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칼럼] 하석용 / 공존회의 대표 · 경제학 박사
백년전쟁이라는 다큐물을 놓고 논쟁이 뜨겁다. 이 땅에서 일제가 물러간 지 70년이 되었고 박정희라는 문제의 정치인이 암살당한 지도 35년이 됐다. 이제 그의 딸이 이 나라 국민들의 선택에 의해 국가의 원수가 됐다. 그런데 아직도 이 땅에서는 독립투쟁과 반독재 투쟁이 현재 진행형이다. 일견, 원칙을 세우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긴 세월이라도 넘어서는 집요한 이성(理性)의 사회를 보는 것 같아 기뻐해야 할 일인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주고받는 이 사회의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금세 그러한 고상한 희망은 사라지고 만다. 문제가 된 소위 다큐멘터리의 내용이 정당하고 아니고를 떠나 이 역사적인 사실을 바라보는 이 사회의 의식수준의 천박함과 패싸움에 또 다시 넌더리가 난다.
일제 강점기가 끝난 이후, 전후 통치권을 미군이 일본으로부터 인수하는 과정에서, 미 군정 이후 이 땅의 정치적인 주도권을 상해 임시정부의 세력이 아닌 이승만 세력이 잡아가는 과정에서 일제와 투쟁해 온 독립운동의 정신에 비추어 용납하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이제 대한민국의 지식인이라면 충분히 알만큼은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5.16이 쿠데타라는 것은 이 나라 정부가 이미 공식적으로 정리하였고 박정희가 독재를 저질렀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그 뒤의 군부 독재에 대해서까지도 이미 일정한 사회적 가치 판단이 끝난 시점이 아닌가.
우선 이러한 이야기가, 정밀한 학문적인 정리를 위한 것도 아니고 사실 여부에서조차 논쟁을 남기는, 엉성하게 선동적인 다큐물로 이 시점에 만들어지는 배경이 궁금하다. 또한 이러한 다큐물에 발끈하는 모습으로 마침 잘됐다는 듯이 애매한 진실 논쟁을 만들어 반전에 나서는 듯한 세력들도 바라보기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인간이 만든 어떠한 역사적인 사건들도 세월이 흐르고 해석하는 사람들의 이해가 갈리는데 따라 천만가지의 얼굴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역사학계의 상식이다. 그래서 언제나 역사의 재해석이 등장하게 마련이고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Carr의 명제가 성립한다. 오늘 현재 우리의 모습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어찌 미래의 학자들은 우리보다 더 잘 알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항상 실체라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고 우리가 팩트라고 믿는 어떠한 사실들일지라도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한한 다면성을 갖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성립한 이후 우리 사회는 이러한 사실의 다면성을 이용해 이해관계의 편을 만들고 싸움을 통해 권력을 만들어 왔다. 이 사회의 권력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오직 융통성 없는 고집과 “무지한 순결성”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으로 무책임한 소신, 그리고 그러한 미련함으로 갈라선 패거리들의 패싸움 속에서 탄생하고 유지되어 왔다. 그들의 생존의 논리는 조직 폭력배들의 그것과 전적으로 동일하다. 그러한 진행 속에서 이 사회의 전통적인 철학적 기반은 모두 “개똥철학”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사라지고 이 사회에는 이데올로기라는 미신의 유령만이 남아서 분열의 제의(祭儀)를 반복한다.
문제는 이번 “백년전쟁” 논란에서도 확인되는 것과 같이 이러한 패거리들의 권력 게임에서 항상 이유 없이 부당하게 피해를 입는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것이다. 논란의 결과가 어찌되었건 또 다시 대한민국은 태생과 성장과정이 부도덕한, 탄생하지 말았어야 하는 비극적인 존재로 조명을 받는다.
학문적인 울타리를 치고 그 속에서 전개하는 논쟁이라면 언제 어디에 쓰일지 모를 주제라 한들 다루지 못할 바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논쟁이 선동적인 장치들을 갖추고 사회로 튀어 나오게 된다면 사회적 유용성의 검증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현실적인 인간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되는 사건들은 비록 어제의 문제를 다룬다할지라도 피할 수 없이 “바로 오늘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이 따위 논란의 결과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우리의 오늘”은 어떤 것일까. 이제라도 태생이 불순한 대한민국을 뒤엎어야 하는 것일까? 부도덕하고 파렴치하게 기득권을 누려온 집단들을 솎아내서 단두대에 올려야 하는 것일까? 역사적 책임에 관한 영원한 연좌제 입법이라도 해서 역사의 귀감을 삼아야 하는 것일까?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하고.... 그런다면 과연 지금 우리 사회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사회정의? 민족정기? 국격(國格)?
아마도 사실을 사실대로(정말 사실인지 의심스런 부분이 적지 않지만) 밝히기라도 하자는 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으냐는 볼멘 항변이 있을 수 있다. “그래 좋다. 어디 이참에 한 번 해보자”라고 야릇하게 미소 짓는 낯익은 얼굴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내게 떠오르는 것은 또 다시 이 사회의 이전투구... 분열의 패싸움과 그를 통한 권력화의 탐욕뿐이다.
인류가 만든 지구상의 어느 시대 어느 나라가 도덕 위에 성립한 경우가 있는지 의문이다. 자유와 기회의 나라 미국이 인디언들의 피바다 위에 성립하였고 바티칸 공국조차 그 성립의 역사가 아름답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한다. 비록 민주라는 가치를 앞세웠다고 하지만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근대국가 성립에 도덕성을 보장 받을 수는 없다. 그래서 그 나라들은 오늘 모두 부정되어야 하는가.
당연하게도 옳은 것을 옳다 그른 것을 그르다고 말해야 한다는 데에 이의가 있을 수 없다. 대한민국을 부정하자고 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항변도 있을 수 있고 우리도 더 이상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이의도 안 된다는 법은 없다.
다만, 그 누구라도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대한민국을 욕되게 하거나 부정할 권리를 가질 수는 없다는 사회적 합의만은 분명해야 한다. 제 아무리 전 지구적으로 불멸의 가치 추구에 골몰하는 인사라 할지라도, 제 아무리 국가를 초월해서 민족의 가치에 자신의 영육을 헌신하는 민족주의자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생존의 조건이 되는 이 사회와 이 나라에 대해 사회적인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인간적인 덕목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인간은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렇게 저 마다 다른 우리 모두가 그 삶을 의탁하는 대한민국은 어느 개인이나 몇몇 집단의 것일 수 없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누가 잘못을 저지를 수 있을지언정 대한민국은 죄가 없다. 나라까지 끄집어내서 패거리를 강화하는 도구로 만든다면 그것이야 말로 오로지 파렴치일 뿐이다. 제발 죄 없는 대한민국을 흔들지 말라. 대한민국 그가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합의의 정신뿐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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