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헤 신부님의 비극이 전하는 행복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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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신부님의 비극이 전하는 행복의 비밀
  • 최원영
  • 승인 2024.05.01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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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영의 책갈피] 제154화

 

 

집착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 대한 집착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이나 의지 역시도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신념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신의 신념과 다른 사람들과 조화롭게 살 수 없습니다. 자신은 ‘선’이고 그들은 ‘악’이 되어버리니까요. 그래서 편이 나뉘고 늘 싸움만 이어질 뿐입니다. 결국 너와 나 모두 불행한 삶을 살게 됩니다.

《명작에게 길을 묻다》(송정림)에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인 ‘장미의 이름’이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소설은 한 사람이 가진 그릇된 신념이 사회에 얼마나 큰 재앙이 될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소름이 돋을 만큼 끔찍한 소설입니다.

에코는 기호학자이면서 철학자, 역사학자, 미학자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1980년, 이 소설이 출간되자마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합니다. 실화에 바탕을 둔 이 소설은 중세의 어느 수도원에서 벌어진 연쇄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제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327년 11월, 아드소는 사부인 윌리엄 수도사와 북부 이탈리아에 있는 외딴 수도원에 들어간다. 그곳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책들이 있는 곳이다. 세계 전역의 수도사들이 유학을 와있는 이곳에서 의문의 연쇄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윌리엄 수도사는 그 사건을 하나하나 풀어간다.

첫 죽음은 필사본에 삽화를 그리는 일을 하던 아델모 수사에게서 시작된다. 그의 삽화는 기괴하고 우스꽝스런 형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탑 위 창문에서 떨어져 죽고 만다.

두 번째 죽음은 베난티오 수사로 돼지 피를 담은 통 속에 다리를 가위처럼 벌린 채 거꾸로 처박혀 죽었다.

세 번째 죽음은 수도사 베렝가리오 수사인데, 그는 그리스어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번역하는 번역가다. 첫 사망자인 유머에 능숙한 아델모와 형제 같은 사이였다. 그는 퉁퉁 부은 시체로 떠오른다.

네 번째 죽음은 세베리노 수사로 천구의에 머리를 맞아 사망한다.

다섯 번째 죽음은 범인으로 추정되던 말라키아 수사인데, 그는 기도시간에 앞으로 고꾸라지며 뜻 모를 말을 남기고 죽었다. “그건 천 마리 전갈의 힘을…”

윌리엄 수사와 이 수도원에서 가장 늙은 호르헤 수도사는 첫 만남 때부터 대립한다. 그들은 아델모의 기괴한 삽화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논쟁한 것이다.

호르헤가 말한다.

“필경 하느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결국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말 거요. 이래서 하느님 말씀이 거문고 뜯는 나귀, 방패로 밭을 가는 올빼미, 스스로 멍에를 쓰고 일하는 황소, 거꾸로 흐르는 강, 불붙는 바다, 은자로 변신하는 늑대 따위로 그려지는 불상사가 벌어지는 거란 말이요. 황소를 데리고 토끼사냥을 나가고, 올빼미가 문법을 가르치고, 개가 벼룩을 파먹고, 애꾸가 벙어리를 지키고, 벙어리가 떡을 달라 하고, 개미가 송아지를 낳고, 구워놓은 닭이 날고, 지붕 위에서 과자가 익고, 앵무새가 수학을 가르치고, 암탉이 수탉에게 알을 낳게 하고, 수레가 소를 끌고, 개가 침상에서 자고, 사람이 대가리를 땅에 댄 채 걷고…, 대체 이런 장난을 왜 하는가 말이요. 하느님의 뜻을 가르친다는 핑계 아래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과 거꾸로 된 놈의 세상이 있어도 좋다는 것인가요?”

그러자 윌리엄은 “하느님께서는 가장 왜곡된 것을 통해서도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기괴한 형상에 깃든 비밀은 체득이 빠른 법이니까요.”

아델모의 삽화에 반대하는 호르헤는 교회를 가리키며 대리석 부조에 그려진 그 그림들을 잔뜩 비판하고 나서 다시 말을 이어간다.

“오호라. 공부한다는 수도사들이 책보다는 대리석 부조를 더 탐하고, 하느님의 율법보다 사람이 한 일을 더 상찬하니, 이 어찌 부끄럽지 않으리오.”

윌리엄도 지지 않고 삽화를 옹호한다.

“하느님은 가장 심하게 왜곡된 사물을 통해 나타나십니다.”

호르헤도 큰 소리로 충고한다.

“꼬리가 뒤틀린 요상한 점박이 괴물이나 보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마시오. 그러다 최후의 날을 맞지 않도록 말이요.”

호르헤가 다시 말을 잇는다.

“그리스도가 웃지 않았다는 건 모르지 않겠지요?”

그의 이 말에 윌리엄은 항변한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우스갯소리도 하시고 재담도 하셨습니다.”

살인사건을 조사하던 윌리엄은 이제 그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 모든 살인이 수도원의 장서관에 숨겨진 비밀의 책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부 ‘희극론’ 때문에 일어난 일임을 알았던 것이다.

‘웃음은 권위를 비판하고 경건함을 조롱하며 절대성을 파괴한다.’

책 속에 이런 내용이 있다는 것을 안 호르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위험한 사상을 영원히 묻어두고자 했다.

웃음과 희극을 악마로 여긴 장서관의 지배자 호르헤 신부.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책장에 독을 발라놓은 것이 수도사들이 잇따라 죽음에 이른 원인이었던 것이다. 모든 걸 알게 된 윌리엄의 추적으로 궁지에 몰린 호르헤.

마지막 날 밤, 도서관 밀실이다. 그의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들린다.

“웃음은 농노들을 악마에 대한 공포에서 풀어줍니다. 그런데 이 책은 악마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되는 것이 곧 지혜라고 가르칩니다.”

그는 <시학>의 페이지를 뜯어 하나씩 불태운다. 윌리엄이 말리려 하자 그는 등불을 내던져 방에 불을 지른다. 윌리엄이 외친다.

“서둘러라. 저 영감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다 먹어치우겠다.”

수많은 장서가 타고, 윌리엄은 사람보다 책을 구하기 위해 불길 속으로 뛰어든다. 하지만 불길이 치솟아 바람을 타고 수도원 전체로 번진다. 삼일 동안이나 불탄다.

그 후 세월이 한참 지나 수도원을 방문한 아드소는 이렇게 독백한다.

“바빌론의 영화는 어디로 갔는가?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장미의 이름〉이란 책 제목만 보면 왠지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연상되었는데, 내용은 끔찍한 살인사건이어서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드소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제목의 의미가 와 닿습니다.

한창 장미가 피었을 때의 화려함은 마치 종교적 고집과 집착이 지배하고 있던 중세 사람들의 삶이 떠오르고, 철 지난 장미가 어김없이 추한 모습으로 시들어버리고 마는 것은 그런 집착이 얼마나 덧없고 허망한 것인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요.

저자인 송정림 작가는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담았습니다.

 

“신념과 고집은 다르다. 독단과 확신도 다르다. 신념은 내가 믿는 바를 확신하면서도 다른 의견을 수렴해 물음표를 찍어보는 단계를 거친다. 고집은 다른 의견이나 다른 생각에는 귀를 틀어막고 마음을 닫는다. 독단은 기억의 고집이다. 내가 믿고 있는 바를 남도 모두 다 따라야 한다고 고집한다. 확신은 나 혼자 믿어도 좋은, 그러나 타인 생각도 존중할 줄 아는 마음 자세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는 독단, 내 것을 지키기 위해 남을 해쳐도 좋다는 이기심, 변화가 두려워 그 자체를 거부하는 조바심, 그렇게 움켜쥔 채 놓지 않고 집착하는 이름은 없을까? 언젠간 지고 마는 장미일지도 모르는데, 가시가 앙상한 그 장미를 꼭 쥔 채 놓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가만히 눈을 감고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젊은 시절, 제가 생각하던 ‘정의’를 구현하겠다며 얼마나 많은 사람을 힘들게 했었는지가 떠오릅니다. 신혼 시절, 제가 생각한 가정의 모습을 구현하기 위해 아내에게 얼마나 고약한 독선을 행했던가. 10년 동안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작은 단체를 만들고 나서 단체 구성원들에게도 그랬습니다. 얼굴이 달아오릅니다. 부끄러워서요.

저 역시도 얼굴과 이름만 다르지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호르헤 신부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두려움이 있어야 참다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만을 옳다고 여겨서 ‘웃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해 결국 그의 책을 모조리 불태워 없애버린 호르헤 신부와 저는 몸은 둘이지만 하나였던 것입니다.

호르헤 신부님... 과연 그는 행복했을까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이 과연 그분을 행복한 삶으로 이끌었을까요? 그분은 그분의 삶의 주인이었을까요, 아니면 그분이 믿고 있는 신념이 그분 삶의 주인이었을까요? 신념이 확고하면 눈도 귀도 가린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신념이 사람을 노예로 부릴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한 번쯤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옳다고 믿고 있는 것이 정말 그런지를 말입니다. 나와 다른 신념을 적대시하지 않고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세상을 조금 더 밝고 아름답게 만들어주진 않을까요. 이런 생각이 호르헤 신부님의 비극에서 우리는 행복의 비밀을 알아내게 해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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