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는 언제나 인천의 주변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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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는 언제나 인천의 주변지역이었다."
  • 김영숙 기자
  • 승인 2013.12.04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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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립박물관, 특별기획전 <안녕하세요, 배다리>展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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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립박물관(관장 이명숙)이 2013년 기획특별전으로 준비해온 <안녕하세요, 배다리>展이 3일 오후 3시 문을 열었다. 이번 전시는 2014년 2월 2일까지 두 달 동안 열린다.

이명숙 박물관장은 “인천 시민들의 삶을 담았던 그릇으로서의 지역 공간을 집중 조명하는 특별전을 기획하고 있다. 올해는 그 기획의 첫 번째 전시로 ‘연속과 단절로 보는 배다리의 역사와 사람들’을 주제로 한 <안녕하세요, 배다리>展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이국적이지도 정돈돼 있지도 않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욱 빛이 나는 배다리의 역사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배다리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시가 열리기 전날인 2일 오후, <안녕하세요, 배다리>展 전시에 관한 이야기를 미리 들으려고 박물관을 찾았다. 이번 전시를 담당한 김래영 학예사를 비롯해 다른 학예사 여럿은 눈코 뜰새없이 바쁘게 전시회 막바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진을 붙이고 조명을 조절하고, 물론 연락은 했지만 눈치없이(?) 찾아간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어쨌거나 배성수 전시교육부장에게 이번 전시회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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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마을 사람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전시회를 축하하기 위해 참석했다.


전시회 제목을 ‘안녕하세요, 배다리’로 정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 전시는 지난해에 해보고 싶었는데, 그때는 짜여진 전시도 있었고 예산도 없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큰 전시로 갈 게 아니라 작은 전시로 기획됐다. 배다리 지명이나 역사만 보여주려고 했다. 하지만 전시 준비를 하면서, 좀 더 외연으로 넓혀지면서 여러 의견이 나왔다. 지금 배다리가 별로 안녕하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여러 의미로 ‘안녕하세요’로 정했다. ‘배다리’라고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런데 좀 심심하기도 하고. 배다리가 옛날에 안녕했던 모습, 지금 별로 안녕하지 못하지만 앞으로 안녕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전시를 기획했다.

배다리는 언제나 인천의 주변지역이었다. 일제강점기 때도 조선 사람이 살았고, 해방 이후에도 율목이나 경동, 내동 쪽은 잘사는 동네였고, 배다리는 주변 변두리 지역이었다. 지금도 상권이 빠져나가고 인구가 줄어들면서 또 주변지가 됐다. 거기다 항상 주변지역이었겠지만, 당시에 배다리 자료를 보거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활기차고 역동적이었다. 그런 게 ‘안녕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물론 침체된 모습이 안녕하지 못한 모습이지만, 어떤 정책적인 부분을 성공이다 실패다, 라고 말하기보다는 주민들이 갈라서버린 것이 가장 안녕하지 못한 점이 아닐까다. 전시를 하면서 배다리의 안녕한 모습을 바라는 점도 있다. 마을 사람들이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생각도 한다.

현재 배다리에 3,800명이 살고 있다. 금창동만 따진 거다. ‘배다리’라는 공간은 재미있다. ‘배다리’는 행정 지명이 아니고, 예전에 ‘배가 닿던 곳’이다. 배가 들어오다보니, 이름이 ‘배다리’라고 했을 것이다. 중요한 건 배다리라는 지명이 고착된 건 시장 때문이었다. 일본 사람이 살던 동네는 일본식 시장이 있었고, 여기는 조선 사람 시장이 있었다. 특이한 건, 시골에 인구가 적어서 오일장이 열리는 게 아니라, 도회지에서 열리는 상설시장이었다. 말 그대로 난전이 형성됐다. 1915년 신문기사에 보면, ‘인천에서 가장 볼 만한 시장’이라고 나온다. 해방 이후에는 배다리시장을 야미시장(야메시장)이라고 했다. 그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정식으로 인정받은 시장이 아니라 야미시장이라고 나온다. 처음 나타난 기록은 1915년이지만, 그 전부터 있었을 것이다. 거기서 끝났다면 배다리의 지명이 사라졌겠지만, 헌책방이라든지 이름에 역사가 이어져 오면서 배다리라는 공간이 형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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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기획부터 진행까지 과정을 설명하는 배성수 전시교육부장.
 
 
처음에 배다리라는 공간을 사람들은 어떻게 인식하는지 설문조사해봤다. 다 달랐다. 어떤 사람은 전도관부터 인천항까지 아는 사람도 있고, 배다리 철교 근처만 배다리라고 아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 머릿속에 있는 배다리는 제각각이다. 재미있었다. 하지만 지역을 규정하고 전시를 시작해야 하니까, 배다리시장이 형성됐던 배다리철교와 헌책방골목, 중앙시장 조금 더 지성소아과 삼각지점을 배다리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그 주변 지역이 배다리라고 부를 수 있는 지역들, 광의의 범위로 이번 전시는 양키시장까지 다루고 있다. 삼각지역을 중심으로 양키시장까지 다뤘다. 여기에 드나드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금곡동, 창영동, 양키시장을 ‘배다리’라고 설정하고 전시를 들어갔다.

배다리에서 들고나던 흔적들은 어떻게 찾을 수 있나.
배다리시장이 없어지게 된 게 1950년대 중반이다. 송림초등학교 앞에서 송림로터리까지 길이 뚫린다. 거기가 막혀 있었으니까 시장이 만들어졌다. 수도국산에서 내려오고, 쇠뿔고개에서 내려오고, 싸리재에서 내려오고 아래서 딱 만나는 곳이 분지 같은 지형이다. 서울 가는 사람은 싸리재를 넘어서 배다리를 거쳐야 쇠뿔고개로 갔다. 송림동에 사는 사람들도 물론 화평동 화평철교 밑으로 다녔지만, 금곡동 창영동 이쪽 분들은 배다리 철교를 통해 왔다갔다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다.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됐고, 55년도 길이 뚫리면서 배다리 난전이 자연스럽게 중앙시장으로 흡수됐다. 차가 다녀야 하니까. 대중일보에 보면 야미시장, 배다리시장을 없애려니까 공설시장으로 놓고 그렇게 만든 게 중앙시장이다. 배다리상인들이 중앙시장으로 흡수된다. 건너편 쪽으로 메인통로다. 중구청 가는 길. 지금은 금곡로에 지금도 남아있는 배다리다방, 문화극장 등 60년대에 지어진 4층 건물이 있다. 상당히 번화한 길이다. 배다리시장에서 상권들이 양쪽으로 분리되면서 하여간 들고남이 아주 많았던 동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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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 개막 전날, 학예사들이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주민들을 많이 만났을 것 같다. 주민들은 어떤 점을 힘들어 하나.
지금은 좀 나은 편이다. 당장 내년부터 개발에 들어간다는 게 아니니까. 돈이 없어서 못하는 상황이고, 배다리 쪽 지역은 재생사업지구에서 제외됐다. 지금은 갈등이 물밑으로 내려갔다고 볼 수 있다. 갈등은 해소해야 되는데, 그게 관건이다. 산업도로가 배다리 한가운데로 마을을 관통하면서 산업도로 문제만으로 주민들 생각이 나뉜 것같진 않다. 도심재생사업이 들어오면서 주민들이 사업추진계획이 발표되고 상징적으로 산업도로 부지는 주민들이 양분된 상징인 것 같다. 지금은 윗마을 아랫마을 사람들이 텃밭을 만들고 있다. 그것도 하나의 상징이고. 산업도로 주변으로 해서 그 동네가 재미있는 게 처음에 금곡동, 창영동이 갈려 있었다. 1985년에 금창동이 되면서 그것 가지고도 주민들이 갈등이 있었다. 그게 어느 정도 무마되고 와해되고 안정화하는 시점에서, 또 산업도로 재생사업이 또 터진다. 이런 여러 상황들이 주민들을 힘들게 한 것 같다.

두 달 동안 전시회를 여는데, 준비 기간은 어느 정도였나.
전시 기획은 작년 말부터 들어갔고, 6월에 배다리마을 축제가 있었다. 그때 부스 만들어서 인터뷰도 하고, 축제도 참여했다. 본격적으로 전시에 들어간 건 8월 말부터다.

전시는 늘 힘들다. 이번 전시에서는 민감한 부분을 안 건드릴 수가 없었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과감없이 드러내는 게 참 힘들다. <수인선> 같은 전시는 이런 전시를 합니다, 하면 됐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그 분들이 경계를 한다. 어떻게 나갈까, 예를 들면 내가 이렇게 말하면 저쪽에서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민감한 부분들을 건드려야 하는 게 힘들었다. 그런 부분이 부담스러웠다.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이게 또 기획자의 주관이라든지 박물관 공식 입장이 돼버리기도 한다.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전시 공간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획되었나.
‘공간, 길, 사람’. ‘공간’이라는 것은 길이 나면서 공간이 구분된다. 길이 뚫리면서 공간이 구분되고, 산업도로가 뚫리면서 공간이 생긴다. 이런 식으로 길이 나면서 공간이 마련된다. 아랫말 윗말도 기준점이 있을 것이다. 길이 뚫리면서 공간이 생기고, 그 공간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 채워진다. 채워지면 또 길이 뚫리고, 공간이 생기고. 이런 것들이 배다리라는 지역을 보면서 이렇게 구분을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공간 부분은 경인철도가 뚫리면서 개항장 주변을 철교 안쪽, 그 사람들 기준으로 철교 바깥쪽으로 구분했다. 철교 바깥쪽은 조선 사람이 사는 걸로 형성됐다. 배다리라는 공간이 고착화하고 사람들 입으로 구전된 건 경인철로가 뚫리면서 공간이 구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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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영초등학교 어린이들을 비롯한 배다리 골목 모습.
 
 
 
배다리라는 지역이 싸리재와 쇠뿔고개가 만나는 지점이다. 길 부분은 전시에 얼마 안 된다. 싸리재를 대변하는 길의 모습은 라사 거리인 양복점, 양장점이 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많았다. 그 전에는 물론 일본식 상점이 많이 들어와 있었다. 어쨌든 가장 지역 속에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은 헌책방 골목이다. 두 길을 대변해서 보여지면서 점점 화려했다가 점점 쇠퇴하는 모습으로 보여주려고 한다. 싸리재나 쇠뿔고개나 태초에는 그곳이 길이었을 것이다. 개항장에서 혹은 인천 해안가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경인가로라고 불리었다. 길이었을 텐데, 사람들이 그 공간을 채워가면서 거리가 되었다. 거리가 되고, 지금은 다시 길이 된 것 같다. 통로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 같다.

해방 이후 상권이 빠져나가면서 라사(양복점, 양장점)가 들어와 채워지게 된다. 결혼을 할 때, 중앙시장에서 혼수하고 예단하고 그릇 사고, 싸리재 와서 예복하고 가구 사고, 그 다음에 신신예식장 평화예식장에서 결혼하고, 피로연은 평화각에서 한다고 했다. 애관극장 위쪽에 피로연을 할 수 있는 중국집이 있었다. 양복점, 양장점이 쭉 있었는데 70년대에 기성복이 유행하면서 전국적으로 이 업종이 다 쇠퇴하게 됐다. 그러면서 거기에 들어간 집들이 가구점이다. 가구점이나 라사가 일부 남아 있다가, 그 거리가 다시 길이 됐다.

헌책방은 그 당시에 듣기로는 40여 집 됐던 것 같다. 원래 창영초등학교 쪽부터 지금 삼거리 쪽까지였다. 그 지역의 공간성을 얘기해주는 건데, 지금 헌책방이 있는 곳은 가겟세가 비쌌다. 중국집, 양장점, 다방… 등등이 있었다. 경기가 점점 안 좋아지면서 여기서 가겟세를 높이 내고 버틸 수 없어 떠났다. 주인은 가겟세를 낮추고, 헌책방들이 아래쪽이 목이 좋으니까 점점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지금은 헌책방이라 부르는 곳은 다섯 군데 정도다.

배다리는 인구 이동이 많은 지역이었다. 개항 이후에 만들어진 마을이기 때문에,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금창동은 1985년 이전에는 분리돼 있었다. 1968~1972년 정도에는 금곡동 창영동 인구를 합쳐서 1만 3천명 정도였다. 지금은 3800명밖에 안 된다. 들고남이 심하다.

전시를 준비하기 달라진 생각이 있나.
많이 바뀌었다. 주민들이 열악한 동네, 이 정도는 알고 있었다. 헌책방, 여러 가지 문화운동들이 들어와서 활동하는 곳, 뭔가 문화공간이 하나둘씩 늘어나는 걸 보면서 점묘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을 하나씩 하나씩 찍어가면서 커다란 그림이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전시를 준비하면서 그동안 한쪽 모습을 주로 많이 보고 많이 느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주민들은 먹고 살기 바쁘다. 살기 편한 곳, 편한 삶을 원한다. 그게 중요하다. 양쪽의 지향점은 다르지 않다. ‘잘 사는 마을’이다. 배다리가 갖는 역사성, 장소성을 잘 지켜가면서 보존해가면서 주민의 삶의 질도 같이 끌어올릴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 이건 배다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국 어디든지 재개발이 한창 진행되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런 부분일 것이다. 이제는 개발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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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 쪽에 학교들은 대체로 역사가 깊은 것 같다. 인구에 따라 학교도 달라졌을 텐데 어떤가. 
사실 배다리라는 이름을 붙여서 다른 학교는 창영학교, 송림학교, 영화학교를 다뤘다. 원래는 길 건너에 있던 인천고등학교도 다루고 싶었다. 초등학교 인구는 엄청 줄었다. 창영초등학교는 구교사를 사용하지 않고, 인구가 많던 시절 쓰던 신관만 쓰고 있다. 영화학교는 학생이 있다. 송림학교는 주변에 아파트가 있어서 학생들이 그나마 있다.

전시회를 기획하면 애초에 기획했을 때와, 막상 준비하면서 바뀌기도 하나.
그렇진 않다. 왜냐하면 처음 기획을 한다고 하더라도, 세부적인 내용이 있었던 게 아니라 큰 화두를 가지고 이렇게 가봐야겠다고 생각한다. 모든 전시가 마찬가지다. 준비하면서 구체화한다. 가다가 확 방향을 트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개 처음에 생각한 기획 의도로 힘을 가지고 끝까지 가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도 크게 변한 건 없다.

‘사람’ 부분이 가장 힘들었다. 공간이라는 곳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 같다. 반복인 것 같다. 사람도 떠나는 사람이 있고, 또 누군가 그 자리를 메워준다. 배다리라는 지역에서 다섯 공간을 샘플링해서 거기에 사는 사람이라든지, 관여하는 사람을 다섯 명을 보고 사진작가들이 작업했다. 이 내용을 사진공간 배다리에서 6주 동안 한 사람씩 5주 동안 돌아가면서 하고, 마지막 한 주는 옴니버스 형식으로 사진공간 배다리에서 같이 진행한다. ‘배다리 사람들’은 ‘양키시장 수선집’, ‘배다리 헌책방’, ‘스페이스 빔’, ‘여인숙 골목, 창영학교’을 다룹니다. 또 ‘배다리 사는 이야기’는 ‘마을사진관 ‘다행’’, ‘스페이스 빔’, ‘달이네’에서 보여준다.
 
 
전시회 개막일에는 사람이 참 많았다. 특히 배다리마을 사람들이 일을 제껴두고 개막을 축하하러 참석했다. 전시회를 계기로, 늘 뒷전으로 물러나 있던 배다리마을이 주목 받은 셈이 되었다. 이날 참석한 사람들은 때마침 1층에 문을 연 '카페 in'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커피를 마시면서 <안녕하세요, 배다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모쪼록 전시기간 내내 사람이 북적거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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