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는 인류가 지금까지 만들어낸 아주 훌륭한 그릇 가운데 하나다. 송이나 고려 때에는 청자가 세계 최고의 그릇이었다. 어떤 이들은 청자가 백자까지 능가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미학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기술적으로는 백자가 청자보다 앞서 있기 때문이다. 백자가 청자보다 뒤에 나왔으니 기술적으로 진보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떻든 당시에 이렇게 훌륭한 그릇을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고려와 송밖에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한국은 이렇게 수준 높은 자기를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만든 나라다. 이런 사실을 더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도자기 자체에 대해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도자기라는 말을 그냥 쓰고 있지만, 사실 ‘도기’와 ‘자기’는 구분해야 한다.
도기는 우리가 찰흙이라고 부르는 붉은 색의 진흙인 도토를 가지고 만든 것이다. 이 흙은 500도에서 1,100도 사이의 온도로 구어서 그릇을 만든다. 이것보다 더 질이 우수한 게 자기인데 이 그릇은 자토로 만든다. 자토는 1,200도 이하에서는 익지 않고 1,300도 정도가 되어야 익는다. 이렇게 높은 열에서 흙을 구우면 흙이 훨씬 가볍고 단단해진다. 그런데 가마 안의 온도를 1,300도까지 올리려면 예전엔 한 3일 정도 걸렸다고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같은 온도를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여러 기술이 있어야 인류 최고의 그릇인 자기를 만들 수 있었는데 여기에는 또 흙 문제가 있다. 온도가 1,300도나 되는 곳에서 녹지 않고 견딜 수 있는 흙이 흔한 건 아니다. 금속인 동으로 만든 종도 1,000도 이하에서 녹아내리는데 1,300도에도 견딜 수 있는 흙이라면 대단한 것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자토인데 이 흙은 돌가루로 되어 있고 색깔은 흰색이나 회색을 띠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고령토라고 하는데 중국 발음으로는 ‘카올린’이 된다. 이 흙으로 만든 그릇에 청색 유약을 입히면 청자가 되고 백색 유약을 입히면 백자가 되는 것이다.
유약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유약을 알고 보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다. 나무 타고 남은 재를 물에 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릇을 만들 때 한 번 구운 다음 이 물(유약)을 발라 다시 구우면 그릇이 완성되는 것이다. 유약을 발라야 그릇이 아름다워지고 흉터도 나지 않으며 방수 처리도 된다. 유약은 이렇게 아주 간단한 것이지만 모르면 이용할 수 없다.
그런데 유약을 발견하게 된 경위가 재미있다. 이것은 청자가 나오게 된 배경과도 관계가 깊다. 그릇을 굽는 가마에서 어느 날 나무의 재가 그릇 위에 앉게 된다. 그랬더니 그 부분이 푸른색을 띠면서 막이 생겼다. 이게 바로 유약이었다. 예를 들어 소나무나 참나무 재가 1,200도 같은 고온에서 녹으면 콜라병 같은 유리 색이 난다.
청자가 나오게 된 배경도 재미있다. 청자는 옥을 인조로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옥이란 고대 중국에서 매우 귀중한 돌이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에도 곡옥이라 해서 굽은 옥을 왕관처럼 아주 귀한 곳에 쓴 것을 알고 있다. 중국인들은 이런 옥을 흙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다 방금 전에 본 것처럼 토기, 즉 질그릇에 앉은 재가 푸른색을 내는 것을 보고 청자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청자가 중국에서는 이미 3세기부터 만들어졌다고 하니 그 역사가 대단히 긴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청자라고 할 때 ‘blue' 청이 아니라 ’green' 청이니 청자보다 ‘녹자’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녹청자는 세계 최초로 한국 인천 서구 검암동에서 제조했다고 한다.
이런 청자가 중국에서 실용화되고 보급되는 건 9세기경에 선승들이 차를 많이 마시면서부터이다. 청자로 찻잔을 만든 것이다. 이 청자 잔은 선불교가 유행하던 고려에도 수입되었는데 고려인들은 이런 청자기를 스스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고려가 청자를 만들기 시작한 건 중국에서 온 중국인 도공들에 의해서라고 한다. 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중국이 혼란에 빠졌을 때 중국 도공들에게 고려 조정이 후한 대접을 약속하고 그들을 유치했다고 한다.
이 일은 중국 귀화인으로서 고려 조정으로 하여금 과거제를 도입하게 한 쌍기가 주도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고려는 10세기 후반에 개경 근처에서 처음으로 청자를 만들게 된다. 우리가 청자를 이렇게 늦게 만들게 된 것은 그 기술이 최고의 하이테크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도 17세기 초에 조선의 도공들이 가서 자기 만드는 법을 가르쳐준 다음에야 만들기 시작했고 유럽은 더 늦어서 18세기 초가 되어서야 독일의 작센 지방에서 자기를 만드는 데 처음으로 성공하게 된다.
그런 최고의 그릇을 만들 수 있었던 나라는 중국과 우리뿐이었는데 우리 청자는 앞서 말한 것처럼 중국의 것을 두 가지 면에서 앞서 갔다. 상감 기법과 뛰어난 비색이 그것이다. 우선 상감 기법을 보면, 좀 용어가 어려워서 그렇지 알고 보면 별 것 아니다. 원래의 기물에 홈을 파서 다른 재료를 넣는 것이다.
청자 겉면을 얇게 판 다음 학이나 꽃의 모습에 맞게 백토나 자토를 그곳에 넣는다. 그러면 구워진 후에 백토는 흰색으로, 자토는 검은 색으로 나온다. 우리 청자에 나오는 많은 이미지들은 바로 이 기법으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 기법은 중국에서는 전국 시대(BC 5~BC 3세기)에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 이때에는 철이나 동으로 만든 그릇에 홈을 파고 금실이나 은실을 넣었다고 한다. 고려는 이 기법을 도자기에 처음으로 응용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독창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비색도 그렇다. 이것 역시 중국에 있던 것이지만 고려청자의 비색이 신비로울 정도로 뛰어났기 때문에 중국을 능가했다고 하는 것다. 가장 좋은 비색이 나오려면 유약에 3%의 철분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것보다 덜 포함되어 있으면 약한 연두색이 나오고 더 많이 있으면 아주 어두운 녹색이 나온다고 한다. 이런 철분이 어느 나무에 있느냐를 아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은 아주 숙련된 도공들만 알 수 있다. 아마 고려의 도공들은 이런 비밀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시 말하지만, 고려청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실용적인 그릇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인들은 조선 백자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고려청자는 너도나도 갖고 싶어 했다. 그런 높은 수준의 기술과 미학을 갖고 있던 나라가 고려였다. 그리고 그 기술은 어떤 형태로든 조선으로 전승되었을 터이고 지금 우리에게도 전수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나라 회사들이 서양 기술을 가져다 세계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정부는 하루빨리 국립도자기전문박물관을 건립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