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칼럼] 하석용 / 공존회의 대표 · 경제학 박사
최근 미국의 리더십의 균열을 놓고 여러 사람들의 입과 머리가 바쁘다. 다소 성급한 것 같이 보이지만 민주주의의 몰락과 미국의 붕괴를 점치는 사람들까지 그 논란의 확산이 어디까지 갈지... 가히 21세기의 화두가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러한 미국의 극단적인 분열 현상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미 여러 경로를 거치고 난 뒤에 결정적으로 지난 해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미국은 돌이키기 힘들만큼 확실하게 50:50의 대결구도로 분열하고 있다는 사실을 표(票)로써 보여주었다.
미국은 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모여 살기 힘든 사람들끼리 잘 모여 살아가는 대표적인 나라의 모습을 보여 왔다. 독립전쟁, 남북전쟁, 제1,2차 세계대전, 수십 년 간 이어진 동서의 냉전 같은 나라 안팎의 위기들이 그러한 결속을 도와주기도 했지만, 미국의 단합과 번영을 뒷받침하는 범 미국적인 철학의 공유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청교도 정신, 자유와 기회의 땅, 평등, 준법의 약속, 실용주의, 개척정신... 이런 것들이 시대를 따라 미국을 이끌어왔던 이데올로기를 대표한다.
그러나 미국의 자본주의가 고도로 성숙한 시기를 지속하면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균열은 간극을 메우기 어려울 만큼 벌어져버렸고 어느 대통령 후보들의 연설에서도 “경제”라는 “돈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는 중심이 되기에 이르렀다.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철학적 중심이 무너지면서 이어서 사회를 이끌던 전통적인 백인사회의 리더십도 붕괴되었다. 오직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두 개의 집단으로 분열하여 간 것이다. 그러한 사회의 정치적인 권력이 두 개로 분열하고 접점을 찾지 못한 채 표류하게 되는 것은 일견 당연한 사회 논리적인 귀결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우리 사회에서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의 결과는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믿기 어려울 만큼 그 결과가 미국과 동일한 모습을 보였고 그때 나는 한 일간지에 “50:50의 사회는 위험하다”라는 글을 썼다. 그 글 중의 일부를 여기 인용한다.
“사회가 두 집단만으로 분열될 때 그 사회의 생산성과 경쟁력이 추락할 것은 불문가지다. 국회를 비롯해 모든 합의적인 의사결정 구조는 동결될 것이고, 모든 곳에서 ‘책임’이 사라질 것이다. ‘상식’을 집단의 ‘입맛’이 대신할 것이고 제도에 의한 결정은 신뢰를 잃을 것이다. 결국 사회적인 생산 비용은 급증하고 노동의 생산성은 급락할 것이며 내부로부터 대외 경쟁력을 상실한 사회는 급격하게 몰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요즘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얼굴에서 어떠한 철학도 읽지 못한다. 그들의 표정과 언어 속에는 개인과 나라의 삶에 대한 고뇌와 성찰의 흔적이 없다. 나는 그들에게서, 인간은 무엇으로 행복해지는가 라든지 함께 산다는 것은 어떠하여야 하는 것이며 남의 삶을 책임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따위 깊이 있는 상념을 가져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 사람들이라는 믿음을 가질 근거를 찾지 못한다. 그저 내게 들리는 것은 “권력(=돈)은 내가 먹어야 한다” 라는 단세포적인 야수의 으르렁거림뿐이다. 그들에게 무슨 수로 문화적 풍요로움을 기대할 것인가.
물론 그들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언제나 법률 따위는 우습게보아야 하는 집단 시위대들의 정서 속에서도 윤기 나는 인간의 철학이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된 것 같고, 정형외과 병실 침대 위에서 파티를 벌이는 소위 나이롱 교통사고 환자가 넘쳐나는 사회에서 굳이 철학을 찾으려 들 것인가. 굳이 어느 계층과 어느 사회 집단, 어느 구석이라고 열거할 것 없이 우리 사회에 돈과 권력(또는 폭력) 이외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이 얼마나 남아 있을 것인가. 하기야 사회가 온통 이러고서야 어디에서 잘난 정치인들이 솟아나올 것인가.
삶을 성찰하지 않는 사람들이 만드는 사회는 야수의 사회다. 나는 이런 야수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가는 이 사회가 무섭다. 그래서 나도 또 하나 야수가 되어야 하는가. 두 쪽 나는 세상에 어느 한 편에라도 붙으면 살아남을 수는 있는 것일까. 그런데 그렇게 살아남는다 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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