얕은 관계와 깊은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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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은 관계와 깊은 관계
  • 최원영
  • 승인 2024.09.19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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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영의 책갈피] 제174화

 

인격이 잘 갖춰져 있으면 배려하는 태도가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배려는 사랑하는 마음이 겉으로 드러난 모습입니다. 상대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결코 배려가 나오지 않습니다. 배려는 특히 상대가 고통스러워할 때나 절망의 나락에 떨어졌을 때 가장 빛납니다.

안기순 씨는 원자력병원에서 호스피스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암으로 인해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들을 보살피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분의 책인 《후회 없는 삶을 위한 23가지 이야기》에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중 하나를 전해드립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극단적인 상황이다. 그 상황을 매일 겪다 보니 극단적인 경우도 많이 본다. 그럴 때면 인간은 참 악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60대 초반의 이혼남이 있었다. 환자가 아닌 여동생이 호스피스를 원했다. 교회에 다니는 여동생이 임종이 다가오는 오빠가 예수를 영접하길 원했던 것이다. 이미 까다로운 환자로 소문난 터라 나도 긴장했다. 아침에 가보니 자고 있었다. 침상 주변을 정리하는 중에 잠에서 깨어난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여동생의 부탁으로 왔다고 하자 더 화를 냈다. 동생이 왜 그랬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종교를 강요하는 것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뜻했으니까.

그가 벨을 눌러 간호사 불렀다. 처음엔 날 쫓아내려고 그러는지 알았는데, 간호사에게 화풀이를 했다.

“왜 진통제를 안 놔주는 거요. 지금 이렇게 아픈데. 빨리 놔줘요.”

진통제를 주사한 후에도 통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조금 진정된 것을 안 다음 내가 이렇게 말했다.

“뜨거운 핫팩 갖다 드릴까요?”

다행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통이 가라앉은 후 그의 손을 잡아주자 그가 말을 했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그가 드디어 입을 연 것이다. 나는 그가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으면 별 것 아닌 내 말에 그렇게 쉽게 마음을 열었을까를 생각했다.

“내가 젊었을 때 중동에 갔었어. 마누라, 자식들 먹여 살리려고 모래바람 맞아가며 돈 벌어 부쳐줬지. 내가 한눈 한번 판 적 없이 죽으나 사나 내 가족만 보며 살았지. 그런데 지금 내가 아프니까 이혼을 하재. 그래서 내가 도장 찍어줬어.”

억울함, 원망, 외로움, 배신감, 복수, 분노. 이 모든 감정을 그가 느꼈을 거다. 혼자 죽어야 한다는 두려움도 깊었을 거다. 이 감정들은 사람을 더 힘들게 한다. 일방적으로 버림받았다는 것 때문에 속내를 털어놓기 힘들었을 것이다. 차라리 낯선 사람이 낫다. 그래서 내게 말했을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수십 년 함께 산 사람을 말이다. 내 아이 아빠를 나는 그렇게 버릴 수 있을까?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혹시 그가 돈만 벌어다 줄뿐 가정에는 무관심하지 않았을까? 따뜻한 말 한마디 없는 남편, 늘 아내에게 명령만 하던 남편은 아니었을까? 분명 어떤 빌미는 제공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부 중 하나가 암에 걸린 후 가정이 깨지는 걸 종종 본다. 그런데 정말 배신의 원인이 병일 뿐일까? 경제적 문제로 깨진 이혼의 원인이 생활고가 아니듯, 암 역시도 가정파탄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건 단지 하나의 계기일 뿐 이미 금이 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는 곧 각자의 인생이다. 그래서 그의 인간관계를 보면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다. 힘들 때나 어려울 때나 늘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진짜 인간관계가 아닐까. 사람을 ‘얕게’ 많이 사귀는 것보다 깊이 사귀는 게 중요하다. 그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깊은 관계’를 만드는 기본이지 않을까.

이 글을 읽으면서 저는 저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한 사람 한 사람씩 떠올려보면서 물었습니다.

‘우리의 관계는 얕은 관계일까, 깊은 관계일까?’

이렇게 묻는 순간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머리가 무거워졌습니다. 미안했습니다. 저와 함께했던 많은 사람과 가족이 제가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제 곁에 머물러주시고 계신 점들이 너무나도 고마웠습니다. 이제부터라도 그들을 더 귀하게 배려하며 살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그래서 얕아진 관계를 깊고 깊은 관계로 만들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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