 품은 고려궁지
  • 김시언
  • 승인 2023.01.31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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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이야기]
(14) 고려궁지
고려궁지 정문인 승평문
고려궁지 정문인 승평문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함께 아우르기

고려궁지에 처음 가는 이라면 좀 실망할 수도 있다. 기대하던 건물이 없고 고려시대를 알 수 있는 흔적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썰렁하기 때문이다. 《고려사절요》 고종 편에는 “(당시 최고 실력자였던) 최우가 이령군을 보내 강화에 궁궐을 창궐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에 고려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기 전에 군사 2천 명을 보내 궁궐을 짓기 시작했고, 몇 년에 걸쳐 완성했다.

하지만 지금 고려궁지에는 고려시대 건축물이 없다. 몽골과 화친을 맺고 환도하면서 그들의 강압에 못 이겨 궁궐과 성곽을 모조리 철거할 수밖에 없었다. 또 조선시대에는 왕이 행차 시 머물던 행궁으로 쓰였지만 병자호란과 병인양요 때 불타고 1977년에 복원된 게 현재 모습이다. 그래서 고려궁지에 가면 여러모로 상상력이 필요하다. 이곳에 어떤 곳이었는지, 강화섬이라는 곳이 외세의 침략과 공격을 어떻게 막아낸 곳인지 생각해야 한다. 끊임없이 침략해오는 외세에 저항한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극복 등등, 역사를 생각하면서 과거로 스며들면 어떨까.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함께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고려궁지는 강화읍 북문길 42(관청리)에 있다. 예전에는 건물이 많았으나 거의 불타 없어졌고 지금은 동헌과 이방청 건물만 남았다. 필자가 이십오륙 년 전쯤, 오래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는 조선시대 외규장각이 있어서 관심이 갔다. 외규장각은 왕립도서관인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규장작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하기 위해 설치한 도서관으로 왕이 열람하는 의궤를 둔 곳이다. 정조 임금은 만약의 사태로 한양에 있는 규장각이 훼손될까 염려해 강화에 외규장각을 세워 귀한 책을 이곳으로 옮겨와 보관했다. 고려궁지는 고려시대 때는 도읍지로, 조선시대 때는 각종 관아를 비롯해 여러 건물이 있었다.

 

동헌과 그 앞에 있는 느티나무
동헌과 그 앞에 있는 느티나무
이방청
이방청

동헌 앞 느티나무 한 그루

매표소를 거쳐 계단을 오르면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동시에 들어가는 기분이다. 한 장소를 들어가면서 두 시대를 함께 볼 수 있는 곳도 드물다. 반쯤 열린 문을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외규장각 건물이었다. 그리고 길을 따라 걸으면 오른쪽에 있는 유수부 동헌이 나온다. 지금으로 말하면 군청이라 말할 수 있다. 지난해만 해도 이곳에 이르기 전에 이정표와 안내문이 길게 붙어 있어 고려궁지를 찾는 이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런데 이번 설 연휴에 갔을 때는 무슨 일인지 안내문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너무 썰렁해서인지 전처럼 관람객에세 친절하게 안내하는 글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동헌 앞에는 400살 된 느티나무가 담담하게 서 있다. 조선 인조 9년(1631)에 여러 전각과 행궁을 세울 때 심었던 나무로 추측한다고 한다. 이곳에 건물이 많았지만,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건물들이 불에 타서 사라지고 지금은 유수부 동헌과 이방청이 개수돼 있다. 건물과 사람은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이 느티나무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자리에서 묵묵히 이곳을 지나갔을 수많은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무뿌리가 땅 위로 드러나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외규장각을 찾은 사람들
외규장각을 찾은 사람들

강화도는 39년 동안 고려의 도읍지

강화도는 고려 고종 19년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39년(1232~1270) 동안 개경을 대신한 수도였다. 고려 정부는 강화도에 궁궐과 성곽을 지어 몽골에 대항해 싸웠다. 1232년 6월에 강화로 수도를 옮기기로 한 다음, 두 해 동안 공사를 하고 고종 21년(1234) 한겨울에 궁궐을 완성했다. 궁궐과 관아 건물이 생기고 사람들이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고려 정부가 강화를 도읍지를 정한 데는 강화 읍내의 진산 송악산의 지세가 개경과 닮았다는 점이었는데, 이는 적을 막을 수 있고 성곽을 쌓을 수 있다는 조건 때문이었다. 후세에 이르러 어떤 사람들은 이곳이 고려궁지가 아닐지도 모른다며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 까닭은 한 나라의 궁궐터로서 아주 비좁고 또 궁궐터였다는 자료가 확실히 나와 있지 않다는 점을 든다.

하지만 1270년 강화조약이 맺어져 다시 수도를 옮기면서 허물어졌다. 조선시대에도 전쟁이 일어나 강화도로 피난지를 옮겼다. 인조 9년에 옛 고려궁터에 행궁을 지었으나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함락되고 건물이 모두 불탔다.

무엇보다 외규장각이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이곳은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하다. 병인양요 때까지 이곳은 행궁, 객사, 외규장각, 숙종 어진을 모신 장녕전, 영조 어진을 모신 만녕전이 있었다. 프랑스 군인 쥐베르는 “땅의 경사가 매우 가파른 성내의 북쪽에 지방 관아와 정부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우뚝 솟은 지방 관아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관아는 여러 채의 건물로 구성돼 있는데 건물들의 건축 양식은 매우 우아하고 아름답다”고 했다.

외규장각 안을 둘러보는 관람객들
외규장각 안을 둘러보는 관람객들

 

고려궁지에서 시대를 소환하다

특히 이곳에는 외규장각이 있다. 나라의 귀한 책 수천 권을 한양에서 김포 뱃터까지, 뱃터에서 강화 외규장각까지 옮긴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귀한 책 대부분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불을 질러 거의 태웠다. 지금 고려궁지 안에 있는 외규장각 건물은 근래에 복원한 것이다.

병인양요 때 어이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프랑스군이 의궤 300여 권을 강화읍내를 점령한 뒤 곧바로 빼냈다가 자기 나라로 가져간 것이다. 1975년 역사학자 박병선의 노력으로 의궤의 존재가 알려졌고, 2011년에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던 297권이 ‘영구대여’라는 명분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우리나라 의궤를 그들이 훔쳐갔는데 도로 우리가 대여하다니! 힘없이 당한 나라의 울분을 다시금 되새기는 대목이다.

고려궁지에 가면 ‘터’라는 말이 떠오른다. ‘터’라는 말은 참으로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한글이라 더 친근해서인지 ‘터’에 스며든 장소성과 시간성이 한층 더 실감나게 와 닿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동시에 아우르는 고려궁지에 들르면 ‘터’를 밟는 느낌이 생생해진다. 두 시대를 소환할 수 있다.

회화나무에서 바라본 고려궁지
회화나무에서 바라본 고려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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