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으로 걸어가는 시간의 길, 만석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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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음으로 걸어가는 시간의 길, 만석로
  • 유광식
  • 승인 2024.05.06 11: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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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유람일기]
(127) 동구 만석로 일대 - 유광식/ 시각예술 작가

 

만석동, 2018ⓒ유광식
만석동, 2018ⓒ유광식

 

5월이다. 짙은 스케치가 가정의 달로 접어들며 다소 밝아지는 느낌이다. 4월 꽃놀이를 마친 사람들이 한 해 농사를 잘 짓기 위해 본격적으로 힘쓰는 시기다. 타국의 반전시위가 던져주는 의미를 꾹꾹 눌러 심으면서 말이다. 하루를 시작하며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문득 산다는 것의 소중한 마음을 읽게 되고 쓰게 된다. 오랜 기억의 나날들이 풀풀 쏟아지는 오후에 동구의 만석로를 따라 걸어본다.

 

저물녘 만석로, 2021ⓒ유광식
저물녘 만석로, 2021ⓒ유광식

 

화평운교에서 인천역 방향의 내리막길로 향한다. 철길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길, 만석로다. 앞서 한 반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입구에 들어서려는 순간, 식사를 마치고 줄줄이 나오는 한 팀의 사람들이 족히 20명은 되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느긋하게 중식을 먹었더니 동네 만석꾼이 된 모양으로 배가 불러왔다. 화수아파트를 지나서 38년이 된 만석2차아파트를 돌아 나온다. 기온이 조금씩 오르는 시간대인지라 주변이 따사롭다. 옛 창고와 단독주택, 제분공장, 운수회사 등 일상적인 생활 곁에서 열심히 우리들의 삶을 뒷받침하는 요소들이 꼭꼭 숨어 있다. 이곳에서는 시계 초침 소리 못지않게 전동차 바퀴 소리가 일정한 시간마다 들려온다. 기차 바퀴 소리에 꾹꾹 눌러 둔 시간이 100년을 넘었으니 많은 기억이 잠자고 있을 터이다. 

 

만석고가 입구와 동일방직 인천공장 정문, 2024ⓒ유광식
만석고가 입구와 동일방직 인천공장 정문, 2024ⓒ유광식
어느 집 화분에서 자라는 엉겅퀴, 2024ⓒ유광식
어느 집 화분에서 자라는 엉겅퀴, 2024ⓒ유광식

 

옛 공장 터에 지어진 한마음종합복지관이 눈에 띈다. 동구에서 장애인 복지의 허브와도 같은 곳이다. 모두가 한마음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국제사회가 꼭 그렇다. 근방에는 새뜰사업의 일환으로 마을환경이 개선된 흔적들이 많다. 철길에 접한 면을 청소하고 길을 다지고 색칠한 뒤, 주민 커뮤니티홀을 조성하여 한층 쾌적해졌다. 만석고가 앞에는 한 번 이상은 들어봄 직한 동일방직 공장이 있다. 주꾸미는 여전히 손님을 유혹하려 하지만 잠시 낮잠을 자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골목길 재생 시범사업으로 정돈된 주택가, 2024ⓒ유광식
골목길 재생 시범사업으로 정돈된 주택가, 2024ⓒ유광식
철로 옆길을 나서는 주민, 2024ⓒ유광식
철로 옆길을 나서는 주민, 2024ⓒ유광식

 

골목에서는 한 어르신이 많은 수의 화분을 열차처럼 한 줄로 나열하고 계셨다. 흙이 담아져 있는 걸 보면 곧 씨앗을 침투시킬 것이 분명하다. 주꾸미 집 뒤뜰에서는 반짝미용실이 열렸고, 머리를 염색하는 풍경이 펼쳐졌다. 거기에는 아저씨의 화분 꽃보다 앞서 세 아주머니의 이야기꽃이 피었다. 골목을 나서니 만석고가 아래다. 나이 지긋하신 두 남자 어르신은 가벼운 복장으로 마주하고 장기를 두고 계셨다. 옛날에 주로 배못을 만들었다던 신일철공소 자리는 이제 우리 사회를 잘 여며줄 어린이들의 집(만석어린이집)이 되어 반겨준다. 주변의 알록달록한 채색과 더불어 만석동의 풍경이 그려지는 오후에서 평온한 한마음 챙길 수 있었다. 

 

만석동우체국 앞, 2024ⓒ유광식
만석동우체국 앞, 2024ⓒ유광식
제물량로341번길(오른쪽이 만석1차아파트), 2024ⓒ김주혜
제물량로341번길(오른쪽이 만석1차아파트), 2024ⓒ김주혜

 

40년이 된 맏형 만석1차아파트를 지나니 현대식 굴막이 보이고, 그 앞으로는 뭔가 휑하다. 바로 만석우회고가도로가 철거된 것이다. 1993년에 완공되어 30년을 버틴 후 철거되었는데, 만석우회고가도로가 사라지니 탁 트인 시야로 부두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었다. 대신 예전엔 머리 위로 다니던 대형차들이 쉴 새 없이 눈앞으로 쌩쌩 지나니 위압감이 느껴진다. 소음도 ASMR 격으로 매우 사실적이다. 길 건너에는 34년 된 만석3차아파트가 홀로 서 있다. 뒤돌아 만석어린이공원을 지나 만석비치타운아파트를 통과했다. 정문 맞은편에는 작은 미술관 하나가 숨어 있다. 최근 최정숙 작가의 전시 ‘나의 사춘기, 송림동 달동네’ 전시를 보았다. 오랫동안 접어 둔 아버지의 기억을 내밀하게 펼친 작가의 작품에는 그 시절의 이야기가 발그레 물들어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뭉클했다. 새빨갛게 익고 닳은 공장 벽돌담을 따라 걸었다. 어떤 트럭에서 뻥튀기도 사서 옆구리에 끼고서 말이다. 

 

철거된 만석우회고가도로, 2024ⓒ유광식
철거된 만석우회고가도로, 2024ⓒ유광식
만석동 우리미술관 최정숙 작가의 전시 관람, 2024ⓒ김주혜
만석동 우리미술관 최정숙 작가의 전시 관람, 2024ⓒ김주혜

 

담벼락을 따라 걷다가 길 끄트머리에서 한 여성 노동자 조각상과 마주쳤다. 사실 동구는 일제강점기부터 자리한 공장이 많고 이와 얽힌 노동의 기억이 숱하게 치대던 장소였다. 육지로의 관문이자 전쟁 피난지였던 관계로 과거 문학작품에서 인용되던 장소가 많다. 나야 가볍게 걸어 왔지만, 옛 시절 힘겹게 걸어왔던 어느 노동자의 질퍽한 길은 아니었을지 발걸음이 겹친다. 지금은 너무나도 쉽게 거니는 길이 되었지만, 감시와 착취, 가난에 따른 걸음이 그리 가볍지 않았음을 안다. 하필 날씨는 이런 생각과는 반대로 잔바람과 함께 너무 따스하다. 길게 이어진 만석로 곳곳마다 아픔을 견디고 자라온 이야기들이 꽃처럼 피어 있다. 한마음이 되기 위해 모두가 잘 견뎌왔노라고, 이제 웃음꽃을 피우자고 만석로가 미소를 짓는 듯하다.            

 

동일방직 인천공장 담벼락, 2024ⓒ유광식  
동일방직 인천공장 담벼락, 2024ⓒ유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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