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따뜻한 햇살이 온누리에 번지고 겨우내 움츠린 생명들이 하나둘 기지개를 켠다. 단지 봄이라는 시간이 와서 생명이 싹 트고 움트는 것은 아니다. 모든 생명의 출발점은 이미 겨울에 시작된 것이다.

‘적산온도’라는 것이 있다. 좀 더 확실한 뜻을 알려고 사전을 들추니 ‘식물의 생육에 필요한 열량을 나타내기 위하여 생육 일수 동안의 일일 평균 기온과 기준 온도의 차이를 합산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설명이 더 어렵다. 쉽게 말하자면 봄이 오면 싹이 저절로 트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기운을 받아들이는 정도가 일정 온도 이상 누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뜻한 나날이 몇 날이고 계속되어 그 따뜻함들이 모이고 모여 합쳐진 온도라는 것이다. 모든 씨앗은 싹을 틔우려고 부단히 따뜻함을 모으고 모은다. 따라서 추운 날은 적산온도의 일수에 포함되지 않는다. 농민들의 대표적 작물인 벼농사도 마찬가지이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이 적산온도에 민감하다. 삶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어찌 볍씨만이, 식물의 씨앗만이 적산온도가 필요하겠는가. 이것을 우리들의 삶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 희망의 싹, 미래의 싹, 꿈의 싹을 틔우려면 적산온도가 필요한 것이다. 처음부터 이룰 수 있는 것은 없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고민과 방황과 노력과 땀과 선택과 집중과 희망과 절망과 흔들림과 결심을 거쳐야만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나 꿈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게 바로 우리 삶의 ‘적산온도’인 것이다.

꿈을 꾼다는 것, 희망을 안는다는 것, 목표가 있다는 것은 삶의 적산온도를 쌓고 있다는 것이다. 그저 단순히 계절 하나 바뀌어서 봄에 저절로 만물이 생동하는 게 아니라 겨울 동안 얼마만큼의 따뜻함을 쌓아 봄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자신만의 적산온도를 쌓을 수 있는 환경을 갖추는 것이 기회평등이며 공정사회인 것이다. 개인이든 사회이든 국가이든 봄맞이할 준비가 되었는가! 나부터 되돌아본다.

봄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비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그렇다. 봄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 오는 당신 같은 것.

눈부시게 달려오는 봄도 있을 것이고 뒤뚱뒤뚱 더디게 더디게 오는 봄도 있을 것이며 어쩌면 멀리멀리 달아나기만 해서 누군가에겐 결국 봄이 도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겨울은 있다. 맞닥뜨리는 삶의 겨울을 얼마나 지혜롭고 끈기있게 넘으면서 적산온도를 쌓는가에 따라 봄이 길을 잃기도 되돌아가기도 두 팔 벌린 채 다가오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겨울 내내 쉬고 있던 농기구들이 하품을 하고(이은옥, 어성전의 봄) 기지개를 켜는 것도 다 사람들의 손을 거쳐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봄비가 꾹 견뎌왔던 눈물 되어 온몸으로 전율이 이는 것도 따뜻함을 차곡차곡 쌓아온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이지 않겠는가!

봄비 1

손병걸

쉿!

봄비

봄비 오신다

꾹

견뎌왔던

눈물을 흘릴 때야

온 몸에

짜릿한 전율이 일지 않던가

세상에나

언 땅을 헤집는

저

은근한 힘을 좀 봐

햐!

젖어도 되겠는가

들릴락말락

봄비

저

봄비 오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