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조규승 ‘CNA인터내셔널’ 회장 - 유사랑 / 시사만평가, 자유기고가
- 창업 33년, 맨주먹으로 일궈낸 시카고 한상기업
미국 시카고 외곽에 위치한 우드데일(Wood Dale) 지역은 축구장 크기의 매머드 물류창고들이 끝도 없이 밀집해있는 시카고 최대 물류단지다. 바로 이 지역 중심가에 미국 가전제품 유통업계의 강자 ‘CNA인터내셔널(Magic Chef)’ 본사 건물과 물류창고들이 자리하고 있다.
무려 24만 제곱피트에 달하는 창고에는 미국 전역으로 실려 나갈 냉장고, 세탁기, 가스레인지 등의 가전제품들로 가득 차 있다. 인천 출신 조규승 회장(72)이 맨주먹으로 일궈낸, 미국의 대표적 한상기업 ‘CNA인터내셔널(Magic Chef)’은 창업 33년째인 2024년 현재, 연간 매출 규모 3억 불(4,500억 원)을 찍고 있는 탄탄한 규모의 회사로 입지를 굳혔다.
前 대우전자 시카고지사장으로 처음 미국 가전제품 유통시장에 발을 들인 조규승 회장은, 인천중(18회)과 제물포고(15회)를 졸업했다. 2003년부터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모교인 제물포고등학교에 매년 1,200만 원 상당의 장학금을 기탁해오고 있을 만큼 모교 사랑도 각별하다.
하지만 정작 조 회장은 이에 대해, 본인보다는 오히려 20여 년 전 15회 동기인 김수영 친구와 당시 인중제고장학회 간사였던 황효진 후배(현 인천광역시 글로벌도시정무부시장)의 권유로 시작된 자그마한 기부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을 뿐이라며 겸손해한다.
지난 4월 초, 사업차 잠깐 귀국한 조규승 회장과 어렵사리 인터뷰가 성사됐다. 약속 장소였던 혜화동의 한 카페에 도착해보니, 앞선 손님과의 미팅이 채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빼곡한 일정을 소화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동문회가 집필 중인 ‘인중·제고사람들’을 위해 시간을 배려했다는 사실을 확인이라도 해주듯, 그의 전화벨이 수시로 울어댔다. 70대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 동안(童顏)에, 사업가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술가에 가까운 풍모였다. 형식을 따지지 않는 자연스러움이 말투와 태도에서 묻어났다.
“인천 창영동에서 태어나 송현동 88번지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어요. 2남 5녀 중 막내인데, 위 누님들 두 분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2남 3녀의 틈바구니에서 자랐죠.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라 17살 터울로 이미 수녀의 길에 들어선 큰누이를 비롯한 가족들은, 제가 대신 학교로 진학해 천주교 신부가 되거나 의대로 진학하여 의사가 되길 원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신부도 의사도 되고 싶지 않았어요. 누이한테 짜장면 얻어먹는 재미로 4살 때부터 송림동성당엘 다녔지만, 어린 마음에도, 주일학교에서 사목회장의 길고 지루한 설교와 아일랜드 출신 신부님의 강압적 분위기의 교리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아예 신부의 꿈같은 건 단념하고 말았죠. 의사도 제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은, 생물 시간 개구리 해부 실습 때 이미 간파했고요. 사지를 벌려 놓은 개구리의 배를 도저히 메스로 쨀 용기가 없었어요. 대신 저는 서울대로 진학해 지질학 교수가 되겠노라고, 집안 식구들에게 공언하고 다녔죠. 미군정이 철수하기 전까지, 인천 부두에 주둔 중이던 미군기지 고문관으로 일하시던 부친께서 포천의 돌산을 개발 중이셨던 터라, 지질학이 뭔지도 모르면서 궁여지책으로 꺼낸 면피성 발언이었을 뿐이었는데, 진짜 지질학을 전공하게 되고, 그 인연으로 오늘에 이르게 된 걸 보면, 인생이란 정말 알 수 없는 묘한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부친께서 미군 고문관이었던 덕분에 고기나 버터, 백설탕 같은 당시로서는 귀한 물건들이 집안에 넘쳐 났단다. 양키시장 앞 미림극장 건너에서 살았는데, 살림살이는 비교적 여유 있는 편이었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천중학 때는 문예반에서 교지 ‘춘추’에 글도 올리고, 탁구부에 들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 강당에 하나뿐인 탁구대는 3학년 형들 차지라 벽 탁구만 열심히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제고 시절엔 ‘산악반’에 가입해 한라산을 필두로 국내 내로라한 명산들을 부지런히 정복하기도 했다. 도봉산에서는 암벽을 타다 미끄러져 큰일을 치를 뻔도 했지만, 제고 13회부터 17회까지의 ‘제고산악반’ 선후배들과는 지금도 꾸준히 만남을 유지하고 있을 정도로 끈끈하다.
대학은 공언한 대로 서울대 지질학과에 원서를 냈다. 하지만 보기 좋게 낙방했다. 시험보기 전날 긴장을 많이 했는지, 하숙집 푸세식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변비로 밤새 고생하느라 컨디션이 엉망이었던 탓이란다. 기고만장하던 자신감이 한풀 꺾이고, 세상이 생각만큼 녹록지 않다는 사실도 처음 터득했다. 서울 양영학원에서 1년간의 재수 생활 끝에 다시 도전해, 이듬해인 1972년 기어코 서울대 지질학과에 합격했다. 당시 서울대 문리대 정원이 420명이었는데, 장학생으로 납부금을 면제받았을 만큼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할 수 있었단다.
데모 주동자에서 대우실업 신입사원으로
“대학에 들어가서는 과 대표로 자의 반, 타의 반 학생운동에 몸을 담게 됐어요. 3학년 때는 문리대학생회 대의원의장을 맡아 민청학련에 관여하게 되면서 여러 차례 수배 명단에 오르는가 하면, 1974년 가을, 결국 데모 주동 혐의로 남산에 끌려가 많은 회유와 고문을 받기도 했고요. 그 과정에서 같은 제물포고 동기이자, 문리대 운동권 동기였던 국문과 김도연 군이 학교로부터 제적당하고,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는 가슴 아픈 사건도 있었어요. 김도연 동기는 서울대 문리대 문학회 회장으로도 활동했는데, 김지하 선배 같은 쟁쟁한 거물들이 거쳐 간 당시 문리대 유수한 서클 중 하나였죠. 정말 순수하고 아까운 인재였던 김도연 친구를 지금도 기리며 명복을 비는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 1970년대 학생운동권 수사는 안기부의 전신인 중앙정보부 6국에서 담당했어요. 운동권 학생들이 검거되면 먼저 심한 고문과 수사를 거친 후, 부산이나 설악산 같은 곳으로 끌고 다니며 몇 날 며칠을 격리하거나, 세종호텔 등지에 가둬 두고 갖은 협박과 회유를 지속해요. 자칫 고문으로 반신불수가 되거나, 협박과 회유에 굴복해 학생 프락치로 전락한 경우도 있었죠. 저한테는 연로하신 부모님의 상심과 가족 소유의 회사, 그리고 가족들의 안전까지 들먹이며, 협조하지 않으면 ‘당장 모든 것이 끝장날 수도 있다’라고 계속 겁을 줬어요. 끝까지 버텨봤지만, 충격으로 모친께서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손을 들고 말았죠, 학생운동에서 손을 떼겠다는 각서를 쓰고 겨우 풀려날 수 있었어요. 그렇게 학교를 졸업하게 되고, 군 복무 중에 부모님 두 분이 모두 병환으로 돌아가시게 되면서 운동권과는 완전히 결별했죠.”
하지만, 조규승 회장은 운동권에 직접적으로 가담만 하지 않았을 뿐, 회유와 협박에 굴복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노여움, 그리고 고생하는 후배들에게 미안한 마음 때문에, 졸업 후 대우실업에 입사해서는 운동권 후배들을 위해 봉급을 모두 쾌척하기도 하는 등, 한동안 후원을 이어갔단다.
“1978년 대우실업 신입사원 면접 때, 김우중 회장이 직접 면접관으로 나왔는데, 저한테 대뜸 ‘영어 할 줄 아느냐’고 묻더니 즉석에서 영어로 몇 마디 질문하고는, 저를 해외자원개발을 담당하는 ‘광물건재부’로 발령 냈어요. 보통 신입사원들은 품질이나 생산관리 쪽에 배정되는 게 보통인데, 제가 지질학전공이라 그랬던 건지는 몰라도, 당시엔 광물자원이라고 해봐야 ‘텅스텐’이나 석회암을 가공해 쌍용이나 동양화학처럼 시멘트를 생산하는 정도였거든요. 중동지역 건설 붐이 시작되면서 건축, 토목사업 활성화로 ‘건축자재 금수조치’가 시행되던 때라, 해외자원개발부의 역할이 중요하긴 했지만요. 대우실업 입사 이듬해에는 대학 때부터 8년을 사귀어오던 첫사랑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1년 뒤 첫 아들을 얻었어요. 그리고 얼마 후 대우실업이 당시 국내 3대 가전 메이커 중 하나였던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인수하게 되면서 그 인수팀에 합류했어요. 그게 제가 처음 가전제품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였죠.”
회사 내에서 업무능력을 한창 인정받던 것과는 달리, 그 무렵 조 회장에게는 인생의 파고가 한꺼번에 밀어닥친 괴로운 나날의 연속이었단다. 아내가 백병원에서 둘째 딸아이를 출산했는데, 주치의는 세미나에 가 있고, 대신 전공의가 애를 받다 사고가 난 것이다. 애만 핏덩이로 나오고, 산모는 한참을 지나도 도무지 나올 생각을 않는 거였다. 수술실로 들어가 보니 아내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있고 전공의는 넋이 반쯤 나가, 계속되는 하혈을 수혈로 충당하느라 허둥대는 광경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사람이 참 간사한 동물이라는 걸 그때 알았어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앞으로만 달려 나가다 덜컥 급브레이크가 걸린, 그 위기의 순간에 매달릴 곳은 오직 하느님뿐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더라고요. 나도 모르게 ‘아내만 살려주시면 앞으로 성당 열심히 나가겠노라’ 무조건 빌고 또 빌었죠. 명동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도, 영세를 안 받은 비신자 상태여서 관면혼배로 식을 치렀거든요. 이런 제 엉터리 기도를 하느님이 들어주셨는지, 놀란 주치의가 세미나 도중에 대전에서 날아오고, 그 병원에서 레지던트 중이던 후배의 도움 등으로 다행히 아내는 겨우 생명을 건질 수 있었어요. 이제 한숨 돌리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저희 가족들이 운영하던 회사가 갑자기 부도가 난 거예요. 가족들은 물론이고, 제 신혼집까지 주렁주렁 걸린 담보며 융자에 당장 거리로 나앉게 될 판이었죠. 그때마다 면피용으로 하느님을 붙들곤 했는데, 그렇게 뜨거운 맛을 몇 차례 보고 나니 나도 모르게 성당에 열심히 나가게 되더라고요, 영세도 받고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과분한 세례명까지 받았어요.”
시카고지사장에서 창업의 길로
집안의 사업 부도로 큰돈이 급히 필요했던 조 회장은, 회사에 자신을 중동지사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중동 건설 열풍으로 다녀오기만 하면, 집을 한 채 살 수 있는 목돈을 손에 쥘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중동 대신 엉뚱하게도 새로 만들어질 대우전자 시카고지사로 발령을 냈다. 운명이란 어쩌면 이렇듯 드라마틱한 위기를 통해 결국 자신의 길을 찾아가도록 인도하는 신의 섭리인지도 모른다.
“전혀 예상 밖의 시카고지사 발령을 받고서, 정말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미친 듯 일에만 매달렸어요. 현지법인 인허가업무는 물론이고, 조직 세팅에 판매전략 수립까지 해외 신생법인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죠. 그러는 와중에 지사장으로 승진도 해, 미국 전역을 다니며 판매관리부터 모든 업무를 직접 챙겼어요.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판이었죠. 그때마다 속으로 다짐했어요. ‘그래, ‘딱 5년만 죽기 살기로 최선을 다해 일하자. 그리고 회사 그만두고 이 기회의 땅 미국에서 나 자신의 무역회사를 시작하자’라고요. 그렇게 진짜 딱 5년 반 만에 한국에 들어와 사직서를 썼어요. 대우그룹이 한창 잘 나가던 최고 전성기 시절이라, 다들 저보고 미쳤다고 수군댔죠. 회사에서는 제 사표를 1년간이나 수리하지 않고 저를 설득했지만, 제 생각은 바뀌지 않았어요. 해외 지사 법인장들이 임기가 끝나면 돌아오지 않고 현지에 그대로 눌러앉아, 거래처며 마케팅 인맥까지 고스란히 빼내 자기 사업 발판으로 삼는 일이 당연시되던 게 비즈니스 세계였지만,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오직 신용과 신의 하나만 믿고 밑바닥에서부터 승부를 낼 결심으로 완전히 새로 시작했죠. 친정인 대우전자에서도 그런 제 진심을 알아보고, 나중에는 오히려 저를 물심양면으로 밀어주기까지 했으니까요.”
그렇게 출발한 ‘CNA인터내셔널’(‘Magic Chef Appliance’)이 지난 4월 15일 자로 32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중이다. 조규승 회장의 타고난 비즈니스 DNA와 성실성이 사업 성공의 밑바탕이 되었지만, 정작 조 회장의 진짜 강력한 무기는 미국 가전 업계에서 ‘릴라이어블 캐빈 조(Reliable Kevin Cho)’로 통할만큼 오직 ‘신의’와 ‘믿음’이었단다.
미국 최대 가전전문점 ‘서킷 시티(Circuit City)’ 입점 초기 때만 해도 많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어렵사리 판매망을 뚫었던 ‘CNA인터내셔널-Magic Chef’의 매출 총액은 1999년 1억 불, 2007년 2억 불, 2015부터 2024년 현재까지 매년 2~3억 불 매출을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한국, 일본, 대만에서 생산되는 가전 제품판매가 주력이지만, 한때 삼성조차도 OEM으로 공급하던 미국 ‘매직쉐프’의 브랜드라이센스를 따냈는가 하면, 매직쉐프가 M&A 될 때, 매직쉐프 공장 10개를 인수한 ‘월풀’로부터 테네시와 알리바마 공장 2개를 인수해 직접 생산에 참여하기도 했다.
지금은 공장을 정리하고, 중국과 터키의 가전제품 생산 공장에 오더를 줘 OEM으로 제품을 만들어 판매 중인데, 점차 베트남이나 태국 등으로 생산기지를 옮기는 추세다. 그럼에도 주요 부품은 한국, 일본, 대만에 의뢰하는 방식으로 ‘퀄리티 컨트롤’을 철저히 관리하고 있다. 한번 오더에 10만에서 20만 개, 연간 200만 개에서 300만 개나 되는, 대형에서부터 소형에 이르는 제품들을 ‘Magic Chef’브랜드로 생산 판매 중이다.
“미국에서 가전 분야사업에 진출하려면 5~10년 정도 경력 가지고는 불가능해요. 제품 히스토리에서부터 관련 인물들까지, 업계정보를 속속들이 알아야 하거든요. 가전업계 42년 노하우에 사업경력 32년째지만, 조금이라도 긴장의 끈을 놓치면, 바로 여기저기서 구멍이 생기는 살벌한 세계가 이 바닥이에요. 어려움과 시련, 까마득한 좌절의 시기가 저라고 왜 없었겠어요. 믿었던 사람에게서 발등도 찍히고, 사기도 수차례 당하면서도 오로지 ‘신용’ 하나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며 이 자리까지 왔어요. 가전의 핵심은 바로 ‘모터’예요. AI시대라느니, 인터넷 4차 산업을 거쳐, 이제 5차 산업 시대라느니 세계가 온통 떠들썩하지만,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하고, 1900년경에 GE사가 처음 생산한 전기모터가 없었다면, 애초에 모두 불가능한 이야기들인 거죠. 피스톤으로 바퀴를 돌리는 원운동이라는 지극히 간단한 원리의 ‘모터’가, 사실은 모든 가전제품의 생명이자 근본이에요. 컴퓨터든 휴대폰이든 예외가 없어요. 한 개의 가전제품에 5~10개 정도 들어가는, 가장 기본이자 기초인 모터를 최고성능으로 얼마나 잘 만드느냐 하는 것이 가전제품의 알파요 오메가예요. 가전 공부한답시고 전 세계를 쏘다녔는데, 일본 ‘파나소닉’의 전신인 ‘마쓰시다 공작소’ 창업자인 ‘마쓰시다 고노스케’의 철학에 크게 공감했어요. 마쓰시다 선생이 가전제품을 배우러 미국, 유럽 등지를 다녀보니, 다들 각종 가전제품을 물 쓰듯 하는데, 패전국 일본 국민은 전쟁하느라 허리띠만 졸라매고 있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일본의 중산층 이하가 누구나 쓸 수 있도록, 적절한 품질의 중저가 가전제품을 생산하기로 결심한 거죠. 그렇게 소형냉장고며 전자레인지 등이 싼 가격에 공급되기 시작하면서, 결국 미국공장들까지 문 닫게 만드는 일본의 가전 신화가 탄생했어요. 반대로 부유층을 상대로 고급가전을 만들던 ‘쏘니’는 바닥으로 떨어진 신세가 되었고요. 저 역시 그때부터 중산층과 저소득층도 부담 없이 구매 가능한, 품질 좋은 제품을 만들어 파는 데 사업 방향을 맞췄어요. 일종의 ‘박리다매’ 전략인 거죠. 이익도 더불어 공유하자는 취지로, 이익의 일부를 미국의 빈곤층을 위해 도네이션하고 있고요. 개인적 희망이지만, 30년 50년이 아니라 내가 죽고 나서도, 100년 이상 갈 수 있는 단단한 기업을 꿈꿔요. 그러려면 종업원은 물론이고, 주주와 거래선들까지 모두 좋아할 수 있는 회사가 돼야겠죠. 좋아야 오래 갈 수 있고, 오래 갈 수 있어야 좋은 회사로 남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