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85세로 자원봉사생활도 '정년퇴임'한 최병렬 할아버지
“지금은 남동구 논현동이지만 내가 태어날 때는 부천군 남동면 논현리였어요. 벌써 80년이 넘은 일이네. 논현동에 해주 최씨 집성촌이 있었어요.” 3월 20일, 연수구에 사는 최병렬 할아버지를 만나 40년 넘게 교직생활을 한 이야기와 남동구 논현동 일대와 연수동, 용의도가 예전에는 어땠는지 들어봤다.
“인천에서 평교사를 하다가 경기도 김포로 발령받았어요. 그때는 인천도 경기도니까 그쪽으로 간 거죠. 그 다음에는 가평 대성리, 그 다음에는 집 근처 시흥으로 왔죠. 교장 승진하고서는 초임지가 부천군 용의면 남북리였어요. 용유초등학교는 면소재지라 12학급이나 됐어요. 김포 양곡은 규모도 컸고 역사도 깊었어요. 거기에 오래 있었어요. 그러다 인천이 직할시가 되면서 인천에 못 들어왔죠. 거기서 10년 가까이 있다가 지금 군포시 둔대초등학교에서 정년퇴임했어요.” 최 할아버지가 40여년 동안 근무한 곳은 인천을 비롯해 김포, 시흥, 군포, 화성 등 당시 경기도 일대다. 행정구역이 경기도였던 인천이 직할시로 바뀌면서 인천과 경기도는 일터로서 완전히 분리된 것이다.
최 할아버지가 근무하던 용유도는 지금은 중구로 편입되었지만 당시는 용유면이었다. 연안부두에서 하루에 한 한 번 왕복 배가 있었다. 당연히 통근할 수 없었다. “왜정시대부터 면소재지였는데 일본인 교장이 쓰던 관사가 있었어요. 그때는 결혼한 때라 주말마다 배 타고 집에 왔어요. 장남이지만 논현동에서 나와 독립적 생활을 했어요. 부모님은 농사에 종사하셨죠. 해주 최씨는 양반이라 지주로 살고 농사를 짓지 않았어요. 그런 세월이 오래가다 보니 가운이 기울고 아버지가 농사를 직접 짓게 되었어요. 어머니는 몸이 약하셔서 어려운 병마에 시달렸죠. 시방 나이를 자꾸 먹다보니 불효자식으로 부모님께 미안하단 생각이 들어요.” “지금은 도회지가 돼서 논현1동인데, 아니 작년부터 논현2동으로 나뉘었다고 하던데요. 우리집은 ‘논고개[論峴]’였고, 언덕 너머가 논현2동 ‘산뒤’라고 했어요. 예전에는 소래 가려면 사거리, 지금은 도림동이라고 하는데 그 고개를 넘어가는 길과, 호구포로 돌아오는 길밖에 없었어요. 내가 논현을 떠나온 지 오래됐지만, 가끔 가보면 어디가 어딘지 몰라요. 수인선도 소래역이 있었지. 간이역은 호구포역이 있었고, 우리 동네 논고개도 한때 간이역이었어요. 정식으로는 소래역, 남동역이 있었지. 간이역은 얼마 가다 없어지고 했어요.”
최 할아버지는 예전에 수인선을 ‘수없이’ 탔다. “예전엔 ‘똥차’라고 했어요. 레이루 간격도 좁고 차도 전차 모양으로 두 개 정도 달고 왔다갔다 했어. 물론 속도도 느리지만 고개를 올라가지 못해. 사람들이 내려서 밀었지. 전부 시골 사람들 농산물이었어요. 아낙네들이 집에 있는 농산물 갖다 팔구. 그게 기차야, 해방까지. 수인역에 시장이 있었어요. 지금도 수인역전에 시장이 있긴 하지만 그전같진 못하지. 기차에서 내리면 거기서 흥정하구, 사람이 많았어요. 그게 몇 십 년 전 얘기야. 수인선이 없어졌다 다시 전철로 바뀌었지만.” 지난해에 개통된 수인선을 타봤다는 할아버지는 수인선이 깨끗하고 좋았다고 한다. 일부러 발품을 팔아 어떤가하고 송도역까지 가봤다.
할아버지는 연수동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연수동은 완전 갯벌이었어. 부근에 남동염전이 있었지. 1구 2구 3구. 여기가 갯바닥이야. 동춘동은 농촌 겸 어촌이었지. 얼마 전까지 그물들 맸지. 몇 년 전까지는 조개를 잡아다 까서 팔았잖아요. 동춘동 동막 앞바다에 그물 매고 생선 잡아다 많이 팔았어요. 간척지 만들어 논 풀어서 농사도 지어먹구. 하여간 영세민들이 바다에 가서 조개 캐서 팔구. 돈 있는 사람들은 그물 내서 생선 팔구. 염부 노릇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남동역 근처에 저수지가 있고, 염전이 있는 거거든. 햇빛으로 절여서 소금 만들잖아요. 수인선 타고 가면서 염전 구경도 할 수 있었어요. 오이도쪽 군자염전은 다 총독부 국유였어요. 담배처럼 전매였어. 지금은 담배만 전매품이거든. 그때는 인삼, 소금, 담배 다 전매품이었어요.”
최 할아버지는 65세에 정년 퇴임하고서 생활이 완전히 달라졌다. 건강 장애가 오는 게 아닌가 걱정해서 탁구와 테니스로 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봉사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부천시 심곡번동사무소에서 방학 때 초등학생과 중등학생들한테 한자교육을 몇 년 가르쳤다. ‘대한삼락회’라고 퇴직한 교사들 모임에서 몇 명이 나누어 가르친 것이다. 그후에는 아파트 노인정에서 한자를 가르쳤다. 북구도서관에서는 ‘금빛교육봉사단’ 단원으로 10년 넘게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한테 가르쳤다. 85세 되던 지난해에 ‘연령제한’에 걸려 그만두었다. “신체적으로 위험이 따르거든. 규정대로 85세까지 한 거야. 위험하니까 보험도 들어주는 거야. 말하자면, 자원봉사도 85세 정년퇴임인 거지”라며 최 할아버지는 환하게 웃었다.
하루를 어떻게 지내시나 물었다. “몇 년 전부터 한 달에 한 번 의사처방으로 고혈압, 고지혈증 약을 먹어요. 3,4년 전부터는 무릎이 아파서 보행이 곤란해요. 그래서 일주일에 두세 번 보건소 가서 물리치료, 안마를 받아요. 시간 있으면 텔레비전 보고 신문이나 책 볼 때도 있고 라디오 들을 때도 있어요.” “단비라는 시츄랑 살아요. 여러 가지로 위안 받고 재미있어요. 얼마나 귀여운지 가끔 웃음도 나요. 내가 나갔다 들어가면 사람 이상으로 반가워해요. 막내딸이 분양 받아서 기르다 직장일로 이사가면서 맡겼어요. 집사람이 세상 떠나기 전에 맡겼는데, 집사람이 떠나고 내 몫이 된 거지. 벌써 5년이나 됐네. 5남매를 뒀는데, 아들들은 가까이서 살아서 괜찮아요. 다만 두 딸이 건강이 좋지 않아 항상 가슴이 아파요.” 최 할아버지는 잠시 울적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단비 이야기를 꺼냈다. “때 되면 단비한테 꼬박꼬박 밥 챙겨주는 것도 일이야. 사랑하고 귀여워해야 하는 거지. 요즘엔 내가 귀찮으니까 산책도 많이 못 시키고 목욕도 많이 못 시켜요. 며늘애들한테 목욕 시키라고 할 때도 있어요. 의료보험도 안 되니까 병원 가는 것도 부담이죠. 사실, 우리 단비는 아주 귀여워요. 아주 미인이야. 어느 개는 생김새가 못한데, 우리 단비 같은 미인은 없다고 늘 말해요.” 할아버지의 단비 사랑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내가 나오면 한풀 꺾여서 외롭고 쓸쓸한 표정을 지어요. 쫓아다니지도 않고 앉은 자리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거든. 그렇게 시켰어. 문 열면 바로 문 앞에 와 있어 꼬리를 흔들고 기어들고. 사람보다 정이 더 가거든.”
최 할아버지는 교직생활 초반에 아주 서운한 일이 있었다. 어느 학생이 전학을 간다고 하는데 ‘왜 전학을 갈까?’하고 오랫동안 고민을 했다. “그 학생이 백가였는데 인천서 안산으로 전학 간다는 거야. 내가 교단에서 부족한 점이 있나 생각하게 되었어. 그 학생이 부모 따라 이사를 가서 가는 건데 왜 그렇게 서운했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할아버지가 용유에 근무했을 때는 날씨가 중요했다. 폭풍주의보라도 내리면 집에 다녀가지 못했다. “그게 섬이지. 지금은 공항이 됐지만, 용유도에서 영종 삼목까지 바닷길을 걸어서 나올 수도 있었어요. 섬사람들은 ‘감 타고 나간다’고 했지. 나도 딱 한 번 경험삼아 감 타고 나왔어. 물 빠졌을 때 바닷길에 놓인 돌을 밟고 나오는 거야. 4㎞ 정도 걸었지. 우리 용유초등학교 옆에 용유중학교가 있는데, 거기 교장과 교사들은 감 타고 잘 나가더라구. 삼목까지 나가서, 거기가 운서동이야. 거기에서 부두까지 나가서 배 타고 20분 정도 가면 월미도나 연안부두인 거지.” 용유도에는 막걸리 양조장이 있었다고 한다. “곡식이 아니라 밀가루로 만들었어. 난 술이 체질적으로 안 맞았어. 교감 시절까지 술을 못 먹었어. 교장 승진해서는 시골 사람들이 텃세를 부렸어요. 지금은 김포가 도시가 됐지만. 교장이 되면 술을 먹어야 했어요. 대인관계에서는 필요했어요. 지방 유지라는 사람들하고 어울려야 했거든. 좋아서 먹는 사람도 있지만, 난 그때 ‘필요하구나’ 느낀 거야.” 어쩌다 뭍에 나오지 못할 때는 섬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물었다. “천상 뭐해. 다들 술 좋아하는 사람들은 학부형들과 술 먹고. 날이 좋아도 못 나올 때는 우럭 망댕이 낚시하면서 소일했지. 물때에 따라 소라를 줍기도 했어. 해변가에 뭐가 막 굴러와. 가만히 보니까 그렇게 잡는 거야. 순무는 용유에도 많이 심더라구. 순무김치맛이 참 좋았어.”
할아버지는 정년퇴임 후 남촌동에 있는 농토에 채소를 심기도 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 가서 호박, 옥수수, 채소, 고구마를 심었다. 아파트 할머니 몇 분하고 다녔는데 거리가 있어서인지 계속 하기가 쉽지 않았다. “미리 생각했으면 면허도 미리 얻어나서 자가용으로 다니면 좋았을 텐데. 요샌 다리가 아파서 한 달에 한 번도 못 가요. 거기 가면 공기도 좋고, 햇볕도 좋고, 건강도 좋아지죠. 농사꾼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먹구 살아요? 고마운 걸 알아야 할 텐데, 요샌 다들 몰라요. 내가 태어난 곳은 순전히 농촌이었죠.” 요즘 최 할아버지는 정년퇴임한 교장들 모임인 ‘삼락회’, 직장 친목회, 종친회, 10년 넘게 봉사활동한 북구도서관 모임을 다닌다. 북구도서관에서는 행사가 있을 때마다 빠짐없이 연락해온다. 최 할아버지는 요즘이 참 어려운 때라고 말했다. “세계적으로 불황이라고 하구, 힘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자신있게 말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아이들 말로는 ‘큰소리’ 치는 거지. 어떻게 감당할까 걱정이야. 경제도 어렵구. 뭐든 생각대로 되진 않거든. 요새가 이래저래 참 어려운 때야.”
할아버지는 살면서 잊을 수 없는 기억 세 가지가 있다. “언젠가 이른 아침에 채소들에 맺힌 이슬방울들을 봤는데 참 맑고 예쁘더군. 또 한번은 유치원을 지나는데, 예쁜 옷을 입은 유치원 꼬마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오는 거야. 참 보기 좋더군. 또 하나는 오래전에 동료하고 오이도를 갔어. 지금은 그 동료도 떠나고 없지만. 그때 바다에 비친 석양빛이 그렇게 황홀할 수가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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