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덕후질, 인천 스토리에 새로운 밑줄 ‘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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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덕후질, 인천 스토리에 새로운 밑줄 ‘쫙’
  • 유동현
  • 승인 2024.07.08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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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45) 인천 사진 수집가 김식만 치과 원장 – 유동현 / 전 인천시립박물관장
인천시립박물관 전시실에서 김민식
김식만 원장, 인천시립박물관 전시실에서 

 

최근 일제강점기 일본군 무기공장이었던 부평 조병창의 병원 건물이 일부 존치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건물은 일제 침략과 강제동원의 증거물이다. 보존과 철거의 갈림길에 섰던 건축물이 일부나마 살아남게 되었다. 원래 일제강점기에는 길쭉한 이층 벽돌조 건물 형태였다. 6.25 전쟁 때 건물 중앙부가 폭격으로 훼손되었다. 미군이 주둔한 후 파괴된 가운데를 없애고 양쪽 건물을 분리해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

그 ‘원래’의 모양이 궁금했다. 그 궁금증을 한방에 풀어준 사진 한 장이 있다. 그 사진을 진즉에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사람이 있다. 남구(현 미추홀구) 용현동에서 김식만치과의원을 운영하던 김식만 원장이다.

2010년 6월 11일, 그의 블로그에 ‘깜놀’할만한 컬러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1948년 11월 부평 전경, Norb-Faye 씨께서 촬영하신 것입니다’라는 설명이 붙었다.

미군이 점령한 후의 사진이었지만 미군의 ‘애스컴’이라기 보다는 여전히 일제의 ‘조병창’ 모습이었다. 아직 6.25 전쟁의 포탄을 한 발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미쓰비시 줄사택’들도 온전하게 남아 있고 우뚝 솟은 계양산 아래로 각 부대들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한가운데에 하얀색 커다란 건물이 길게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그 문제의 ‘원래’ 조병창 병원 건물이다. 처음 보는 사진이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948년 11월 Norb-Faye 가 찍은 부평 애스컴 전경
1948년 11월 Norb-Faye 가 찍은 부평 애스컴 전경

 

2010년 5월 3일 13:30 / 인천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사진을 올려 보려고 합니다. 아는 것이 많아서 블로그를 시작한 것이 아니고 블로그를 운영하면 아는 것이 많아질까 해서 시작합니다.

 

14년 전, 김식만 원장은 ‘kkkk8155’라는 닉네임으로 ‘인천의 어제와 오늘’이란 블로그를 개설했다. 오덕후(오타쿠)의 길로 가는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블로그 타입은 아주 단순했다. 사진 올리고 그 밑에 자신의 견해를 글로 썼다. 거의 매일 인천의 옛 사진들이 올라왔다.

Homer Williams, Royce Raven, Ottamar, Jerry Clark, Nowell, Dway Mclean…. 그의 블로그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이름들이다. 인천에 근무했던 미군들이다. 그들이 찍었던 사진들이 김식만 원장의 ‘덕후질’ 덕분에 우리 곁에 속속 도착했다. 그 사진들은 인천의 역사를 재조명하거나 고쳐 써야 할 만큼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았다.

 

콜라텍 때문에 얻은 ‘부캐’

그가 인천의 ‘과거’가 궁금해진 계기는 주인선(주안역-인천역)의 철폐였다. 치과의원 옆에 있던 주인선이 어느 날 운행을 멈추고 철길이 뜯겨 나갔다. 있을 땐 몰랐는데 막상 사라지고 나니 한 시대를 관통했던 역사가 소멸했다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무관심했던 것에 왠지 자책감마저 들었다.

아직 남은 철길, 수인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관련 자료와 사진을 모으면서 자연스럽게 인천지역의 다양한 ‘흔적’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3년 동안 모은 자료가 어느 정도 쌓이자 블로그를 개설했다. 자료 모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현장 답사를 시작했다.

그는 오후 1시가 되면 치과 진료를 끝냈다. 바로 위층에 성인 콜라텍이 있었는데 문을 여는 시간이 오후 1시였다. “돌리고 돌리고… 띵까띵까” 위층에서 나는 소음이 만만치 않았다. 핑계 낌에 일찍 문을 닫고 ‘출사’에 나섰다. 그때부터 요즘 젊은이들 표현대로라면 본캐는 치과의사, 부캐는 ‘인천사진수집가’가 되었다.

“옛 철길을 걷다가 보면 근처에 뭐가 있었는지 궁금하더군요. 인터넷 사이트를 찾아 돌아다니다 보니 다른 사진들도 덤으로 찾게 됐습니다.” 그는 인천의 ‘과거’를 찾다가 ‘현재’를 알게 되었다.

 

진료 모습. 진료는 오후 1시까지다
진료 모습. 진료는 오후 1시까지다

 

위아래 6대가 인천에 뿌리를 둔 토박이

그는 1950년 1월 송림동 209번지 수도국산 기슭에서 태어났다. 4학년 때까지 그곳에 살다가 송학동 3가 4번지, 옛 제 2시민관(무덕관) 옆으로 이사 가서 대학 2학년 때까지 살았다. 당시 중심지에 거주한 덕분에 그때 인천의 많은 것을 보며 머릿속에 자동 아카이빙이 되었다.

다시 내동으로 이사해 잠시 살다가 주안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때 입주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서울에 살았다. 81년 5월 인천 용현동에 치과의원 개업을 했고 신혼집은 선화동에 마련했다. 이후 신흥동 삼익아파트, 간석주공아파트, 주안쌍용아파트로 옮겼다. 관교동 아파트에서 21년 살다가 지금은 송도국제도시에 살고 있다.

송림초, 인천중, 제물포고(12회)를 거쳐 서울치대를 나온 김식만 원장은 동구 화평동 350번지가 본적이다. 자신의 손주들까지 6대가 모두 인천에 거주하고 있는 뼛속 깊은 토박이다.

그의 부친은 한때 인천에서 유명했던 ‘항도교통’을 동업했다. 나중에 작은 버스인 합승 한 대(차 번호 경기 73)로 독립해서 사업을 하다가 그야말로 ‘쫄딱’ 망했다. 그 여파로 성장기에 이삿짐을 자주 쌀 수밖에 없었다.

 

“학술적으로 서술한 것은 이미 책 속에 많이 있더군요. 그걸 그대로 옮겨 쓰는 게 싫었고 제가 본 것,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책 보고 공부한 사람과 실제로 거기서 살며 몸소 경험했던 사람은 분명히 다르죠.”

 

공간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뚜벅이

그는 송림국교를 다니다가 4학년 때 송학동으로 이사 갔다. 전학 가지 않고 그대로 송림을 다녔다. 어린애 걸음으로 멀고 먼 등·하교 길을 한 코스로만 다니지 않았다. 세 가지 코스가 있었다. 첫째, 집에서 나와 재판소(법원) 뒷골목, 유항렬 씨 집 뒷골목, 경인면옥 옆 골목을 나오면 경동4거리가 나온다. 거기서 싸리재, 배다리, (옛)국민은행 옆 골목, 보신탕 골목을 나와 송림학교 정문으로 가는 방법.

두 번째는 집에서 내동 성공회 쪽으로 올라가서 성공회 서쪽 골목을 내려 축현학교 앞을 지나 동인천역, 채미전 거리, 배다리…이하 동일. 세 번째는 집에서 나와 홍예문, 인천여고, 화평교, 송현시장을 거쳐 학교로 가는 방법이 있었다. 등교할 때는 가장 빠른 첫 번째 코스를 택했고 하교 시에는 급할 것이 없으니 여기저기로 다녔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지도책을 끼고 살았다. 산의 위치와 높이를 한번 보면 머릿속에 쏙쏙 들어왔다. 지금도 전국의 산을 높은 산 순서대로 줄줄이 외운다. 무작정 걸어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공간에 대한 호기심이 그를 일찍부터 뚜벅이로 만들었다.

호기심과 걷기는 성년이 되어서도 이어졌다. 대학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지금의 서구 신현동 쪽에서 율도와 연결되는 제방길이 생겼다. 그는 율도에 발전소 공사 현장을 구경하고 싶었다.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 곳이었다. 공사장 인부들의 출퇴근 버스가 일정 시간 뚝길을 통해 공사장까지 가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인부인 척하고 버스를 타고 섬 공사장으로 들어갔다. 정신없이 구경하다 섬에서 나오는 막차를 놓쳤다. 달조차 뜨지 않았던 캄캄한 밤, 육지까지 걸어서 나왔다. 제방이 일직선이 아니고 한번 꺾어져 굉장히 먼 거리로 느껴졌다.

 

진료실에서 틈나는 대로 ‘인천’을 찾아내던 김 원장
진료실에서 틈나는 대로 ‘인천’을 찾아내던 김 원장

 

그림자 하나 놓치지 않는 필살기 ‘판독’

자료들은 인터넷, 잡지, 책 등을 뒤져서 모았다. 한국 사이트는 물론, 일본과 미국의 사이트까지, 관련한 인터넷 사이트란 사이트는 모조리 뒤졌다. 때론 이베이나 옥션 등 경매 사이트도 기웃거렸다. 미추홀도서관, 화도진도서관 향토 자료실 등을 제집처럼 들락거렸다. 주요 신문 영인본은 물론 1964년 발행 한국대관, 1973년 발간 삼중당의 ‘한국의 여행’ 등 곰팡이 내 풀풀 나는 책에서 ‘인천’을 찾아냈다.

역사학계 등 지역 학계에서 전쟁 통에 부서졌다는 게 정설로 여겼던 건축물들이 1950년대 말 찍힌 사진에 버젓이 나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6.25 전쟁 때 소실된 문화재급 건물보다 그 후에 없어진 것이 훨씬 많습니다. 흔히 폭격으로 없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 초기 내동 성공회 건물은 전쟁 전 이미 없어졌고 존스톤 별장(인천각), 이것도 조금 손보면 사용이 가능한 상태였습니다. 대불호텔, 러시아영사관, 조선상업은행, 미두취인소, 남선교사숙소, 오례당집, 제2시민관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건물이 전쟁과는 상관없이 사라졌습니다. 딱한 일이지요. 먹고살기가 힘들던 시절이니 이해가 되긴 합니다만…”

 

그의 필살기는 ‘판독’이다. 그저 옛 사진을 모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판독에 매진했다. 사진 속 희미하게 보이는 산이나 건물 그리고 나무의 모양, 심지어 그림자 위치까지 해독의 단초가 되었다. 인천시에서 제공한 60년대 항공사진 1천여 장을 스캔하기도 했다. 그의 판독과 해설은 낡은 사진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2014년 3월 26일, 그의 블로그에 눈길을 끄는 흑백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어린 시절의 박근혜 대통령 사진을 보고’라는 제목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어린 시절 사진인데… 이곳이 어디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더군요. 제가 보기에는 인천 송도해수욕장으로 보였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모습으로는 10살 전후로 보이고… 박근혜 대통령은 1952년 2월생이니… 그래서 비슷한 시기인 1963년 송도해수욕장을 촬영한 최성연 선생님의 사진을 훑어보았습니다.

1963년 최성연 선생의 사진의 오른편 위에 화장실이 보입니다. 화장실 뒤로는 미루나무들이 서 있는 것이 보이고 그 너머에 보트장이 보입니다. 박 대통령의 사진에서도 이 화장실과 미루나무들이 보입니다. 화장실이 정면과 왼편 쪽이 약간 보이는 것을 감안하면 어린 시절 박근혜 대통령은 사진 왼편 아래에서 물놀이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의 블로그에 포스팅된 송도유원지와 어린 박근혜 모습
그의 블로그에 포스팅된 송도유원지와 어린 박근혜 모습

 

그의 블로그는 중독성이 있다. 아직 못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 필자도 그의 블로그에 들어갔다가 날밤을 새운 적이 몇 번 있다. 직접 살아보지 못했던 인천의 시간과 공간을 담은 사진들을 쫓다 보면 어슴푸레 창이 밝아왔다. 어떤 포스팅은 한편의 재미있는 단편 영화를 보는 듯했다. 수인선의 ‘남동역’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제가 남동역을 이용한 것은 딱 한 번입니다. 중학교 2학년인가 3학년 때로 기억이 납니다. 1963년 아니면 1964년이 되겠습니다. 친구 아버지께서 낚시 가게를 하셨는데 어느 여름날 남동저수지에서 낚시대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친구가 같이 가자고 하기에 낚시를 하는 줄 알고 좋아라 하고 쫓아갔는데… 아, 글쎄 심판을 봐야 한다는 겁니다. 게다가 짐까지 짊어지고 대회장까지 나르는 포터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낚시대회 대어상 상품은 금반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금반지에 눈이 어두워 미리 잡아 놓은 대어를 현지 주민들에게 몰래 구입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봅니다. 그래서 친구 아버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사람이 있는 가 잘 살피라는, 즉 부심을 맡긴 것입니다. 그러니 저희는 낚시도 못하고 자리도 못 뜨고… 하루 종일 땡볕에 벌을 섰지요.

저녁이 되어서 시상을 마치고 저수지에서 역까지 한참을 걸어서 기차를 타고 남인천역에 도착하였습니다. 속으로 친구 녀석을 많이 원망하였지요. 괜히 사람을 불러내어 고생을 시킨다고… 그런데 그것이 유일한 남동역을 출입한 경험이니, 그래서 그 당시의 남동염전과 그 주변에 대해 가타부타 말할 수 있게 되었으니 오히려 지금에 와서는 감사하게 생각되는군요.

당시 가장 인상적이었던 기억은 저수지 가에 앉아서 보았던 결핵요양소, 즉 지금의 적십자병원입니다. 저수지 너머 멀리 숲 가운데 아늑히 자리 잡은 기다랗게 생긴 하얀 2층 건물이 지금까지도 생생합니다. ‘야, 병이 저절로 낫겠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화롭고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숨고는 ‘숨은 고수’의 준말이다. 요즘 전문가 매칭서비스 플랫폼 ‘숨고’ 사이트가 뜨고 있다. 김식만 원장은 ‘숨고’다. 그의 블로그를 보고 옛 추억, 특히 자신이 살았던 동네를 더 알고 싶은 이들, 심지어 역사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도 조용히 그를 찾는 일이 잦았다.

2020년 인천광역시립박물관에서 사진전 <보조끼 데죠 1908 : 헝가리 의사가 본 제물포>가 열렸다. 보조끼 데죠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의관으로 1908년 제물포항에 들어왔다. 그는 인천의 이곳저곳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30여 장의 희귀 사진이 박물관에 입수되었다. 바로 특별전을 준비했다. 담당 학예사는 몇 장의 사진 판독에 애를 먹었다. 찍은 장소를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용현동 치과의원을 찾았다. 김식만 원장은 100여 년 전의 제물포 거리를 보조끼 데죠와 함께 1908년에 제작된 인천시가지 지도를 들고 걸어 다니며 ‘해독(解讀)’했다.

 

배를 타고 인천에 도착하셨을 때는 누군가 부두에 마중을 나왔을 것이고 이 분이 오스트리아 항가리 제국 사람이었으니 독일계 회사인 세창양행에서 마중을 나오지 않았겠나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부두에서 세창양행 사무실을 들렀을 것으로 보이는데 위 사진의 길 오른편에 세창양행 사무실이 있으며 그림자가 오후 늦은 때로 보입니다. 숙소인 세창양행 사택으로 가는 길은 사진에 보이는 계단 위쪽이니 배에서 내려 세창양행 사무실을 들렀다가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숙소로 가는 길에 이 사진을 촬영하였다고 나름 생각해 보는 것이지요.(중략)

터진개를 지나 일본 신사 쪽으로 가다가 팔판루에 들러 차를 마셨든가 아니면 점심식사를 한 후 계속 직진하여 시키시마 유곽을 구경하였던 것으로 봅니다. 유곽을 구경하고 되돌아오는 길에 지금의 인천여상과 송도중학교 사잇길을 지나다 이 사진을 촬영하셨을 것으로 봅니다. 아니면 팔판루에서 유곽을 향하다가 촬영하였을 수도 있겠습니다. 미야마치(신생동) 거리에서 북쪽으로 꺾어 들어가서 지금의 답동 로타리 근처에서 이 사진을 촬영하시고 계속 북진하여 또다시 이 사진을 촬영하신 것으로 봅니다.(하략)

 

삼인성호(三人成虎). 세 사람이 짜면 거리에 범이 나온다는 말이다. 근거 없는 말도 여럿이 하면 곧이듣게 됨을 이르는 말이다. 그가 자료를 모으고 분석하다 보니 지역에서 발간된 책 특히 인터넷상에 ‘삼인성호’가 적지 않았다. 어떤 건 아예 소설이었다.

그는 전문가들의 눈에는 아웃사이더 비주류다. 비주류가 ‘인싸’ 주류들에게 이건 잘못 전해졌고 저건 수정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되돌아오는 반응은 냉담 그 자체였다. 속 좁은 아집과 못된 관습의 결과다. 그가 대표적으로 꼽는 삼인성호의 예가 있다.

북인천IC에서 영종대교를 건너 인천국제공항을 향해 가다 보면 다리가 섬에 걸쳐 있다. 그 섬이 운염도(雲廉島)이다. 김식만 원장은 이 섬의 이름이 잘못되었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블로그에 1916년 지도를 올려놨다. 한자로도 그렇고 일본어로도 ‘운겸도(雲兼島)’라고 표기가 되어 있다. 1957년 미군이 사용하던 지도 한 장을 더 올렸다. 한문도 영문도 모두 ‘운겸도’로 써 있다. 겸(兼)을 염(廉)으로 오독(誤讀) 내지는 오기(誤記)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졸지에 ‘운겸’이는 ‘운염’이가 되어 어언 60년이 지났다. 지금이라도 원래 이름을 찾아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다시 별을 쫓는 ‘수도곡산’ 아이

현재 그의 블로그는 멈춰 있다. 2023년 6월 3일 이후 한 개의 포스팅도 올라 오지 않고 있다. ‘인천의 어제와 오늘’에는 모두 976개의 글이 올라와 있다. 포스팅 1천 개를 목전에 두고 스톱했다. 1981년부터 한 자리에서 운영했던 치과의원도 지난 3월에 문을 닫았다.

 

진료실에 걸렸던 가족 사진
진료실에 걸렸던 가족 사진

 

이제 그는 치과용 핀셋 대신 망원경을 손에 쥐었다. 더 이상 환자의 입속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대신 그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깜깜한 밤의 별을 쫓으며 다닌다. 어렸을 적 한밤중에 수도곡산 언덕(그는 수도국산을 이렇게 발음한다. 필자도 그렇다)에 올라 별을 관측하는 것을 좋아했다. 축현학교 담장에 늘어선 고물상에서 부속품을 사다가 천체용 망원경을 조립해 만들었다.

그는 몇 년 전 하와이 여행 중에 보았던 안드로메다와 페가수스 별자리를 잊을 수가 없다. 이번 기사 인터뷰를 위해 전화했을 때 그는 부인과 함께 일본 여행 중이었다. 도야마현 다테야마 산 위에서 쏟아지는 은하수를 보고 돌아왔다.

현재 그의 컴퓨터에는 약 5만 장의 인천 사진이 저장돼 있다. 블로그를 통해 절반을 공개했다. 필자의 느낌으로는 (당분간) 나머지 사진은 그대로 그의 컴퓨터에 보관돼 있을 듯하다. ‘인천의 어제와 오늘’이 다시 가동되면 어쩌면 우리는 그 블로그에서 밤하늘의 별들을 실컷 볼지도 모른다. 그 속에 그가 처음 발견해 ‘인천’이란 이름을 붙인 별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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