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우 작가 - ①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낭자 따라 인천으로
자유공원 중턱에 자리 잡고 사는 작가 조우의 이야기다. 7살 때 부모님 따라 인천으로 와 올해 50이 되었다. 43년간의 인천 생활을 조우 작품과 함께 이야기해 보려 한다.
조우 가족은 문화생활을 사랑하는 어머니 낭자씨 따라 미도파백화점이 있는 간석동으로 오면서 시작된다. 1980년 초반 경기도 인천시는 인천직할시가 되었고 미도파백화점이 생겼다.
필자는 7살이 되는 해 선생님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인천으로 오게 되었는데 어머니(낭자씨)는 서울 사대문 밖으로 나가 사는 것이 무엇보다 싫어하셨다고 했다. 우선 친정집이 잠실아파트였고 N서울타워(남산) 올라가는 길에 있는 여고를 졸업하셨다. 문화생활은 낭자씨의 삶 자체였다고 했다. 다리품을 팔아가며 영등포에서 개봉 그리고 오류동까지 집을 알아보러 다녔지만 구하지 못했다고 하셨다. 인터넷도 없던 그 당시 낭자씨는 간석동에 미도파백화점이 들어오고 동인천에는 음악다방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미도파백화점과 성헌고등학교(현 인제고등학교)있는 동네에 자리를 잡으셨다. 그렇게 조씨 가족은 문화생활을 사랑하는 낭자씨 따라 인천시 남동구 간석동에 왔다.
비 오는 날에는 빨간 장화
비가 오는 날이면 진흙물이 흘러 장화가 없으면 안 되는 시골로 이사 왔다. 7살 첫 인천의 기억은 빨간 장화이다. 빨간 장화는 비가 오거나, 해가 쨍하거나 꼭 필요한 신발이었다. 논밭에서 올챙이와 물고기를 잡으려면 꼭 필요했다. 친오빠는 이사를 오자마자 골목대장이 되었고 나는 골목대장의 어여쁜? 여동생이 되었다. 말도 없고 움직이기 싫어하는 내가 시골로 이사 오니 놀 것이 많아 골목대장 오빠를 쫄쫄 따라다녔다.
비가 오면 빨간 장화 신고 빗물을 걸었고
해가 나면 빨간 장화 신고 논밭을 걸었다.
벌거벗은 덕을 양손에 든 핑크 공주님
낭자씨의 희망과 꿈을 드리는 미도파백화점은 희망만 주는 희망 백화점으로 바뀌었다. 자식들에게도 문화생활을 해주고 싶어 했던 낭자씨의 미도파 아니 희망 백화점에는 작은 영화관도 있었고, 1층에 점포에는 “누드덕”이라는 지금은 흔하지만 프랑크 소시지 하나를 통째로 튀겨주는 체인점?이 있었다.
내가 알고 있던 핫도그는 손가락만한 빨간 밀가루 소시지에 튀김옷이 두껍게 두 개 입고 있어 배부른 간식인데 누드덕은 고급스러웠다. 하나에 천 원(핫도그 50원)이나 하는 매우 고급지지만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작은 크기의 벌거벗은 핫도그를 두 개씩 사주시곤 하셨다. 내가 누드덕을 먹는 동안 낭자씨는 하얗고 깨끗한 점포에 앉아서 고급스러운 공간을 즐기셨다.
지하 식료품점에선 비싼 바나나 하나를 사서 내 손에 들려주셨다. 할머니께서 내가 어릴 적 공주라고 불러주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왕님 같은 낭자씨 덕분에 나는 공주인 줄 알고 자랐다.
미도파(희망) 백화점 천국으로 가는 계단
인천의 문화 예술의 중심이었던 미도파(희망)백화점 지하에는 고급 과일과 식료품이 있었고 1, 2, 3층에는 서울에 안 가도 나름 유행하는 옷과 잡화 그리고 영화도 볼 수 있었다. 나와 오빠, 그의 동무들에게 미도파는 1층에서 놀이기구(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 3층으로 올려다 주는 희망이 넘치는 놀이동산이고 천국이었다.
그렇게 나의 어린 시절은 비눗방울처럼 망울망울 피어나 계속 터져도 새롭게 다시 피어오르는 무지갯빛으로 반짝반짝하였다. 이상의 '날개'에 미쓰꼬시(서울 미도파 자리)가 나오는데 어린 시절 나는 그처럼 인천시 간석동 여기저기 논밭을 쏘다니며 한 손에는 올챙이를, 한 손에는 도시락을 들고 천국의 계단을 타고 위로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나는 인천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