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代에 걸쳐 보존된 과거시험 답안지, 귀중한 실물자료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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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代에 걸쳐 보존된 과거시험 답안지, 귀중한 실물자료가 되다
  • 인천in
  • 승인 2023.06.01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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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남 인문학 12강을 듣다]
(4) 소남 문중과 과거 시험 - 심경호 고려대 특훈명예교수
[인천in]이 소남학회, 계양도서관과 함께 5월10일부터 9월20일까지 12차례에 걸쳐 계양도서관이 진행하는 '길위의 인문학' - 소남 윤동규를 탐구하는 인문학 강좌를 요약해 연재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의 수제자로 성호학파를 인천으로 확산시킨 소남을 통해 인천의 역사와 정신적 문화유산을 함께 탐구하며 인천 역사를 지평을 넓혀본다. 네번째 순서는 고려대 심경호 특훈명예교수의 '소남 문중과 과거 시험'이다.

 

 

시권(試券)은 과거 시험 답안지를 말한다. 소남 윤동규 종가에는 소남의 부친 윤취망(1675~1704)의 시권으로부터 시작해 손자 윤신, 증손자 윤극배, 이후 윤석구와 윤지수에 이르기까지 7대 2백년에 걸친 시권들이 보존되어 있다.

무엇보다 소남가에 실물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가 국가의 중요한 시험이었음에도 중국과 달리 조선에서는 시험지를 수험생이 직접 준비해 과거장으로 갔다. 과거 시험지에 대한 규격 등 정해진 것이 없어 시험지가 다 다르고, 이에 대한 기록은 물론 연구된 것도 없다. 크기·두께는 어떠하고, 어떤 재질인지, 한 페이지, 한 줄에 몇 글자나 들어있는지 실물을 보고 알 수 밖에 없는데, 소남가에 200년에 걸쳐 시권이 집적돼왔다는 것은 조선 후기 과제(科題, 과거 시험 제목)를 계년화(繫年化)하는데, 시대적 변화 등을 파악할 수 있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다.

과거가 폐해도 심했지만, 소남 종가가 소장하고 있는 시권은 사대부가의 자제들이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이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던 실상을 잘 보여준다. 조선후기의 사대부가는 자제들에게 가격(家格)을 유지하고 응시와 급제에 따른 이익을 기대하여 과거 공부를 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인력 수급의 문제로 과거가 높은 지위와 명성을 보증해주지는 않았지만, 과거는 관직 진출을 위한 유일한 제도였다.

계양도서관이 진행하는 '길위의 인문학' - 소남 윤동규 4번째 강좌가 ‘소남 문중과 과거 시험’을 주제로 31일 오후 7시 계양도서관에서 심경호 고려대 특훈명예교수의 강의로 열렸다. 강의 내용을 요약, 연재한다.

 

소남의 부친 윤취망의 시권. 과제는 각각 '논어의'와 '예의'다.
소남의 부친 윤취망의 시권. 과제는 각각 '논어의'와 '예의'다. 채점 결과, 붉은 글씨로 등급이 매겨져 있다.

 

윤취망은 25세(1699년, 숙종 25)에 중광시 생원에 3등(급) 27위(전체 입격자 100명 중 57위)로 입격(합격)했다. 답안지 「논어의(論語疑)」와 「예의(禮義)」가 전한다. 예의는 시험지 뒷면에 초서로 작성했다. 

과제  「논어의」는  논어 「헌문(憲問)에서 추출했다. 그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묻는다 : 공부자는 남에 대해서 남을 허여한 것이 드물다. 중궁(仲弓)과 계모(季路)는 성문(聖門)의 고제(高弟)이거늘 그 인(其仁)을 허여하지 않았다. 영윤자(令尹子)와 문진(文陳), 문자(文子)는 열국(列國)의 어진 대부이지만 역시 그 인을 허여하지 않았다. 유독 관중에 대해서는 ‘누가 그만큼 인한 사람이겠느냐, 누가 그만큼 인한 사람이겠느냐?’라고 했다. 그 인이란 것은 어떤 것인가?】

이에대한 윤취망의 시험 답안은 이러하다.

대답합니다. ()의 체()는 지극히 커서, 사람들이 능히 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가벼이 허여하신 적이 없습니다. (중략) 그러므로 중궁(仲弓)이 불명(不佞, 말재주가 없음)한 것과 자로(子路)가 치부(治賦)한 것은 덕에서 넉넉하다고 할 수 있고 그 재주가 있다고 할 수 있으나, 한 터럭의 잡스러움도 없다고 할 수 없어서 체가 온전한 인에는 미치지 못했으니 어찌 가벼이 허여할 수 있겠습니까? 영윤(令尹)이 마음을 다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문자(文子)가 제 몸을 깨끗하게 하여 난리를 피하여 떠나간 것은 충성스러운 것은 충성스럽고, 맑은 것은 맑지만, 이해(利害)를 생각하는 사사로움이 없지 않아서, 지극히 커다란 인에 대해서는 어두운 듯했으니, 역시 가벼이 허여할 수 있었겠는가? 관중의 경우는 이것과 다름이 있습니다. 주나라 왕실이 이미 쇠한 때를 당하여, 왕정의 기강이 해이한 것을 비통해 하여, 이적을 물리쳐 내쫓고, 병혁(兵革)의 위험을 이용하지 않고도 제후들을 규합하여, 인민들을 머리 풀어헤치는 풍속에서 면해 주었으므로 백성들이 지금에 이르도록 그의 은사를 받은 것이 많으니, 비록 체가 온전한 인이 아니라고는 하여도 그래도 남에게 미치는 은택이 있었습니다. 공부자가 그를 허여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의 경우 그 인을 허여하지 않은 것은 그 체의 온전함을 능히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고, 관중에 대해 특별히 그 인을 칭송한 것은 그의 이택이 남에게 미쳤기 때문입니다. ()의 도는 지극히 크므로, 성인이 아니면 능히 그럴 수 없으니, 그 불허한 이유는 절로 그러한 바가 있습니다. 비록 어진 사람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백성들이 그 은택을 입는다면 그 허여하는 것이 정말로 마땅합니다. 어떻게 그러한 줄을 밝히겠습니까? ()의 한가지 일과 한가지 능력으로 말한다면, 관중의 재주로도 이에 해당하기에 부족하되, 그 남에게 미친 은택의 면을 본다면 그래도 인자의 공적이 있습니다. 공부자가 허여한 것은 역시 이 때문입니다... (후략)

소남 윤동규의 장손 윤신(尹愼, 1738-1812)은 1793년 춘도기(春到記 - 성균관과 사학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이 출석 일수를 채운 뒤 봄에 보던 시험)에 「의상부열진염매표(擬商傅說進鹽梅表)」로 입격하여 장지(壯紙 두껍고 질기며 질이 좋은 종이) 2권을 수상했다.

 

1793년 춘도기 때 윤신의 시권. 次上(차상)의 점수를 받았다.
1793년 춘도기 때 윤신의 시권. 次上(차상)의 점수를 받았다.

 

1793년 춘도기의 표제(表題)는 『서경』 「열명(說命) 하」에 보면, 은나라 고종이 부열(傅說)에게 “그대는 짐의 뜻을 가르쳐서, 술과 단술을 만들면 그대가 누룩과 엿기름이 되고, 국의 간을 맞추면 그대가 소금과 매실이 되어 다오.[爾惟訓于朕志, 若作酒醴, 爾惟麴糱, 若作和羹, 爾惟鹽梅]”라고 한데서 나온 것이었다. 정조가 친히 시권의 등급을 매겼다.

윤신은 1787  취면불한양류풍부(吹面不寒楊柳風賦)에서 二中을, 1788 춘수선여천상좌부(春水船如天上坐賦)三上, 1790 용호방부(龍虎榜賦)三下를, 1790 삼주화불주부(三周華不注賦)에서 三上을 받는 등 전해진 그의 시권만 17권이다.

시권의 등급은 9등 내지 12등급이 있으며, 일지상(一之上)·중(中)·하(下), 이지상(二之上)·중·하, 삼지상(三之上)·중·하, 차상(次上)·차중(次中)·차하(次下), 갱(更)·불(不) 등으로 표시했다. 

 

윤신의 시권 「춘수선여천상좌부」. 시권의 점수(위, 三上)는 대개 붉은 글씨로 기록하였다.

 

윤극배(1777년 생)는 윤신의 아들로, 윤동규의 증손이다. 34세 되던 1810년(순조 10) 경오 식년시에서 진사 2등 18위(입격자 100명 중 23위)로 입격하고 1825년(순조 25) 을유 식년시에 병과(丙科) 31위로 합격했다. 

1823년, 47세의 윤극배는 진사로서 문과에 응시하여 질경덕부(疾敬德賦)로 삼하(三下)의 성적을 받았다. 30(30) 형식이다.

 

윤극배의 시권. 시경 「대아(大雅) 권아(卷阿)」의 “봉황이 훨훨 날아, 날개 깃을 탁탁 치며... 오동나무가 자라니...[鳳凰于飛 翽翽其羽... 梧桐生矣, 于彼朝陽...]”에서 나왔다.

 

윤석구(尹石求)는 1837년에 태어났다. 1885(고종 22) 증광시(增廣試) 진사시에 338위로 입격했다. 1865(고종 2) 27세에 기일갑을의(其日甲乙義)를 작성해서 차하(次下)를 받았다. 1885(고종 22, 을유) ‘왕세자(王世子) 진후(疹候) 평복(平復)’ 축하의 의미로 시행된 을유 증광 감시의 과시(科詩)에서 윤석구는 차하(次下)331인으로 입격했다.

소남의 종손 윤지수(尹芝秀)는 윤극배의 증손, 윤석구의 아들이다. 종손 윤형진의 증조다. 과거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가 폐지되어 입장의 기회를 잃었다. 앞서 윤지수는 1888 大殿大王大妃殿·王大妃殿·中宮殿加上尊號慶科文科別試에서 사도책(師道策)을 작성했다.

29세의 윤지수는 1891년에는 진사시에 응시하여 과시 행지택의탄호기무우어하시(行志擇誼坦乎其無憂於下詩)를 제술했다

 

 

<윤동규 집안의 시권 목록>

번호

科題

赴擧製述人

科場應製改設日 成績

科種

비고

01

-1

논어의(論語疑)

윤취망(尹就望)1675년생 25

1699년 생원시

정리번호 九金

등급 三之二十七

숙종 25(1699) 기묘(己卯) 증광시 생원 327(57·100)[15225370]

시험일 1699917. 방방일 16991003

01

-2

예의(禮義)

윤취망(尹就望)

 

 

 

02

옥진부(玉振賦)

윤신(尹愼) 幼學

1767(영조 43) 4

정리번호 一宇

 

泮長[대사성] 洪樂仁

03

이풍명동부(以風鳴冬賦)

윤신(尹愼)

1767(영조 43) 4合製

정리번호 一玄

 

泮長 洪樂仁

04

전전중홍심부(箭箭中紅心賦)

윤신(尹愼) 幼學

정리번호 九玄

등급 三下

(御考)

 

05

관자오육인동자육칠인부(冠者五六人童子六七人賦)

윤신(尹愼) 幼學

정리번호 八宙

御考

 

06

차기화부(此奇貨賦)

윤신(尹愼) 幼學

정리번호

 

敎授 李得一

07

일장여소년부(日長如少年賦)

윤신(尹愼) 幼學

정리번호

 

 

08

策士策

윤신(尹愼)

1773(계사) 試券

회시 초장 318, 종장 320, 출방 322. 방방 윤3월 초8.

정리번호 亦往

등급 三之二十一

癸巳二月二十四日終場 (한성시 종장인 듯)

 

09

취면불한양류풍부(吹面不寒楊柳風賦)

윤신(尹愼) 幼學

1787(정조 11, 정미) 127(병신)

[] 九地

등급 二中

 

御貫

 

10

춘수선여천상좌부(春水船如天上坐賦)

윤신(尹愼)

1788(정조 12) 39(신미), 성균관 유생으로서 응제

등급 三上

 

 

11

공인야부(功人也賦)

윤신(尹愼)

1788(정조 12, 무신) 39(신미)

정리번호 三木

등급 三下

 

 

12

용호방부(龍虎榜賦)

윤신(尹愼)

1790(경술, 정조 14) 928春塘臺 親臨試士

 

 

13

삼주화불주부(三周華不注賦)

윤신(尹愼)

1790(경술, 정조 14) 12월 초5

應製在泮村製進. 其翌日榜出, 居第二 [三上] 御考

 

 

14

힐기기무풍지대영시부(頡利起舞馮智戴詠詩賦)

윤신(尹愼)

1790(정조 14, 경술) 126. 限日 應製. 入格人更試于殿庭. 翌日榜出, 又居第二日.

 

命入侍.又命給二分.

15

연퇴환근사록부(筵退還近思錄賦)

윤신(尹愼)

1791(신해) 식년시 초시. 819初場 一所

 

 

16

의상부열진염매표(擬商傅說進鹽梅表)

윤신(尹愼)

1793(계축) 28春到記. 釋菜 後 試士

 

命官 提學李象鼎.

頒賞壯紙二卷. 命入侍.

17

개인운부(盖麟云賦)

윤신(尹愼)

1794(갑인) 819監試一所初場

정리번호 九洪

등급 三之七十二

 

 

18

지급인수책(知及仁守策)

윤신(尹愼)

1794(갑인) 821監試一所終場

 

 

19

봉황오동이비편자내집시(鳳凰梧桐以比賢者來集詩)

윤극배(尹克培)幼學 1777년생, 34

1810(순조 10) 경오(庚午) 식년시 시권

정리번호 八列

[진사] 218(23·100)

 

20

낭묘지하조정지중고문대책용사마상여시(廊廟之下朝廷之中高文大冊用司馬相如詩)

 

윤극배(尹克培)

 

1810(순조 10) 경오(庚午) 식년시 시권

정리번호 七辰

[진사] 218(23·100)

 

21

질경덕부(疾敬德賦)

윤극배(尹克培) 進士 47

1823(순조 25) 을유(乙酉) 식년시 시권

정리번호 一天

등급 三下

[문과] 병과(丙科) 31(41·48)

 

22

예의(禮義) 기일갑을(其日甲乙)

윤석구(尹石求) 幼學 27

1865. 甲子 식년 감시(監試) 乙丑 212退設. 二所.

정리번호 十宿

등급 次下

 

 

23

예장어행서장어정시장어풍악장어화시(禮長於行書長於政詩長於風樂長於和詩)

윤석구(尹石求)

進士試 三等第三十一人

乙酉增廣監試會試 七月二十七日初場. 二十九日終場. 八月初一日 出榜, 八月二十日 放榜.

등급 次下.

 

 

24

사도책(師道策)

윤지수(尹芝秀)

1888大殿中宮殿加上尊號慶科文科別試. 戊子五月十三日初場, 十五日終場. 同月十八日出榜.

一所 新營

二所 丕闡堂

三所 明倫堂

전사본. 오자가 자구 오류.

25

행지택의탄호기무우어하시(行志擇誼坦乎其無憂於下詩)

윤지수(尹芝秀) 幼學 29居鴻山

辛卯 86初場, 8終場. 二所

一所:明倫堂 二所:丕闡堂. 二所 行志擇誼坦乎其無憂於下, 惟其宜可焉, 是謂大同,

問忠恕之道

10出榜.

26

의황제군신하작주거이제불통표(擬黃帝羣臣賀作舟車以濟不通表)

윤항수(尹恒秀) 幼學 24

1888四殿加上尊號後慶科別試初試罷榜後更設, 戊子七月二十六日初場, 二十八日終場. 賦表策

一所 新營

二所 丕闡堂

三所 明倫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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