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실록 제13권에 기록된 왕의 전교 한 부분에 강화도에 온실을 제작하여 꽃과 채소를 재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최근 이 자료를 바탕으로 강화군과 양평군에 온실을 복원하였다.
때는 1471년 1월의 추운 어느 날. 궁궐에 쓰이는 꽃을 키우는 기관인 장원서에서 철쭉과 일종인 영산홍 한 분을 임금께 올리자, 왕은 “초목의 꽃과 열매는 천지의 기운을 받는 것으로 각각 그 시기가 있는데, 제때에 핀 것이 아닌 꽃은 인위적인 것으로서 내가 좋아하지 않으니 앞으로는 올리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겨울에 피운 봄꽃을 좋아하고 말고는 성종 임금의 취향 문제이나, 그 옛날에 어떻게 겨울에 꽃을 피울 수 있었던지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조선시대에도 온실이 있었을까? 세계 최초의 온실로 알려져 있는 독일의 온실이 1619년에 지어졌다.
그런데 2001년 발견된 『산가요록』이란 책이 그 해답을 안겨주었다. 이 책은 15세기 중반 의관으로 봉직한 전순의가 쓴 생활과학서다. 당시 농업기술과 함께 술 빚는 법, 음식 조리법, 식품 저장법 등 생활에 관한 많은 정보를 전해주고 있다. 이 가운데 「동절양채」편, 즉 ‘겨울에 채소 키우기’ 항목에 당시 온실 건축에 관한 세 줄의 기록이 나온다.
이에 따르면 남쪽을 제외한 삼면을 진흙과 볏짚으로 쌓은 흙벽돌로 벽을 쌓고, 바닥은 구들로 만들고 그 위에 30센티미터 정도의 배양토를 깔았으며 45°로 경사진 남쪽 면은 창살에 기름먹인 한지를 붙여 막았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한지온실의 성능은 어느 정도였을까?
온실은 난방, 가습, 채광이라는 세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유럽에서 전해진 현대 온실은 난로로 데운 공기를 바람으로 불어넣어 온실 안의 공기 온도를 높이는 방식을 사용한다. 이 방식은 식물에 많은 스트레스를 주면서도 차가운 땅까지는 데우지 못하는 단점을 갖는다. 그래서 최근에는 땅에 난방 파이프를 설치하여 뿌리가 미치는 흙의 온도를 높이는 ‘지중가온방식’이 개발되고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 온실에는 이미 온돌이 설치되어 흙의 온도를 25℃로 유지할 수 있었다. 온돌은 아침과 저녁으로 두 시간씩 덥혔는데, 이때 아궁이에 가마솥을 얹고 물을 끓여 수증기가 온실 안으로 흐르게 하였다. 이로써 실내 온도와 함께 습도를 높일 수가 있었다.
조선이 유럽보다 최소한 170년 이상 앞서서 우수한 온실을 가질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도 ‘한지’의 역할이 컸다. 판유리가 없던 시절인 조선의 기술자들은 책 종이와 창호지로 쓰이는 한지에 들기름을 먹여서 채광창으로 이용하였다.
유리나 비닐 온실에는 실내외의 온도차에 따라 새벽에 이슬이 맺힌다. 찬이슬은 오전의 햇볕을 차단하여 실내 온도를 낮추고 식물의 광합성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작물에 그대로 떨어져서 큰 해를 미치게 된다. 하지만 한지 온실에는 이슬이 맺히지 않는다. 들기름은 종이 섬유 사이의 빈 공간을 채워 한지가 방수성을 갖게 한다. 그런데 빗방울과 같이 큰 액체 입자들은 기름 때문에 종이 섬유 사이의 공간을 통해 온실 안으로 들어올 수 없지만 들기름이 종이 섬유 사이의 공간을 완전히 메우는 것이 아니어서 작은 수증기 입자들은 한지를 통해 바깥으로 배출되기 때문이다. 기름먹인 한지는 ‘고어텍스’의 원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온실의 역할을 할 수 있으려면 빛의 투과성이 좋아야 하는데, 한지가 빛을 투과시킬 수 있을까? 한지는 불투명하지만 기름 먹은 한지는 팽팽하게 얇아지면서 반투명해진다. 한지를 구성하는 종이섬유와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공기의 빛 굴절률은 다르다. 굴절률이 다른 두 물질이 함께 섞여 있으면 빛은 산란되어 반사되게 된다. 그러나 기름의 굴절률은 종이섬유와 비슷하여 산란되는 빛의 양이 적어지므로 빛의 투과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한지 온실에서는 파종 후 3~4주면 채소를 수확할 수 있었으며, 한겨울에도 여름 꽃을 궁궐에 공급할 수 있었다. 한지로 채광창을 만들고 온돌을 이용하여 기온과 습도를 조절했던 조선시대 15세기 온실은 현대 온실보다도 더 과학적이었다는 사실이 실험을 통해 속속 밝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