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대장경판 '팔만대장경'
상태바
세계 최초의 대장경판 '팔만대장경'
  • 이창희
  • 승인 2012.06.05 07: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의 산수풍물] 세계문화유산의 가치 재조명

 팔만대장경은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다. 대장경은 불교 경전의 일부를 일컫기도 하나, 대개 경전의 모두를 포괄하는 전체 집합의 용어로 ‘성스러운 불교 경전들을 모두 담은 3개의 큰 광주리나 큰 그릇’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시기와 지역에 따라 삼장이나 중경, 일체경, 대장 등으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삼장은 산스크리트어 ‘3개의 광주리’의 한역으로, 경장, 율장, 논장을 아우른다. 경장은 부처님의 설법 전부를, 율장은 부처님께서 가르친 불제자의 실천규범과 교단의 계율들을, 논장은 경과 율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주석하고 해설한 논술 전체를 담은 그릇들이다.

중국에서는 수나라 이후 인도의 삼장에다가 중국에서 편찬된 문헌들을 포함시켜 대장경이라 표기하였으며, 남북조 이후에는 일체경이라 하였다. 대장경은 원래 중국에서 번역되거나 편찬된 권위 있는 불교 경전의 전체를 지칭하였으나, 불교 경전의 지역적 확산에 따라 인도와 중국 밖에서 편찬된 경전들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경, 율, 논과 더불어 논에 대한 주석서인 소 등을 비롯하여 전통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여러 종류의 불교 관계 문헌들을 포함한다. 또한 후대 불교 지식인들의 저술, 불교의 역사서와 전기 및 사전류, 기타 불교학 관련의 주요 저술과 자료를 총괄적으로 포괄한다. 따라서 대장경에 포함되는 불전의 종류와 분량은 시대의 흐름과 지역적 공간의 확산에 비례하여 확대된다.

삼장, 즉 대장경은 경장, 율장, 논장을 아우른다. 불교경전의 편집작업은 부처님의 입적 직후 제자 500 나한들이 마다가왕국 왕사성 교외(현재의 인도 비하르주)에 위치한 칠엽굴에서 부처님의 교설을 함께 암송하여 집대성하는 첫 회의인 ‘제1차 결집’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4차 결집 때까지 경, 율, 논이 정리되었고 암송 형태로 구전되던 것이 기원전 1세기 중반 경 패엽에 문자로 기록되었다. 기원전 1세기~2세기에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된 경전은 각각 동남아시아 소승불교(팔리어)와 대승불교(산스크리트어) 권역의 원천 텍스트가 되었다.

중국에서는 인도 불교가 전래되면서 서기 2세기부터 8세기까지 산스크리트어 경전의 한역작업을 진행하는 한편, 남북조시대부터 당나라 때까지 석가모니의 설법 내용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분류하는 작업(교상판석)이 지속되었다. 우리의 팔만대장경이 조성되기 이전에 중국에서 번역된 주요 대장경으로는 개보칙판대장경, 무주개원사대장경, 거란대장경 등이 있다.

고려시대 팔만대장경의 조성 이전에도 우리나라에서는 개별 경전이나 대장경의 조성사업이 있어왔다. 예컨데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이기도 한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126-6호)은 751년(경덕왕 10)경 석가탑이 세워질 때 조성되었다고 사료된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시대 승려 선율이 조성한 대반야바라밀다경 600권이 동경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의 승사에 고려 충렬왕 때까지 보관되었다. 한편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리오층석탑에서 발견된 금판 금강경(국보 제123호)은 조성 시기에 논쟁이 있으나, 백제 때라고도 한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경전 조성 역량은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되고 발전되어 많은 불교 경전들이 지속적으로 출간되었다. 특히 고려시대는 신라시대 때부터 발달해온 목판인쇄술이 가장 고도화되어 발전했던 시기로, 무엇보다 방대한 규모의 불교경판 조성 사업이 진행되었다. 1011년(현종 2)에는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초조대장경이 발원되었다. 이 대장경은 고려 최초의 대장경으로 1087년(선종 4)이 되어서야 완성되었으며, 거의 6,000권 규모의 목판으로 당시의 한역된 대장경으로는 동양에서 가장 방대한 분량이었다.

조성 후 대구 팔공산의 부인사로 옮겨 봉안하였으나, 1232년(고종 19) 몽골 침략으로 초조대장경은 소실되고 말았다. 고려시대 또 하나의 대규모 경전으로는 초조대장경이 만들어진 얼마 후, 대각국사 의천이 초조대장경의 내용을 보완하기 위해 조성한 교장이다. 이를 위해 1091년(선종 8)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1102년(숙종 7)경까지 4,700여 권의 경판을 조성하였다.

초조대장경의 소실로 팔만대장경 조성사업이 시작되었다. 총 81258판으로 구성되어 있다.몽골 침략으로 소실된 초조대장경을 대신하여 1236년(고종 23년) 대장경 조성사업이 다시 시작되었다. 고려사 권24, 고종 38년 9월 무오에는 “국왕이 성의 서문 밖에 대장경판당에 행차하여 모든 관료들을 거느리고 분향하였다. 현종 때 판본(초조대장경)이 임진년(1232, 고종 19) 몽골 병사에 의해 불타 버렸다. 국왕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다시 발원하여 도감을 설치하고 16년 만에 공역을 마쳤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서 팔만대장경의 조성사업이 1236년부터 시작되어 1251년 9월 강화경( 지금의 인천시 강화군)의 대장경판당에서 경찬의례의 개최로 일단락되었다고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담당 관청의 설치와 인적, 물적 자원의 확보 와 같은 사전작업, 경판의 취합 및 경찬법회의 개최 등의 마무리 작업과정까지 포함한다면, 조성사업은 거의 16년동안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팔만대장경의 조성목적은 '몽골 침략군의 격퇴'(이규보, 대장각판군신기고문 동국이상국집, 권 25)에 있었지만 이와 더불어 왕실의 안녕, 국태안민 및 풍년, 불법의 보급, 극락정토의 왕생 등도 기원하고 있었다.

팔만대장경의 조성사업에 참여한 사람들의 출신성분은 다양하였다. 국왕․왕족과 고위 관료 및 유교지식인들로부터 하급 관료와 향리 및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모든 계층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불교계에서도 다양한 종단이나 소속 사원의 고덕대승과 일반 승려들이 역할을 분담하면서 참여하였다. 각수들의 출신성분은 다음과 같다.

해인사 대장경판은 지금까지 잘 보관되고 있지만, 일본의 요구로 해인사에 보관되지 못하고 일본으로 보내졌을 뻔하였으며, 또한 화재나 전쟁으로 사라질 위험을 몇 차례 겪었다. 첫 번째 위기는 조선 초기에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일본과 유구국 및 쓰시마가 고려 말부터 사신을 보내 팔만대장경을 요구하기 시작하다가 조선 초기에 이르러 각종 토산물을 바치면서 더욱 끈질기게 요구해왔다. 특히 세종 때에는 대장경판의 자체를 요구하기까지 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5년(1423) 12월, 6년 정월, 2월, 12월, 7년 4월, 5월 등의 기록에는 일본 사신이 단식까지 하면서 완강하게 팔만대장경판을 요구하자 세종은 대장경판이 우리나라에 오직 한 벌 밖에 없으므로 줄 수 없다고 말하며, 팔만대장경판을 대신하여 범자의 밀교대장경판, 주화엄경판 1질, 금자 화엄경, 호국인왕경, 아미타경, 석가보 등을 주어 가져가게 하였다. 세종 6년 1월 20일조 기사 등을 보면, 왜통사 윤인보와 그의 아우 윤인시 그리고 그의 집에 있는 왜노 3명이 대장경판을 약탈하려는 사건까지 일어난다.

대장경판에 대한 요구가 갈수록 많아지자, 세종은 해인사의 대장경판을 도성 근처로 옮기는 계획까지 세운다. 세종실록 19년 4월 28일조를 보면, 임금이 승지들에게 "일본국에서 매양 대장경판을 청하니, 우리나라에서 불교를 숭상하지 아니하여, 이 판이 밖에 있기 때문에 억지로 청하면 반드시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지난날에 이 판을 구하기에,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서 전해 내려온 국보를 가벼이 남에게 줄 수 없다."고 하였더니 저들이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 판을 도성 근방인 회암사나 개경사 같은 곳에 옮겨 두면 저들도 이를 듣고 우리나라의 대대로 전하는 보배라는 뜻을 알고 스스로 청구하지 않겠지만 단지 수송하는 폐단이 염려되니 그것을 정부에서 논의하라.”고 하니, 모두 “수송하는 폐단이 있사오니, 그 감사로 하여금 검찰하여 그 수령이 맡아서 더럽히거나 손상시키지 못하게 하고 수령이 갈릴 때에는 장부에 기록하여 전해서 맡게 함이 마땅하옵니다.”고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두 번째 위기는 임진왜란 때였다. 대장경판과 판전을 포함한 해인사의 건물들은 임진왜란의 전화를 면하였다. 이를 두고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임진년 왜란 때에 금강산, 지리산, 속리산 및 덕유산은 모두 왜적의 전화를 면치 못하였으나, 오직 오대산, 소백산 그리고 가야산에는 이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예부터 삼재가 들지 않는 곳이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해인사가 임진왜란 때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했던 것은 당시 이 지역을 지켰던 승병과 의병의 힘이 절대적으로 컸기 때문이다.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진군하여 보름 만에 경상도 전역의 주요 읍성들을 모두 짓밟았다. 그 과정에서, 왜군은 창원, 창녕, 거창을 지나 4월 27일에는 해인사 코앞인 성주를 점령하였다. 이때 왜군은 북상하며 해인사 고려대장경에 눈독을 들였을 가능성이 크다. 해인사를 왜군의 전화로부터 지켜낸 것은 소암(? ~1605)대사가 이끈 해인사 승병과 거창, 합천 일대에서 송암 김면(1541~1593), 내암 정인홍(1535~1623)이 각각 이끈 의병이다. 이들은 가야산으로 접근하려는 왜군의 진로를 목숨을 걸고 막아 왜군이 이듬해 정월 개령, 선산 쪽으로 철수하게 만들면서 해인사와 대장경도 안전할 수 있었다.

세 번째 위기는 조선 후기 해인사에 수 차례 발생한 화재 이다. 숙종 21년(1695)부터 고종 8년(1695~1871)에 걸쳐 해인사에 일곱 차례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 때 해인사에 무슨 건물이 화재를 당하였고, 또 새로 지어졌음에 대하여 1876년 2월 퇴암 스님이 찬술한 '해인사실화적'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695년, 1696년, 1743년(영조 19), 1763년(영조 39), 1780년(정조 4), 1817년(순조 17), 1871년(고종 8)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렇듯 임진왜란 이후 해인사에는 무려 일곱 차례의 큰 불이 났으나, 팔만대장경이 봉안된 장경판전 건물은 아무 피해가 없었다. 이와 같은 화재로 장경판전을 제외한 해인사의 당우들은 모두 1817년 이후에 지어졌다. 특히, 1818년 때의 중건은 1488년(성종 19) 학조대사의 해인사 중창 이후 해인사의 중건 역사상 획을 긋는 큰 불사였다.

<강화 선원사지;팔만대장경 제조터>

네 번째 위기는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6.25전쟁 때이었다. 고려대장경판은 해인사와 함께 1950년 발생한 6・25전쟁 때 잿더미로 변할 위기를 맞았으나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낙동강까지 내려온 인민군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퇴각로가 차단되었는데, 이때 낙오된 인민군 약 900명이 해인사를 중심으로 가야산에 숨자 이들 공비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미군 사령부는 1951년 9월 18일 해인사에 공중 폭격을 단행하는 작전을 편다.

하지만, 당시 편대장 김영환(1921~1954) 대령은 팔만대장경의 중요성을 알고 폭격 명령 지점인 해인사 대적광전 앞마당 상공에서 기수를 돌려 선회하면서 편대기들에게 폭격 중지를 명령 내렸다. 김영환 대령은 편대장의 지시 없이는 절대로 폭탄과 로켓탄을 사용하지 말 것, 그리고 기관총만으로 해인사 밖 능선에 숨은 인민군 진지를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그날 저녁 명령 불복종의 경위를 추궁하는 자리에서 김영환 대령은 태평양전쟁 때 미군이 일본 교토를 폭격하지 않은 것은 교토가 일본 문화의 총본산이라 생각한 점을 들며 우리 민족에게 소중한 유산인 팔만대장경을 수백 명의 공비를 소탕하기 위하여 잿더미로 만들 수 없었다고 답한다. 이러한 대령의 문화유산에 대한 식견과 의지가 없었다면 지금의 팔만대장경을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팔만대장경에는 불교 경전 내용과 더불어 13세기 중엽의 역사 및 문화를 밝힐 수 있는 간기 및 지·발문과 최소 1,800명 이상의 각수들이 새겨져 있다. 이들 자료는 당대 역사와 불교문화·출판인쇄술·국문학·서지학 등 다양한 학문연구와 고려왕조실록 복원의 원천 텍스트로 그 가치를 가진다.

또한 팔만대장경은 13세기 중엽 잔혹한 몽골침략과 최씨무인의 파행적인 정권운영으로 인해 고려왕조 개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겪던 시기에 외적 격퇴와 현실모순의 극복을 염원·실천하기 위해 16년 동안 국가 사업으로 조성되었고 국왕과 왕족, 관료, 불교·유교지식인, 일반 백성 등 당대 사회계층 및 불교 종파를 초월한 통합의식을 함축적으로 담은 민족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1995년에는 해인사 장경판전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2007년에는 ‘해인사 고려대장경판과 제경판’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팔만대장경은 동아시아지역의 한역대장경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발전시킨 불교유산이기도 하다. 초조대장경과 국내 사원 전래 경전, 중국 북송 개보판대장경 및 거란대장경 등 13세기 중엽까지 전하던 고려 및 중국 한역대장경의 경전 전체 구성체계와 내용을 총결집시켜 계승하는 동시에, 이를 새롭게 발전시켰다.

이에 이후 동아시아 불교 경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19세기 말~20세기 초 청나라와 일본에서 빈가대장경과 축쇄대장경, 대정신수대장경을 만들 때 팔만대장경은 그 핵심적인 근거 자료로 채택되었다. 또한 17세기에는 일본 천태종의 종존이 동경 건인사 소장의 팔만대장경을 저본으로 1614년부터 1624년까지 조성하다가 중단된 소위 종존판이라는 목판대장경에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 경판은 개별 경판의 판식과 간기 형식까지도 팔만대장경의 체제를 수용하였다. 이처럼 팔만대장경은 17세기 이후에도 동아시아 한역대장경의 조성과정에서 핵심적인 텍스트로 기능하였던 것이다.

팔만대장경은 13세기 당시까지 전래하던 국내의 초조대장경과 사원 전래본, 북송의 개보칙판대장경, 거란대장경 등을 근거로 경전 내용의 오류와 오탈자 등을 바로잡는 등 교정의 정확성을 기하였다. 그 노력의 산물은 개태사 승통 수기 등이 저술하여 팔만대장경에 새로 편입한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 30권에도 반영되어 있다.

18세기 초기 여러 종류의 한역대장경을 대조 교정한 일본의 학승 인징도 팔만대장경의 내용과 교정을 '모든 나라에서 견줄 만한 짝이 없는 대장경'이라 극찬하였다. 이처럼 팔만대장경은 13세기 중엽 고려 불교계가 동아시아사회에서 가졌던 최고의 불교 교학 역량을 반영하고 있다. 현재 팔만대장경은 국보 제 3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5년 해인사 장경판전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2007년에는 해인사 고려대장경판과 제경판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