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은 백범 김구 경호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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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은 백범 김구 경호원이었다"
  • 이장열
  • 승인 2012.08.15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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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대외비 문서에서 밝혀져 - 인천시는 백범과 죽산 함께 '헌양'해야
백범 김구(1876-1949)죽산 조봉암(1989-1959)
인천 강화에서 태어난 죽산 조봉암(1898-1959)이 1921년 당시 중국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 백범 김구(1876-1949)의 경호원이었다는 문서가 발견됐다.
 
이 문서는 1921년 4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발행한 '상해 재주 불령 조선인의 상황'이다. 고경(高警) 제13706호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1919년 4월부터 수집한 첩보를 수록한 대외비 문서다.
 
이 비밀문서는 일본내각 총리대신, 각 성 대신, 척식국장관, 경시총감, 관동장관, 관동군사령관, 조선군사령관, 조선군 양사단장, 조선군헌병대사령관, 조선요항부(要港部)사령관, 각 법원장, 각 검사장, 검사정, 봉천, 길림, 하얼빈, 천진,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간도 총영사, 안동, 철령, 장춘 영사, 경무국 각지 파견원, 북경공사관일본경찰서장에게 발송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일본의 주요 기관에 모두 배포된 점을 미루어 짐작하면 이 비밀문서는 정보 정확도가 높은 자료인 셈이다.
 
이 비밀문서 앞머리에는 직원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임시대통령 이승만, 경무국 국장 김구, 경호부장 여준근, 경호원 조봉암을 포함한 7명의 이름이 수록됐다.
 
자료를 보면 1921년 당시 백범 김구 선생은 44세였고, 죽산은 23세 때다. 죽산은 1919년 기미만세의거로 1년간 경성감옥에서 복역한 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곧장 상해로 들어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 소속 경호원으로 백범을 가까이에서 경호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비밀문서가 일본 제국주의 중심 기관에 모두 보내졌을 만큼 당시 상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제의 눈에 가시였다.
 
1921년 당시 임시정부에서 백범의 투쟁노선은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는 것이었다. 무력투쟁도 포함됐다. 국제외교로서 조국 독립을 해야 한다는 이승만과 노선투쟁이 있었던 것은 알려진 바다.
 
결국 백범 김구는 일제의 비밀경찰과 비밀정보원들의 암살 위협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백범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임무는 임시정부의 한 축을 보호하는 매우 중요한 독립운동의 일환이기에 건강한 몸과 담백한 기백을 지닌 이들로 경호원으로 뽑았다.  
 
이 비밀문서는 1921년 상해에 들어간 열혈 청년 23세의 죽산 조봉암이 1년 넘게 백범 김구 경호원으로서 첫 인연을 맺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1921년 백범 경호원이었던 죽산의 인연이 현재 인천에서 이어지고 있다. 서울 효창공원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백범 동상을 인천시민들의 모금으로 세웠던 '인천의 저력'이 단적인 예다. 백범 동상이 인천에 세워진 게 느닷없는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 비밀문서는 백범과 죽산을 한 데 묶는 '헌양 사업'에 작은 고리를 마련했고 집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김구 선생 헌양 사업의 경우 광복회 인천지부가 벌이고 있고, 조봉암 선생 헌양은 새얼문화재단을 중심으로 기념사업회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 비밀문서로 백범 김구와 죽산 조봉암을 잇는 고리를 발견한 만큼 두 항일 투사의 헌양 사업을 함께 벌이는 방안을 인천 지역사회가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백범과 죽산을 한데 아울러 인천지역 '항왜투쟁사'에 밑그림을 두고 진행해야 함은 1921년 상해에서 백범 경호원으로서 죽산이 그림자처럼 서 있기에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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