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김명남 / 시인
이유야 어찌 됐건 우리는 결혼한다. 물론 자유의지에 의해서 또는 마땅한 상대를 찾지 못해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결혼한다. 이유야 어찌 됐건.
그 수많은 이유 중 가장 흔한 이유가 사랑이다. 사랑의 개념도 점차 다양해지고 변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사랑이라는 낱말로 퉁 친 남과 여는 결혼생활에 돌입한다.
묵언
고두현
뜨겁다.
손, 놔라.
오래 견뎠다가
그대 처음 만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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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을 오래도록 만나지 못하고 보고픔을 견디고 있자니 집채만한 그리움(고두현,‘마음의 등짐’)이, 천둥 같은 그리움(이산하,‘고사목’)이 마음을 휩쓸고 지나간다. 그러다가 너무나 오랜만에 만난다? 그럼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 위의 시 ‘묵언’처럼 둘만의 공간은 뜨거움으로 가득할 것이다. 뜨겁지 않다면 어찌 사랑이겠는가! 그래, 말이 무슨 필요 있겠는가! 서로 열렬한데 그깟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뜨거움으로 모든 걸 표현할 뿐이리라.
남과 여가 만나서 서로 사랑하고 사랑이 무르익으면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연애 기간 동안 낮에 만나고 밤에 헤어지고, 다음날 낮에 또 만나고 밤에 또 헤어지는 것을 반복하면서 기다림과 헤어짐 없는 만남을 지속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그때 우리 앞에 환상처럼 등장하는 게 결혼이다. 자, 그렇게 불길 같은 사랑의 감정으로, 없으면 미칠 것 같은 심정으로 남과 여는 함께 살기 시작한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등에 업고 당당하게 둘만의 성채 속으로 입성한다. 그렇게 뜨거움 속에 남과 여는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을 영원히 함께 하기로 약속한다. 그리고 매일 매일이 감동적인 사랑으로, 심장을 뒤흔드는 떨림으로 가득하리라 믿는다.
누구나 그렇듯 사랑의 처음은 화창하고 화려하고 화사하다. 그러나 모두들 알다시피 사람의 일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 법! 또 사람의 일이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법!
세상이 내 것인 양 입성한 성채에 어느 날부턴가 조금씩 조금씩 틈이 생기고 벽이 가로막고 색이 바래고 먹구름도 끼기 시작한다. 함께 있으면 기쁘고, 떨어지면 슬프고 애잔했던, 그 뜨거움은 이유야 어찌 됐건 어느새 삶의 뒤꼍으로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게 시간의 문제인지 환경의 문제인지 인간 본성의 문제인지 모르지만 남과 여는 결혼할 때 했던 그 약속에 균열의 싹이 자라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깨닫는다고 별로 손 쓸 방법도 없다. 이미 건조한 생활에 익숙해져버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은 저 멀리 도망가버렸기 때문이다. 떨림은 어느새 슬그머니 실타래가 풀어졌고 사랑의 감동은 불씨마저 식어버리기 시작한다. 어느덧 기대는 실망으로, 또 환상은 걷잡을 수 없는 현실로 빠진다. 그러면서 영원하리라 믿었던 둘만의 약속은 각자 독자적으로 길을 찾아나선다. 다행히 그 길찾기가 미움이라는 이유로 혹은 정(情)이라는 이유로 상대와 나에게 감정의 문을 이리저리 두드리며 옛날의 그 뜨거움을 회복하려 발버둥 친다면 관계회복의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보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우리는 주변에서 흔하게 확인한다.
그렇게 되면 결국 기쁨이 지겨움으로, 슬픔이 부담감으로, 더 나아가 기쁨이든 슬픔이든 아무 감정이나 느낌 없는 무관심으로까지 이어지는, 마치 사랑의 경로가 있는 듯이 우리는, (아, 혹시 나는 그렇지 않은데 하면서 이 우리, 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제외한다) 감정의 변화를 겪는다. 겪으면서도 왜 그렇게 되어 가는지, 언제부터 그렇게 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 보다는 이런저런 핑계와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상대방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며 점점 불행과 비극 속으로 깊게 떨어진다. 그렇게 우리는 익숙함 속으로 스며든다. 아니 익숙함에 무너진다.
때로는 익숙함이란 그런 것이다.
서로에 대한 배려가 타박이 되어 돌아오고, 처음에 보여준 호의가 어느새 가식이 되고, 장점으로만 여겨졌던 것들이 허물이 되고, 지난날의 그 듣기 좋던 충고가 마음을 찌르는 비수가 되어 꽂히고, 서로의 아픔을 감싸고 상처를 매만지던 손길은 끔찍함이 되어버린 어느 날,
자신의 심장에서 상대의 온몸으로 전해지던 전율은 이미 바닥났고, 서로에게 후벼 파여진 마음에 흉터만 가득해진 어느 날,
결국 이긴 자도 진 자도 없고 서로 상처만 덩그러니 남은 어느 날,
무엇 때문에 언제부터 둘 사이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기만 한 어느 날,
그런 날들이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가구’이다.
지난날의 애틋함이 그리운 자들이여!
지난날의 열정적인 사랑이 간절한 자들이여!
그러기에 익숙함에 무너지고 있는 사람들이여!
그 모든 이에게 도종환의 시 ‘가구’를 권한다. 심장 한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는 전율이 되살아나기를 빌면서.
가구
도종환
아내와 나는 가구처럼 자기 자리에
놓여 있다 장롱이 그렇듯이
오래 묵은 습관들을 담은 채
각자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 일을 하곤 한다
어쩌다 내가 아내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내의 몸에서는 삐이걱 하는 소리가 난다
나는 아내의 몸속에서 무언가를 찾다가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잊어버리고
돌아나온다 그러면 아내는 다시
아래위가 꼭 맞는 서랍이 되어 닫힌다
아내가 내 몸의 여닫이문을
먼저 열어보는 일은 없다
나는 늘 머쓱해진 채 아내를 건너다 보다
돌아앉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저 아내는 방에 놓여 있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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