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대장장이, 송종화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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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대장장이, 송종화씨
  • 김영숙 기자
  • 승인 2013.11.22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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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동 '인일철공소' 대장간, 60년 동안 쇠붙이를 두드리고 담금질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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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화가 김홍도가 그린 ‘대장간’이라는 그림을 보면 대장장이들이 똑같은 모자를 쓰고 일을 하고 있다. 달구어진 쇠붙이를 집게로 들고 있는 사람, 그 쇠붙이를 망치로 두드리는 사람이 두 사람 나온다. 뒤쪽에서는 불가마에 불을 때고 있는 사람이 있다. 대장간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그림이다. 지금은 작업환경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림에서처럼 일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다. 중구 도원동 도원역 근처에는 대장간이 네 군데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대장장이 일을 하고 있는 송종화씨(76)를 만나봤다.
 
땅땅땅. 송씨는 불에 달구어진 시뻘건 쇳덩이를 불가마에서 꺼내 함마질을 한 다음, 그 쇠붙이를 모루 위에 올려 망치질로 모양새를 만든다. 집게 길이가 맞나 재보고 다시 망치질을 한다. 다시 땅땅땅. 대장간 안은 불가마 돌아가는 기계소리와 망치소리가 가득하다. 말을 하려면 큰소리로 해야 서로 알아들을 수 있다.

송씨는 17살 때 대장간 일을 시작했다. 올해로 60년째 대장간 일을 했다. 제물포 숭의4동에서 태어났다는 그는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대장간 일에 발을 들여놨어요. 그때 취직한 거죠. 벌써 60년 됐네요”라며 “길 건너에 있다가 대장간이 있다가, 그쪽이 헐리는 바람에 길 건너편인 여기로 와서 가게를 연 건 73년도인가, 그때쯤이에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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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드리고 두드리고, 쇠붙이를 모루 위에 올려놓고 망치질하면서 모양을 만든다.
 
 
60년 동안 한길을 걸어온 그가 쇠붙이로 만들지 못하는 물건은 없다. 하지만 그도 처음에 이 일을 배웠을 때는 풍구질과 함마질부터 했다. “처음부터 무슨 물건을 만들지 못한다. 초보자가 들어오면 풍구질이라고 해서 풍구부터 불었다. 그 다음에 2단계는 풍구질을 하면서 함마질을 했다. 매질꾼이라고도 한다. 담금질을 비롯해 이것저것 하면서 자꾸 하나씩 배워나갔다. 세월이 가면서 기술을 쌓아올렸다.”

그는 어느 정도 기술을 쌓아올리니까 웬만한 물건은 다 만들 수 있었다. 건축물에 쓰는 거, 공장에서 쓰는 물건을 모두 만들었다. 주문이 들어오면 그 물건을 만들고, 시간이 날 때마다 물건을 만들어 두었다. 손님이 와서 원하는 물건을 고르기만 하면 됐다.

그가 일을 시작할 때 도원동 일대에 대장간이 여러 군데 있었다. “도원동에는 철공소가 많았어요. 보자, 하나 둘 셋… 여섯 군데 정도 됐나. 아니, 여섯이 넘었구나. 지금은 네 군데만 남아 있어요. 인천시에 네 군데 남아 있다고 보면 돼요.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도 40년 이상 했어요. 초보자 과정부터 따지고 보면 50년 했다고 봐야죠.”

대장장이. 그는 인천에서 가장 오랫동안 일을 한 대장장이다. 쇠붙이를 2천도가 넘는 불에서 달구어 함마질을 하고, 모루 위에서 수십 번 수백 번 망치질을 해서 모양을 만든다. 다시 담금질을 하고. “쇠를 녹이진 않아요. 물건 자체가 다양해서, 재료를 사다가 물건 하나 하나 만들어요. 지금 불가마에 들어가 있는 물건은, 공사장에서 쓰는 건데, 공구리라고 해서 시멘트 깨는 데 쓰는 거예요. 달궜다, 때려서 물건을 만들죠. 이건 때려서 물건을 만들어요. 열처리를 별도로 하기도 하구요. 모든 걸 열처리 하는 건 아니구, 대체로 열처리를 많이 한다고 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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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에 달구어진 쇠붙이를 기계함마가 두드리고 있다.
 
 
사실, 지금 도시라고 불리는 곳도 예전에는 다 시골이었다. 아파트가 빼곡하게 들어선 그 땅은 대개 논이고 밭이었다. 농사를 지으려면 가장 필요한 게 농기구였다. 쇠스랑, 괭이, 호미, 삽…. 집집이 구석에 놓여있던 농기구들은 그 집은 없어서는 안 될 보물이었다. 그 농기구를 죄 만들던 곳도 이곳 대장간이었다. “지금도 쇠스랑, 괭이 같은 건 주문이 가끔 오지만 별로 없어요. 중국산이 워낙 많이 나오기 때문에 여기까지 오지 않죠. 철물점에만 가면 금방 구할 수 있잖아요. 우리 물건은 다 달구고, 때려서 만들어 오랫동안 쓸 수 있어요.”

경인선의 시발지였다는 도원역. 그가 일을 시작할 때 도원역 일대는 어땠을까. “그전에는 전철역 도원역이 없었잖아요. 예전에는 저 건너편에서 시작했어요. 그쪽이 철거되면서 이쪽으로 넘어온 거죠. 그때는 경인선 열차가 다녔어요. 왜정 때부터 다닌 전철이 아닌 기차요. 석탄차가 다니다가 기관차가 다니다가 전철로 변경됐죠. 아유, 그때는 사람이 참 많았어요. 여기에서 장사 하면 다 잘 됐어요.”

대장간 일 자체가 쇠붙이를 다루다보니 힘든 일이 많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장갑을 빼면 손을 보여주었다. “장갑을 끼어서 군살은 별로 없어요. 위험한 일을 하니까 긴장하기도 해야 하고 몸 관리를 잘 해야 해요. 나이를 먹으니까 땀도 안 나니까 건조해진 거지. 대장일이라도 자영을 하니까 지금까지 할 수 있었던 거죠. 젊었을 때는 직업을 변경해보자, 맘먹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나이를 먹어도 자영을 하니까 누가 그만두라고 하지 않으니까 괜찮아요. 건강하니까, 아직까지 건강하니까 하는 거죠. 내 친구들은 오랫동안 직장을 다녔어도 이젠 할 수 없잖아요.”

평생을 한 가지 일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인천시에서는 상을 주거나 지원해주는 건 없을까.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문화재, 대장장이 문화재는 없어요. 인천이고 서울이고 없을 걸요. 충청도에는 무형문화재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 사람은 망치질하면서 농부 일 해서, 아마 그런 것 같아요. 농촌 일을 많이 하니까 줬겠죠. 인천에 있는 문화재를 보수하거나 수리하면서 쓰이는 물건을 부탁한다든가 그런 일은 없어요. 못 하나, 문고리 하나를 만들더라도 다 그곳에서 훼손된 물건이니까 그대로 복원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죠. 그나저나, 인천에서 부탁할 게 뭐 있겠어요?”
 
최근에는 물건을 주문하러 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 장사가 잘 될 때는 언제였을까? “지금부터 2,3년 전에 잘 됐어요. 아주 바빴죠. 인천에 뱃일도 많았어요. 선박 일. 지금 인천 앞바다에 고기가 잡혀요, 안 잡히죠. 어선도 다 없어졌잖아요. 개구리배 같은 배도 다 없어졌어요. 고기가 안 잡히니까요. 공업단지도 다 없어졌잖아요. 울산, 포항, 전라도 쪽으로 다 빠졌어요. 여기에 있던 큰 회사들이 다 없어지니까, 거기에 달린 중소기업들도 할 일이 없어지니까 우리한테 해가는 물건도 없는 거죠. 일이 없어요. 요새는 아주 일이 없다고 봐야죠. 건축일이 많으면 도구가 많이 오는데 그게 없잖아요. 예전과 달라요. 안상수 시장이 재개발 한다고 하면서 집을 수리하려는 사람들도 손을 대지 않고 사는 거죠. 건축 수리하는 사람이 아예 마비상태에 있잖아요. 그러다보니 건축물에 쓰는 물건이 필요 없는 거죠.”

그의 대장간에는 망치 수십 개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모든 망치는 직접 만들어 쓴다. 인일철공소. 그의 대장간 이름이다. “어질 인(仁), 날 일(日). 내가 지었어요. 인천이니까, 내가 인천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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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환경이 바뀌어 대장간 일을 전수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말하는 송종화씨.

 
대장간 일은 일년 내내 힘들지 않은 때가 없다. 여름에도 하루 종일 불 앞에서 일해야 하니까 고역이다. 선풍기 몇 대를 들여놓고 계속 돌려야 한다. 그러나 그는 그보다 더 힘든 건 따로 있다고 했다. “재료가 쇠붙이가 보니까 들어올리고 내려놓는 일이 힘들어요. 워낙 무거우니까 혼자 할 수는 없죠. 그럴 때는 사람을 대야 일을 할 수 있죠. ‘쇠덩이’들 무게가 엄청 나죠.”

그는 건강이 되는 한 일을 계속 하고 싶다. “그래봤자 2~3년 아니겠나. 그 안에 경기가 좋아지면 당연히 좋죠. 일하는 사람은 경기가 좋아야 일이 많아지죠. 내 자식들도 벌써 40, 50이 다 됐는데 이 일을 하지도 않을 거구요. 이 일은 하루 이틀에 되는 게 아니에요. 10년을 해도 대장장이가 되냐, 안 되냐가 문제에요. 어떤 기술자라도 대모도, 밑에서 대모도만 하지 기술자가 못 되는 사람도 많잖아요. 그만큼 배우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죠.”

한 가지 일을 반세기를 훌쩍 넘게 일하면서 쌓은 기술이 아깝지 않을까. “가끔 전화를 걸어 일을 배워보겠다는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학원처럼 가르칠 수가 없어요. 예전에는 풍구질하고 함마질 할 때는 그것부터 기초로 사람한테 가르쳤지만, 지금은 기계로 다 때려서 혼자 할 수도 있거든요. 그전에야 사람이 꼭 붙어서 풍구질도 하구 함마질도 했지만요. 풍구질해서 쇠를 구워냈지만,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어요. 그러다보니 이 일을 양성화할 수 없죠. 학원도 없어요. 참, 부산에 병기학교가 있긴 있어요. 군대 무기 만드는 데요. 단양, 단조라고 하죠. 대장간이라는 말을 하지 않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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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킬로그램이 나가는 모루는 군데군데 곰보가 지고 깨져서 세월의 흔적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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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개가 넘는 망치가 가지런히 걸려 있다.
 
 
대장간 한복판에는 큰 모루가 놓여 있다. “모루를 모르는 사람은 처음부터 이렇게 생긴 건지 아나봐요. 미국 사람들이 해방 때 가져온 거예요. 일본 왜정 때는 이 모루를 무기 만들 때 사용했어요. 미국, 일본이 직접 만들었어요. 이 모루도 그때 가져온 거죠. 우리나라는 이걸 못 만들고, 나중에 주물로 부어 만들었어요. 오랫동안 써서 곰보가 지고 깨지고… 옛날에 산 거예요. 한국 사람한테 넘어온 것만 해도 오십년이 넘었어요. 망치질을 많이 해서 쇠가 여기저기 깨지기도 했죠. 무게가 170킬로그램이에요. 봐요, 여기 찍혀 있잖아요. 우리 집에 있는 물건은 모두 몇 십 년 됐어요.”

옛날로 치면 불가마에는 계속 불이 돌아가고 있었다. “호도라고 해요. 이게 돌아가야 불이 안 꺼져요. 하루 종일 켜져 있죠.” 옛날에는 함마질이라고 하는 건 ‘스프링 함마’가 대신하고 있다.

“대장장이 일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게 아니에요. 이 골목이 없어지겠죠. 지금이야 내가 건강하니까 일을 하지만 2~3년이면 끝나겠죠. 10년까진 내다보지 못하죠. 그렇다고 양성화할 수도 없는 일이구요. 누가 배운다고 해도 학원마냥 가르칠 수도 없고… 사실 오래된 일은 어딜 가나 마찬가지일 거예요. 누가 배우겠다고 와도 가르치다 보면 일이 안 되잖아요. 차츰 없어진다고 봐야죠. 인천에 네 군데가 있지만, 그 사람들 나이가 있으니까 아예 끝나는 거죠. 일이 이어지는 건 어렵다고 봐야죠.”

불가마가 돌아가는 기계소리, 열에 달구어진 쇠붙이를 꺼내 망치질 하는 소리로 대장간 안을 하루 종일 웅웅거리면서 시끄럽다. 쇠붙이를 자르고 모양새를 만들면서 쇳가루는 얼마나 떨어질까. 송종화씨는 그곳에서 60년을 한결같이 묵묵히 일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을 테고, 한때 사람이 수없이 드나들던 도원동 일대가 지금까지 어떻게 변해왔는지 다 봐왔을 것이다. 가게를 나서면서, 문득 평생 자기 일을 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곳곳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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