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in-인천문화재단> 공동기획(8)-'문화복지 전문인력' 기획사업②
<인천in>과 인천문화재단이 공동기획한 2013년 하반기 ‘문화복지’, 여덟 번째 순서는 ‘문화복지 전문인력’ 기획사업② <이주민들의 내가 살아온 이야기>다.
(1)문화복지란 무엇인가?
(2)2013 제10차 문화정책대토론회
(3)‘문화복지 전문인력 양성사업’은 무엇인가?
(4)‘인천문화재단 문화복지사업과 다양성’
(5)문화복지포럼
(6)문화멘토와 함께하는 '문화나들이'
(7)'문화복지 전문인력' 기획사업①
<영화, 배달왔습니다!>
(8)‘문화복지 전문인력’ 기획사업②
이주민들의 <내가 살아온 이야기>
(9)복지인력 배치 전후 비교 기사
(10)종합 정리(내년 중앙정부 사업계획 포함)
‘떠난다’는 것은 사람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것도 몇십 년을 살던 곳을 떠난다면? 떠난다는 것은 곧 어딘가에 다다른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원해서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떠나도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은 몸과 마음이 꽤 힘든 일이다. 그런데, 나라가 망해서 힘 없는 백성으로 강제로 삶의 터전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면 어떤 세월을 보냈을까. 여기 그 사람들의 삶의 찾아나선 이들이 있다. 이주민들의 <내가 살아온 이야기>는 인천문화재단 ‘문화복지전문인력 양성사업’에 참여한 사람들이 기획한 사업이다. 강미선(45), 민수진(25)씨가 사할린동포와 북한이탈주민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낸 이야기를 들어봤다.
‘떠난다’는 것은 사람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것도 몇십 년을 살던 곳을 떠난다면? 떠난다는 것은 곧 어딘가에 다다른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원해서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떠나도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은 몸과 마음이 꽤 힘든 일이다. 그런데, 나라가 망해서 힘 없는 백성으로 강제로 삶의 터전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면 어떤 세월을 보냈을까. 여기 그 사람들의 삶의 찾아나선 이들이 있다. 이주민들의 <내가 살아온 이야기>는 인천문화재단 ‘문화복지전문인력 양성사업’에 참여한 사람들이 기획한 사업이다. 강미선(45), 민수진(25)씨가 사할린동포와 북한이탈주민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낸 이야기를 들어봤다. ‘일하는 것’ 같았고 ‘하길 잘 했다’
문화예술위원회에서 내려온 이 기획사업하면서 ‘일하는 것’ 같았다. 문예위에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이 일을 크게 본 것 같았다. 우리도 모둠끼리 하면서 모둠과 모둠 간에, 서로 이해하고 힘을 모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짧은 기간 동안 이렇게 훌륭한 결과물을 내놔서 뿌듯하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재밌었다.
일을 진행하면서 힘들고 스트레스도 있었지만, 결과물이 나오니까 좋다. 기획을 하고, 기관을 방문하면서 협조 요청하고… 품을 많이 들여서 일을 하니까 힘들어도 할 수 있었다. 사실 처음에 기획사업이 떨어졌을 때는 뜬금없이 받아들였다. 내년에 정책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각자 프로그램을 만들어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어느 정도 진전되면서 ‘아, 이거구나. 힘들어도 일하다 보면 나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한테는 기획사업이 크게 와 닿았다. 할 만한 일이었다. ‘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7월에 워크숍 때 기획안을 보게 됐다. 연수구, 남동구 지역에 유리하게 추진할 수 있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세 분 정도 하려다 다섯 분으로 하게 됐다. 북한이탈주민은 섭외가 잘 되지 않았다.
‘여자로서의 이주민 모습’을 담고 싶어
사할린에서 온 네 분도 다르다. 두 분은 거기서 태어나고 자라셨고, 두 분은 한국에서 태어나서 사할린으로 이주했다가 돌아온 분들이다. 우리가 애초에 기획했을 때는 몰랐던 부분이다. 인터뷰하면서, 이 분들이 시대를 다르게 보신다는 걸 알았다. 사할린에서 태어난 분들은 다른 나라에 가서 사는 게 다반사인데, 이게 뭐 어때 이러셨다. 두 분은 강제이동해서 거기에 간 분들은 가족과 함께 살 수 없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 시절이 힘든 거였다. 우리는 ‘여자로서의 이주민 모습’을 담고 싶었다.
사할린동포 경로당은 논현동에 있는 한 아파트단지 안에 있다. 현주민과 불협화음도 있다보니, 한 공간에 있기가 불편했던 모양이다. 구에서 지원 받아 다른 공간을 만들었다. 실제 등록된 사람은 500명이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오는 날이 다르더라. 우리가 만난 할머니들은 사할린동포 할머니가 네 분인데, 살아온 이야기가 각각 다르고 애절하다.
심층인터뷰를 못해 아쉬워
김월년 할머니는 지금 상황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좋다고 여기신다. 할머니 인터뷰할 때는 우리가 처음 하는 거라서 기술도 없고 자료도 없어 분량이 적다. 섭외도 그리 쉽지 않았다. 따지고보면 다섯 분이 모두 섭외가 쉽지 않았다. 사실 여러 번 만나서 어는 정도 친해지고 나서 심층인터뷰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질 못했다.
사진 받는 것도 힘들었다. 애초에 우리는 포토북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사할린 할머니들이 사할린에 사진을 두고 오셨거나, 화재로 없어졌다고 했다. 할머니들과 관계형성이 잘 안 된 부분도 있다. 외부인에게 사진을 보여주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할머니들과 관계형성이 좀 더 잘 되었다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을 거다. 못 그래서 아쉽다.
북한이탈주민은 접촉 자체를 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힘들었다. 결국 한 분만 만났다.
김일화 할머니는 가장 화통하고 시원하셨다. 재미있고 이야깃거리가 충분했다. 사할린 시절에는 힘들었지만, 젊어서 좋았다고 하셨다. 사할린에서 태어나고 자라나셨기 때문인 것 같다. 한국 사람인데, 태어나서 자라다 사할린으로 강제로 끌려가면 억울하고 부당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 모든 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시는 것 같았다. 여기가 조국, 모국 같은 생각을 한다.
강정순 할머니는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여생을 한국에 와서 살게 해줘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사할린에서 두 번째 결혼을 하셨는데, 남편 분 앞으로 몰랐던 보상금을 기부하셨다. 내 몫이 아니다, 내 남편 때문에 받은 거라고 생각하신다고 전해 들었다. 내게 아니면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신다고 한다.
김봉례 할머니는 연세가 비해서 기억이 아주 또렷했다. 말씀을 들어보면 진짜 1세대 같은 생각이 든다.
이명화 님은 사진도 없고, 교육 중이라고 연결도 잘 안 됐다. 기관에서도 외부인에게 노출되는 걸 조심해하는 것 같았다. 이 분이 가명을 쓸 수밖에 없던 건, 이 분 언니가 서울에 계시는데, 그 분 아들이 아직 북한에 계신다고 한다. 조카한테 해가 갈까봐 다 보여줄 수가 없는 거였다. 언니가 강력하게 공개하면 안 된다고 했단다. 사진도 실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신다.
사할린동포와 북한이탈주민을 똑같이 ‘이주민’이라고 통틀어 말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사할린동포 할머니 네 분도 다 다르다. 처음에는 이 분들을 부르는 용어도 모호했다. 기획사업 하면서 하나씩 알아가게 되고, 인터뷰하면서 조금씩 알아가게 됐다.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늘어났다.
러시아에 살면서 안 좋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나라에서 집도 주고 교육도 시켜주는데 뭐가 힘드냐고 했다. 처음에는 왜 좋았다고 하실까 의아해했지만 나중에 다른 분들을 만나면서 이해할 수 있었다. 아하, 시작점부터 달랐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게 다를 수밖에 없었던 거였다.
사할린에서 살다가 오신 분들은 한국영주귀국권도 있고 러시아 국적도 있다. 김월년, 김일화 할머니는 러시아에서 사범학교도 나왔다. 러시아에서 무상교육이나 그밖에 혜택도 다 받았다고 한다. 살면서 특별히 아쉬운 게 없던 분들이었다. 하지만 강정순, 김봉례 할머니는 초등학교도 못 나왔다. 김봉례 할머니는 간신히 한글을 깨치고, 여기 와서 한글 프로그램으로 한글을 더 배웠다. 할머니 네 분을 보면서 이주민이라고 해서 다 같은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명화 님(가명)은 막내 동생이 북한에서 살기 어려우니까 중국으로 먼저 갔다. 그래서 식구들이 수용범이 됐고, 그후 우여곡절을 다 겪으면서 우리나라로 왔다. 한국으로 오기까지 할머니가 겪은 고생은 다 말할 수가 없다.
기획사업을 하기 전과 한 후, 이주민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나.
남동구에서 몇 십 년을 살았으면서도 전혀 몰랐다. 주변에 이런 분들이 있는지. 특히 사할린동포들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북한이탈 주민 상황은 매스컴으로 알고 있었지만, 내가 사는 주변에 이렇게 많은지는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이 분들을 만나면서 ‘확실히 이 사람들도 내 이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앞으로 이 분들하고 관계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 분들이 겪는 문제들이 많아 안타까웠다. 이 분들이 임대아파트에 다 살고 계시는데, 그곳에서 우리나라 선주민과 차이가 많다고 한다. 북한이탈주민은 더 심하다. 이남 사람들은 내가 임대아파트에 먼저 들어와 살고 있는데, 북한이탈주민이 들어오는 걸 싫어한다. 서로 사회적인 관계형성이 어렵다.
이주민들은 여기서 목숨을 다해 빨리 정착하는 게 목표다. 하지만 일자리 구하는 일부터 넘어야 할 숙제가 많다. 뭘 하려고 해도 능력도 안 된다. 그러면서 빨리 정착하려고 하다보니 사는 게 피폐하고 팍팍한 것 같다. 북에 있는 식구를 데려오려면 한 사람당 600~700만원이 있어야 하는데, 그걸 마련하느라 힘들다. 여기서 문화라는 건 ‘자다 홍두깨 맞는 격’이다. 문화를 함께하자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 가족을 데려오기도 바빠죽겠는데 무슨 문화는 이러세요. 그게 큰 차이죠.
사할린 분들을 문화 쪽으로 바라보면, 서로 정서가 안 맞는 것 같다. 한국문화에 대한 정서도 없고, 언어 의사소통에 대한 문제도 있고. 공연을 보러 갔다가도 1부만 보고 쑥 나온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다.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니까 재미가 없다. 우리는 공연을 하나 봐도 동시다발적으로 이해가 가잖아요. 출연진들의 의상, 대화… 전반적으로 아우를 수 있는 시각이 있는 반면에, 그 분들은 낯설고 이질감을 느낀다. 문화적인 충격, 이질감을 많이 느낀다. 화려한 무대를 보면, 모시고 움직이다보니 자의적으로 움직이는 거에 대해 소극적이다.
이제는 설명을 잘 해 드릴 수 있을 것 같다. 선주민들이 이주민에 대해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면, 반대로 이주민들이 선주민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하면, 이제 그 분들한테 말할 수 있다. 그 분들이 힘들게 살아오신 이야기로 이해시키려고 할 것이다.
나는 인천만 벗어나도 무서워서 이사 갈 엄두도 못 낸다. 할머니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낯설고 물선 곳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었다.
사할린 분들을 인터뷰하면서 흥미로웠다. 이 분들은 이중국적인 데다, 기본 이름에 세 개씩 있다. 한국 이름, 러시아 이름, 일본 이름…. 원래는 사할린 지역이 이주했을 때는 일본이 통치하던 때라 일본어를 썼고,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패하고 러시아가 지배하고, 경로당 가면 세 가지 언어가 있다. 한국말을 하는데도 못 알아듣겠더라.
첫 방문 때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세 개 국어가 동시에 나오니까 도대체 정신이 없었다. 여기가 어디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문화가 아주 화려해서 그런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걱정됐다. 이 분들을 만나러 올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저희가 이 분들한테 사례를 못해 드렸다. 예산이 나중에 나오기도 해서 자비로 과자 같은 간식을 사갔다. 그래도 죄송하니까 나중에 한 번 간식 사오겠다고 말씀 드렸더니, 술을 사오라고 하셨다. 막걸리냐고 물었더니 보드카라면서 웃었다. 인터뷰를 하면서 사할린은 살기 힘든 곳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사셨냐고 여쭈어보면 할머니들은 날씨에 대해 간단히 말했다. “추웠어, 추웠어. 여기는 살기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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