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 김영옥·메이·이지은·전희경
- 채이현 / 자유기고가
“각자, 혼자 알아서 하는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의 짐이고, 또한 힘이다.”
보고 싶지 않고,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이 ‘나이 듦’과 ‘질병’이지 않을까? 덧붙이자면 그것이 나 혹은 가족의 이야기일 때 말이다. 왜 나이 드는 것과 질병, 그에 따른 돌봄은 ‘가족’의 이야기로 한정될까. 인간의 몸은 누구에게나 연약하고 취약한 것이라 모든 인류가 자신의 끝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라 보아도 무방할 텐데 이에 대한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다루지 못하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새벽 세 시’의 고통이란 아파 본 사람, 아픈 사람을 돌봐 본 사람들에게는 떠올리기 쉬운 것이다.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고통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시간, 누군가의 뒤척임에 자연스레 눈이 떠지는 시간이다. 젊고 건강할 때에는 세상과 나에 대한 창의성이 쏟아지는 별 같았던 시간대였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잃고 난 후의 새벽은 너무나 고독하다. 한 없이 길어지는 이 새벽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절망하고 세상을 등진다고 한다.
우리는 너무 쉽게 ‘건강한 몸’을 ‘정상’으로 여긴다. ‘젊은이’의 미래와 ‘노인’의 미래의 가치는 다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그 젊음도 언젠가는 곧 사라지게 될 것이고 결국에 누구나 늙고 병든다. 그 사실을 망각하고 아픈 이들을 외면하고자 애쓰는 것이 방어기제의 작동으로 가능하다고 해도 말이다. 태어나면서 현재까지 우리는 단 한 번도 혼자였던 적이 없다. 누군가의 돌봄 없이 사람은 생존 불가능한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건강한 몸을 통한 독립된 삶’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품는다. 그 외의 존재들을 ‘비정상’ 취급한다.
그랬던 우리가 ‘질병’ 혹은 ‘노년’을 맞이하는 순간 느끼는 좌절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비극이다. 나의 똥, 오줌을 누가 받아낼 것인가를 생각하는 일은 쉽지 않다. 가족에게는 너무나 큰 짐이 될 것 같고, 일면식도 없는 낯선 이를 믿고 몸을 맡기기는 두렵다. 가족은 이미 약해진 나의 몸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에 참여하고 있는데, 당연하게 돌봄까지 책임져야 하는 주체로 정해져버리는 것은 다소 잔인하다. 그렇다고 국가의 책임만을 외치는 것은 공허한데, 돌봄이란 것이 애초에 ‘관계’와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라는 제목이 붙은 이 책은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이 기획하고 김영옥, 메이, 이지은, 전희경이 썼다. ‘옥희살롱’은 위와 같은 문제를 사회적으로 ‘의제화’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연구소다. 시민의 권리로서 ‘돌봄’이라는 문제를 되돌아보고자 하는 앞선 논의들을 하고 있는 단체인 것 같다.
아픈 사람의 경험만큼이나 돌보는 사람의 경험도 중요하다. 돌보는 사람은 평범한 일상을 살 수 없다. 자신이 돌보는 사람의 질병이 얼마나 깊은 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24시간을 그에 맞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간병인의 대부분이 수면 부족을 호소하고, 자신의 시간이 의미 없이 지나가는 것에 대해 자조한다. 이 돌봄에 끝이 있기를 바라는 것은 죄책감을 수반한다. 이른바 ‘간병살인’이 일어나는 것도 이와 분명한 관련이 있다. 단순히 도덕적인 문제로 남겨둘 것이 아니다. 누가 누구를 돌볼 것인가, 어떻게 돌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노령화 사회에 들어선 우리에게 앞으로 더 큰 문제로 다가올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돌봄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다. 돌봄 비용의 사회적 책임을 함께 나누는 것이고, 아픈 이와 돌보는 이를 고립시키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다. 아픈 사람의 경험만큼이나 돌보는 사람의 경험을 축적시키고 드러내야 한다. 그래서 나의 생애 마지막을 단순히 ‘존엄사’, 즉 ‘안락사’에 의존하지 않고도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온전히 행사하다 떠날 수 있어야 한다. 요양보호사를 비롯한 간병인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 그로 인한 비인간적인 요양 환경, 가족 내 일원에게 떠넘겨지는 간병과 그로 인한 가족 내 갈등 문제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으려면 어떤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사실 정확한 답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누구나 마지막까지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은 알겠다. 사람이 삶을 포기하게 되는 때는 질병보다 더 무서운 무관심과 고립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모두의 얘기다. 나는 다를 것이라 생각하거나 혹은 우리 세대와 먼 얘기라고 넘겨짚지 말자. 그것으로부터 존엄한 삶에 대한 재정의가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