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판단을 한다. 그 판단의 준거가 전문가가 쓴 책일 경우 책내용을 진리인양 믿는다. 만약 책 내용 자체가 오류이거나 편견에 치우친 경우에도 전문가라는 권위에 눌려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가여운 존재가 또한 우리 인간인 것이다.
문학 작품을 읽고 우리는 작가를 판단한다. 그 작가가 쓴 책이나 글을 다양하게 읽고 독자 스스로 판단하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연구자가 아닌 이상 대개는 권위자가 쓴 서평이나 작품평, 작가론 등을 접하고는 작품과 작가를 규정짓는다. 아니면 권위자가 소개한 작가의 글 몇 편을 읽고 우리 스스로 작가를 판단한다. 그렇게 섣부른 규정짓기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크게 보면 작가에게 죄를 짓는 행위이다. 우리 문학사에 김소월만큼이나 쉽게 규정지어진 시인도 드물 것이다. 남과 북 두 체제 모두에서 그의 시가 애송되고 사랑받고 있지만 그 명성만큼이나 우리는 시인 김소월을 모른다.
옷과 밥과 자유
김소월
공중에 떠다니는
저기 저 새요
네 몸에는 털 있고 깃이 있지
밭에는 밭곡식
논에는 물베
눌하게 익어서 숙으러졌네
초산(楚山)지나 적유령(狄踰靈)
넘어선다.
짐 실은 저 나귀는 너 왜 넘니?
1920년대 후반에 발표된 위 시에서 새는 옷도 있고 자유도 있으며 또한 논과 밭엔 눌하게 익은 곡식도 많은데 나귀는 옷도 먹을 음식도 게다가 자유마저 없다. 그저 고단하고 구속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나귀의 모습에서 시인은 자신의 처지를 발견한 것이다. 무거운 짐을 싣고 적유령 고개를 넘는 나귀가 바로 시인이며, 자유를 찾아 국경을 넘는 동포이며, 자본가 지주와 권력의 횡포에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돌 수밖에 없는 백성인 것이다.
김소월은 여성적인 서정의 향기만 냈던 시인이 아니라 당대 사회구조의 모순과 동시대인들의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도 그의 가슴에 함께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를 보면 서정도 결국 시대현실을 통찰할 때 얻어진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또 다른 시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에서는 땅을 빼앗기고 집 잃은 농민의 애환을 그리기도 했다. 그렇다고 김소월을 민족적 저항시인, 참여시인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 다만 한 사람이, 한 위대한 시인이 이렇다, 라고 규정지어지는 것에 대해 안타까울 뿐인 것이다. 다양한 관점과 시선으로 예술에 감응하고 작가를 바라볼 수 있는 생각의 유연성이 필요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