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봄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 3월 첫날. 봄 마중을 하며 여행길에 나섰다. 배짱 맞은 남자 둘이서 2박 3일, 선택지는 충청도와 전북. 아산, 청양, 공주, 군산까지. 오는 길에 서천을 들렀다.
인천에서 만나 첫 번째 여행지는 아산 땅 '천년의숲길'이다. 아산 천년의숲길은 원래 송곡면 유곡리에서 강장리, 동화리, 궁평리를 걸치는 총 26.5km이다. 산과 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또 호숫가 길을 따라 조성된 길로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 곳이다.
우리는 그 중 봉곡사 주차장에서 봉곡사까지 소나무 숲길을 걷기로 했다. 짧은 길이지만 왕복 1시간 남짓. 호젓한 숲길을 쉬엄쉬엄 걷기에 딱 알맞은 거리다.
봉곡사 숲길은 말 그대로 천년을 지켜왔을까? 울창한 소나무숲이 우릴 반긴다. 어느 곳이든 소나무 숲은 사시사철 계절에 상관 없이 푸르러서 좋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는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소나무의 맑은 기운이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아직 봄날이라기엔 이른 듯싶다. 싸한 공기가 그렇다. 하지만, 빽빽이 들어찬 숲길이 참 편안하다. 솔향이 은은하게 퍼져오는 듯싶다. 하늘 향해 우뚝 서 있는 소나무가 장엄하고 기품이 있다. 잘났다 뽐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늘어서서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나무 사이사이 비추는 햇살이 여행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런데 아름드리 소나무 표정이 예사롭지가 않다. 소나무 밑동이 한결같이 V자 모양의 흉터가 나 있다.
어떤 사연이 있을까? 내용을 알고 보니, 일제강점기 때 패망을 앞둔 일제가 비행기 연료로 쓰기 위해 송진을 채취하려고 주민들을 동원하여 낸 상처란다. 일제가 저지른 일이 한둘이 아니지만, 이렇게 자연을 훼손하는 일까지 벌였다니! 그들의 만행에 부아가 치민다.
이리저리 뒤틀리고 온갖 풍상을 견디며 꿋꿋하게 자란 소나무들. 언뜻 봐선 입꼬리가 올라간 듯 보이지만, 쓰라린 역사의 상처라는 사실에 마음 한편 애잔한 아픔으로 다가온다.
봉곡사까지 한적한 숲길은 몽한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낮은 오르막길에 군데군데 쌓인 돌탑 또한 정겹다. 가볍게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따로 없다.
숲길 마지막 자락에 천년고찰 봉곡사가 자리 잡고 있다. 단청 없는 맞배지붕의 대웅전에서 때 묻지 않은 소박함이 느껴진다. 주변을 둘러치고 있는 대숲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숲 소리와 어디서 지저귀는 직박구리 소리가 적막한 사찰을 깨우는듯싶다. 화려하지 않고 절제된 소박함에 잠시 마음을 내려놓는다.
봉곡사는 신라 진성여왕 때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만공선사가 을미년에 법계성을 깨달아 '오도성(悟道頌)'을 읊어 유명한 성지로 전해지고 있다. 만공은 한국불교의 대선사로 일제강점기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산 쪽으로 샛길이 보이길래 올라가 보았다. 만공탑이다. 만공스님이 이곳에서 친히 돌을 깎아 만든 탑으로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친필이 새겨있다. 세계일화는 모두가 자기 자신의 잃어버린 마음을 찾을 때, 세계가 한 송이 꽃이 된다는 뜻이다.
만공선사의 오도송을 옮겨본다.
만공스님은 우주 만물 모든 것 안에는, '나'라고 할만한 주체나 실체가 없고, 모든 존재는 오직 인연 따라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사건이나 현상이라는 깨우침을 노래하고 있다.
만공스님의 오도송을 음미하며 다시 소나무숲길을 내려오는데, 어디서 딱따구리 소리가 경쾌하게 들린다. "딱딱 따다닥 따다닥 딱딱!" 자연이 들려주는 리듬이다.
딱따구리가 아직 늦잠을 자는 3월의 봄을 흔들어 깨우는듯싶다. 봄 봄 봄! 봄이 천천히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