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도사제, 세조 때 서해를 대표하는 제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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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도사제, 세조 때 서해를 대표하는 제사였다
  • 송정로 기자
  • 승인 2024.05.01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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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악해독(嶽海瀆)과 인천의 원도사제’ 집담회 열려

 

미추홀학산문화원이 주최한 열린집담회.


고려~조선시대에 악·해·독(嶽·海·瀆- 큰산, 바다, 큰강)에 제사를 드려왔는데, 조선 세조대 때 인천은 서해를 대표해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격상됐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이전에는 고려 수도 개성의 방위에 따라 풍해도 풍천에서 지냈던 문제점을 교정한 것으로 수도 한양을 고려했을 때 합리적이라는 설명이다.
이에따라 인천 앞바다 여러 섬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원도猿島(낙섬, 지금은 사라진 용현동 능해IC 일대)는 이제 인천을 벗어나 서해를 대표하는 제사지로 격상됐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악해독과 인천의 원도사제’를 주제로 미추홀학산문화원이 주최한 ‘학산 열린집담회’가 지난 26일 미추홀학산문화원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송성섭 풍물미학연구소 소장은 이같은 내용으로 발제하고 원도사제를 인천대표 축제로 크게 발전시킬 여지가 충분하다고 발표했다.
국가의 가장 큰 제사가 종묘와 사직 제사인데, 대사(大祀)라 한다. 그 다음으로 규모가 큰 제사를 중사(中祀)라고 하는데, 인천의 원도사제가 이에 해당한다고 송 소장은 밝혔다.
송 소장은 그 근거로 태종 13년 4월 13일, 고려의 <상정고금례>에 ‘사직, 종묘, 별묘는 대사가 되고, 선농, 선잠, 문선왕은 중사가 되며, 풍사, 우사, 뇌사, 영성, 사한, 마조, 주현 문선왕등은 소사’였는데, 태종이 풍운뢰우의 신을 중사에 넣도록 지시했다고 했다.
이어 태종 14년 악해독 제사를 중사로 삼고, 여러 산천의 제사는 소사로 삼았으며, 서해의 해신은 풍해도 풍천에서 제사하게 하였다. 세종 19년 인천군의 자연도, 수심도, 용류도, 고도, 강화의 송가도, 장봉도, 검대도, 남양의 소흘도, 영흥도, 독우도, 연안의 용매도 등 여러 섬의 신에 대한 제사를 인천의 원도에서 지내게 했다.
세조 2년인 1456년 3월 28일, 동해, 남해, 서해의 신사를 모두 개성을 기준으로 정하였던 것이 방위가 어긋나기 때문에 한양을 기준으로 고쳤으며, 이때 서해의 신을 인천에서 제사하게 했다.
성종 5년인 1474년에 완성된 <국조오례>에 악해독 제사는 중사에 속하였으며, 정조 13년인 1789년에 집대성한 <춘관통고>에도 악해독(嶽海瀆)은 중사였다. 다만 기고(祈告) 악해독(嶽海瀆)의 경우에는 소사(小祀)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국조오례>의 규정과도 일치한다는 것이다.
원도 사당에서 지낸 제사는 중종 26년인 1531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원도: 인천도호부 서쪽 12리에 있다. 섬 가운데 여러 섬의 신 제단이 있는데, 봄가을에 악해독 제사를 행할 때 수령이 친히 행한다.” 고 송 소장은 덧부쳤다.
이때까지 원도사에서 봄가을에 악해독 제사를 지냈으나, 헌종 8년인 1842년에 제작된 <경기지>를 보면, 악해독 제사가 폐지되었으나, 다만 일곱차례의 기우제를 원도사에서 행하였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한편 원도에서 서해에 있는 여러 섬의 신에게 제사한 것은 세종 19년(1437) 기록에서 처음 등장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는 원도.(사진 - 송성섭 제공)


이날 임정규 우리겨레박물관 운영위원장도 ‘고천문 관점에서 바라본 원도 제례터의 위치’를 주제로 발제했다.
임 위원장은 원도는 조수간만의 차를 활용한 어업과 특산물을 운송하는 조운로의 중심에 위치하여 서해를 대표하는 제례터가 되었다고 발표했다. 특히 원도는 바닷물의 움직임과 연안 갯골을 이용한 조운에 필요한 생활 천문을 관측하기에 매우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고대 제례의식이 천문과 깊은 관계가 있고 우리 조상들은 이를 생활에 활용했다는 다양한 사례를 보여 주고 있다며, 새해가 시작되는 동짓날 원도에서 문학산 정상 일출을 볼 수 있었다고 밝혔다.
임위원장은 조선 세조 때부터 국가에서 행한 서해 제사는 ‘왜 서해의 수 많은 섬 중에서 원도에서 제례를 올리게 되었는가?’를 고천문에서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이에 그는 원도 인근 인천 앞바다는 고대부터 조수간만의 차를 활용한 어업이 발달하였고, 삼남 지방의 특산물을 배를 이용하여 개성과 한양으로 운송하는 조운로의 중심이었다고 설명한 것이다.

 

열린집담회 토론자로 나선 김상태(좌) 인천사연구소 소장

 

한편 토론에 나선 김상태 인천사연구소 소장은 송성섭 소장의 발제에 대해 “세조대 한양 중심 으로 동해(강릉), 서해(인천), 남해(수천), 북해(갑산)에서 제사지냈다고 했는데, 이때 인천에서의 제사는 악해독 제사이지 원도사제와는 별개의 것이었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또 세조대 제례는 성종대 ‘국조오례의’에 반영되지 못하였고, 정조대 ‘춘관통고’ 악해도에서 동해(강원도 양양), 남해(전라도 나주), 서해(황해도 풍천)에서 제사하도록 하고 있다며, 그렇다면 세조대의 악해독 제사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밝혔다.

이어 세조대 때 인천은 서해를 대표해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격상됐다는 연구는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고 전공자들은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또한 원도사제와 악해독제가 어떤 관계인지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조선의 사전체제가 어떠한 과정을 거치면서 유교정치 이념을 실현하고 했는 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고 토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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