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청 측우기 - 세계 최초의 우량계
상태바
기상청 측우기 - 세계 최초의 우량계
  • 이창희
  • 승인 2012.06.12 06: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의 산수풍물] 장영실과 문종 중 누가 발명했나?

측우기는 보물 제561호로 조선시대에 우량(비가 내린 양) 측정용으로 쓰인 관측장비이다. 측우기를 발명한 사람은 문종이라는 설과 장영실이라는 설이 분분하다. 최종적으로 누가 발명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세종은 홍수에 의한 피해를 막기 위해 우량 측정으로 기상현상 파악을 위해 1423년경에 비가 온 뒤에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어간 흙의 젖은 깊이를 재어서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비가 오기 전 토지 상태가 건조한 또는 습한에 따라 같은 정도 비가 왔는데도 우택(흙의 젖은 깊이)은 같지 않았고 또 그것을 실제로 측정하는 일에 어려운 점이 많았다. 이 때문에 18년 가량 실시한 뒤에 우택 제도는 폐지하고 1441년(세종 23)에 측우기를 발명하여 관상감 관상감과 각 도 감영에 비치하고 우량을 측정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때 만든 측우기 구조는 주철제로서 깊이 약 41㎝와 지름 약 16㎝의 원통형이었다.

돌로 만든 대 위에 올려놓고 비 온 뒤에 그 속에 고인 빗물에 주척(자)을 꽂아 세우고 물의 깊이를 푼(약 2㎜) 단위까지 재어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듬해인 1442년에는 측우기 규격을 약간 줄여서 깊이 약 31㎝와 지름 약 14㎝로 하였다.

그 까닭은 실제로 사용해보니까 깊이 약 41㎝에 빗물이 많이 차는 일은 거의 없으며 자를 꽂아 빗물 깊이를 재기에는 너무 깊어서 불편하였고, 또 측정한 뒤에 물을 쏟아버리고 다시 측우대에 세울 때 너무 무거워서 취급하는 데에 불편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경에 확인된 측우기는 4기로 모두 황동제였다.

첫 번째는 경복궁 내 관상감에서 쓰던 것으로 깊이 306㎜와 안지름 147㎜이었고, 둘째는 대구의 선화당에 있던 것으로 깊이 217㎜와 안지름 147㎜, 셋째는 함흥에 있던 것으로 깊이 293㎜와 안지름 145㎜이었다. 넷째는 공주에 있던 금영측우기로 이것만은 특이하게 세 부분 조립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안지름은 140㎜, 조립할 때의 깊이는 315㎜이지만 상단과 중단, 하단 각각의 깊이는 106㎜와 105㎜ 및 103㎜이고 조립할 때 겹쳐지는 부분이 3㎜이며, 전체의 무게는 6.2㎏이었다.

런데 관상감 측우기는 국권상실 무렵에 없어졌고, 함흥 측우기와 선화당 측우기는 6.25전쟁 중에 모두 없어졌다.

금영 측우기와 주척은 1915년경 일본인 와다가 일본으로 가져가서 일본 기상청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이것을 1971년에 돌려 받았으나 아직 주척은 돌려받지 못하였다.

금영측우기는 1837년(헌종 3)에 만든 것으로 보물 제561호로 지정되어 현재 기상청에 소장되어 있다.

이탈리아 갈릴레이(Galilei, G.)의 온도계 발명(1592년)이나 토리첼리(Torricelli, E.)의 수은기압계 발명(1643년)보다 훨씬 앞선 세계 최초의 기상관측장비다. 따라서 우리나라 측우기는 세계 기상학사에서 관천망기 시대에 뒤따르는 측기 시대를 150년 정도 앞당긴 것이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