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 연희고등구락부 만학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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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 연희고등구락부 만학도들
  • 채진희
  • 승인 2023.02.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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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채진희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인문학 아카데미 소통의 글쓰기반

만학도들이 공부했던 연희고등구락부는 40년이 흘러버린 지금도 시린 내 맘 한켠에서 꼼지락거린다. 그 시절 나의 열정은 넘치다 못해 폭발하는 힘이 있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의 세월이 흘렀지만 생생하다. 새파랗게 젊어서 욕심도 의욕도 많았다.

우리 학교는 이화여대 앞 동네인 염창동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키가 작았던 나는 굽이 높은 신발을 신고 청춘의 꿈을 키우며 그 길을 오르락내리락 한 시기를 걸어 다녔다. 생각에 잠기게 하는 나의 그 18번지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교사였던 나는 늦은 출근길에 이대 앞으로 길게 늘어선 옷 가게와 액세서리 노점상에 들려 예쁜 옷들을 골라 입었고 머플러로 세련미를 뽐내기도 했다.

학생들은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고된 몸을 깨우며 밤에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운 얼굴들이 겹친다. 우리 반에는 서른 살을 훨씬 넘긴 유리 가게 사장님이 있었는데 반장의 역할을 잘하는 학생이었다. 가끔 돈 잘 버는 방법론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학생들은 수업 시간보다 그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내가 맡았던 과목은 상법과 타자 수업이었다. 타자기가 없었던 우리 학교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중에 딱딱한 종이 위에 단추들을 나열해서 글자판을 꼭꼭 눌러 붙여 타자기를 만들었다. 그 위가 달도록 타자를 연습시켰다.

긴 세월이 지난 지금, 나는 할머니가 되었다. 기억 넘어 아련한 추억을 오늘 이렇게 회고할 수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던 학생들은 열정을 가지고 밤에 야학을 불태웠던 덕분에 나의 젊음을 응원해 주었는데 지금은 어디에서 어떤 삶을 펼쳐가고 있을까? 유리 가게 사장님이었던 그 학생은 잘 살아가고 있을까?

내가 기쁜 마음으로 세상에 그렇게 나아갔을 때 예상 못했던 죽음을 목격했다. 나는 처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 삶이 무엇인지 고민했었던 것 같다.

여름 수학여행을 꿈꾸던 학생들에게 장로님이셨던 교장선생님께서 8월 7, 8, 9일로 일정 조율을 잘하면 강원도로 2박 3일 수학여행을 다녀올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다. 그는 일정을 공지하고 가정통신문을 보냈다. 부푼 마음으로 그날을 기다렸는데 수학여행 전날 엄청난 비가 왔다. 수학여행을 갈지 아니면 미룰지를 고민하다가 그래도 가면 좋겠다는 쪽으로 의견수렴을 한 후 떠나게 되었다.

수학여행 둘째 날인 8일 일정은 오전에는 설악산 등정하고 오후에는 설악해수욕장 일정이 잡혔다. 키가 작은 나는 굽이 높은 신발을 신었다. 젊은 여선생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 뻘쭘했던지 수건 끝을 내어 주면서 한쪽 수건 끝을 잡고 쉽게 등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어떤 학생의 기억은 지금도 내 마음을 따스하게 한다. 덕분에 설악산 꼭대기에서 누렸던 그 기쁨과 환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숙소로 돌아와 점심 식사 후 설악해수욕장으로 향했다.

해수욕장 갈 때 가위, 바위, 보로 이긴 사람이 진사람 손목을 때리는 게임을 하게 되었는데 계속 내가 지는 바람에 손목이 뻘겋게 부어올랐다. 해수욕장에 도착해서 버스에서 수영복을 갈아입었다. 수영하고 파도타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파도에 쓸려 익사한 사람이 있다는 다급한 교장선생님의 목소리를 듣고 수영복을 입은 채 해안초소로 달려가 안내방송을 부탁했다.

학교 버스 옆에 모이라는 안내방송을 여러 차례 했지만 짧은 머리를 한 따스한 마음을 가진 그 학생이 보이지 않았다. 해경이 찾아와서 준비운동을 시켰는지, 안전교육은 시켰는지를 묻고는 뭔가 열심히 적으면서 녹취해 갔다. 해수욕장 주위에 그물을 쳐 놓았기에 시체가 유실될 염려는 없고 삼 일 후에 시체가 뜨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힘이 빠졌다. 그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만학도인 그 남학생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병으로 친정아버지께서도 하늘나라로 이사하셨다. 고비마다 인생의 쓰라림이 내면 깊숙이 자리 잡았다. 이후 한동안 젊음을 만끽하지 못하고 가슴앓이를 했다. 연이어 죽음을 체험하면서 나는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장례를 집에서 치르는 때였다. “아버지, 나는 누구 손잡고 예식장을 행진해?”라고 울던 나를 보고 동네 교회분들이 함께 많이 우셨다. 아버지를 그렇게 잃어버리고 일상으로 돌아가 학교에 출근했지만 시린 마음은 여전했다.

그 시절 옆 반에서 종례 시간이면 반가처럼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찬 이슬 맺힐 때에 일찍 일어나 해 돋는 아침부터 힘써서 일하라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는 찬송가를 부르게 하셨던 남자 담임선생님도 아련하게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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